16 Asia(Vietnam, Laos, Thailand)
비행기 티켓을 끊고 무엇을 가져갈지, 어떤 곳에 머물지 고민하는 순간, 그때가 이미 여행의 시작일지 모른다. Jose Gozalez의 Stay Alive를 틀어놓고 여행 서적을 보며 계획을 짠다. 책 속의 사진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 거리에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자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아, 4일 뒷면 나 이곳에 있는 거야!!!’ 미친 듯이 설렌다.
여름에 1급 정교사자격증 연수를 들을 예정이었다가 취소돼서 정말 엄청나게 계획 없이 지르게 된 여행이었다. 라오스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했던 터라, 동남아 쪽을 생각했고, 가장 싼 비행기 티켓이 하노이었어서 베트남 하노이로 들어가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를 돌아보기로 했다. 비행기 티켓을 끊을 무렵, K군을 만났다.
K군을 만난 건 강남의 한 레스토랑에서였다. 친구가 건너 건너 아는 지인을 소개해줬고, 강남의 그 많고 많은 소개팅 남녀 중에 하나가 우리였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까만 피부의 건장한 체격으로 체육 선생님의 이미지를 풍겼지만 미술 선생님이었던 사람. 굉장히 아웃도어 취미를 많이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생각보다 해외여행 경험도 없었고, 인도어 취미를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배낭을 메고 떠나는 해외여행에 대한 로망은 가득한 사람이었는데, 급작스레 잡은 내 동남아 여행에 관심을 가지면서 ‘따라가도 되냐’라고 물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썸만 타던 사이라 그냥 여행에서 만난 동행이라고 생각하지 뭐 하는 생각으로 급작스러운 제안에 아무 생각 없이 허락을 했던 나. 그렇게 썸 타는 소개팅남과 한 달짜리 여행을 같이 하게 되었다.
K군은 처음 떠나는 배낭여행에 굉장히 신나 있었다. 배낭을 새로 사고, 동남아 여행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설레어했던 부분은 비행기티켓 외에 아무것도 예약하고 가지 않는 ‘내 여행 스타일’이었다. 무조건 ‘나를 따라가는 여행’이었다. 이 부분이 나중에 얼마나 부정적인 요소가 될지 모른 채, 우리는 비행기에 함께 몸을 실었다. 생각해 보면 잘 알지도 않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개팅남과 여행 갈 생각을 했던 나도 참 무모하긴 하다.
하노이 공항에 새벽에 도착해서 공항노숙을 했다. 해가 뜨고 하노이 여행자 거리에 있는 호스텔에 가서 체크인을 하고 밧짱이라는 도자기 마을에 다녀왔었다.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 베트남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갔었는데, 그때 무척이나 신나 했던 K군이 생각난다. 도자기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슈퍼에서 시원한 맥주를 사다가 노상에서 먹었는데, 하노이에 도착하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시간이 뉘엿뉘엿 느리게 흘러가던 순간.
K군은 술도 좋아했고, 음식도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었다. 왜 지금까지 해외여행을 한 번도 가지 않았을까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적응했고, 여행을 즐겼다. 공항노숙도 잘했고, 하노이에서 라오스로 넘어갈 때 탔던 슬리핑 버스도 잘 탔다. 하롱베이를 가고 싶었지만 태풍으로 갈 수 없었고, 우린 빠르게 하노이를 마무리하고 라오스 루앙프라방으로 이동했다.
루앙프라방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꽝씨 폭포라는 곳이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폭포인데, 에메랄드 색깔의 물과 풍경을 감상하며 수영하기 좋기로 유명한 곳. 시내에서 꽝씨 폭포까지는 툭툭, 오토바이 대여, 자전거 대여 이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또 객기가 발동해서 자전거 타고 가려고 숙소에 자전거 대여를 문의했더니 아르바이트하는 친구가 '너 미쳤니'라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결국 타협한 것이 오토바이였다. 가는 길은 단순했다. Joma카페를 기준으로 시내의 오른쪽 부분으로 계속 가다 보면 폭포 안내 푯말이 나오고 그 길을 쭉 따라가면 됐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나는 여기서 여행을 중단하게 되어버릴 뻔했다. 아니... 인생을 중단하게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K군이 운전하던 오토바이에서 함께 넘어져 떨어졌다.
이날 쨍하고 따가운 햇볕을 내리쬐다가도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날씨였다. 비가 후드득 떨어지니 시야가 흐려졌고, 길도 미끄러워졌다. 둘 다 신나서 빠른 속도로 가던 중 미처 못 보고 있다가 길이 오른쪽으로 급격히 꺾였다. 꺾으니 나무로 된 다리. 라오스 다리는 십자형으로 덧대어서 만들어져 있었고, 그 다리 윗부분을 딛어야 하는데 아랫부분을 디뎌 오토바이가 넘어졌다.
'아 넘어지겠다'하고 생각한 순간부터 길 위에 내팽개쳐져 있는 나 자신을 자각할 때까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자각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정말 머리가 띵하고 모든 것이 회색으로 보였다. 실명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고, 사람이 잘 없던 길이라 긴급구조 요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러면서도 여행이 끝나면 어쩌지 하는 철없는 생각도 들었다.
한 5분이 지나가 다행히도 회색으로 보이던 세상이 다시 멀쩡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다리는 온통 피투성이. 진짜 눈물 나게 따뜻한 집이 그리워지던 순간. 그냥 꽝씨폭포고 뭐고 오토바이고 뭐고 다 던져버리고 우리 집, 아니 루앙프라방 숙소로 순간이동하고 싶었다. 겁도 생겨서 오토바이도 절대 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오토바이 질질 끌고 숙소로 갈까, 아씨 자전거 탔으면 안 다쳤을 텐데, 하고 괜히 알바 탓을 하고.
박살 난 오토바이를 바라보며 길 위에 한참을 녹다운 상태로 앉아있었다. 여행 경험도 없던 K군에게 이런 사건은 멘붕 상태를 안겨줄 법도 한데, K군은 나보다 더 다쳤음에도 나와 오토바이를 먼저 살폈다. 그리고 오토바이 상태가 폭포까지 괜찮을 거니 폭포에 가보자고 했다. 다행히 오토바이 옆부분 플라스틱만 떨어진 거라 주행에 문제가 없었고, 또 다행히 폭포 근처에 병원이 있어서 간단히 치료도 받았다. 천만다행이었던 것은 다른 차나 사람과 부딪힌 게 아니라 혼자 자빠진 거라 상태가 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린 훌훌 털고 꽝씨폭포에서 신나게 놀았다. 그날 저녁 사실 내 멘털을 잡아준 고마운 K 군이었는데도 본인이 몰던 오토바이에서 떨어져 다친 내게 미안해하는 K군에게 참 많이 고마워하며 같이 맥주를 마셨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루앙프라방-방비엥을 거쳐 우리는 치앙마이로 이동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여행이 길었던 문제도 있지만 내가 K군에게 좋아하는 감정이나 호감이 별로 없었던 게 문제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K군의 문제라기 보단 그에게 별로 마음이 없던 내가 문제였던 것 같다. K군은 '남자친구로서' 함께 하는 여행을 그렸는데, 나는 '동행자로서' 함께 하는 여행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시간이 버거워졌고, 또 여행을 해보지 못했던 터라 내가 대부분 알아보고 찾아다녔는데, 그러면서 심지어 K군이 귀찮게까지 느껴졌다. 또 모든 여행 일정에서 나에게 의지하려는 K군의 모습에 더더욱 나의 호감도는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개팅 한 사람과 여행을 온 게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이 사람과 헤어지고 다른 동행자도 만나고, 현지인이나 외국인과도 이야기해보고 싶어져 버린 것이다.
그게 치앙마이 때부터였는데, 치앙마이에서 현지인을 만날 수 있는 트레킹 투어를 같이 가놓고 나는 K군은 혼자 내버려 두고 투어에서 만난 외국인들과 다녔다. 투어 가이드와 친하게 대화를 나눴고, 거기서 만난 외국인들하고 맥주를 마셨다. 심지어 코스 안에 있는 래프팅은 다른 배를 탔다. 이렇게 쓰다 보니 나 되게 못된 사람 같네. 그렇게 삐걱대던 시점, 치앙마이에서 방콕으로 이동하는 날. 원래는 걸어서 기차역에 갈 생각이었다. 밤이나 새벽도 아니었고, 겸사겸사 치앙마이도 한 번 더 구경하기 위해. K군과 오전 시간을 각자 보내고 한 시에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약속시간이 한참이 지나도록 K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차표도 다 내가 가지고 있던 터라 먼저 갈 수가 없어 발만 동동 구르며 K군을 기다렸다. 약속시간에 30분을 넘겨 도착한 K군은 도이수텝에 가볼까 해서 성태우를 탔다가 늦었단다.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도이수텝을 포기한 나였기 때문에 화가 났다. 그동안 불만이었던 것이 터져서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여행을 같이 하게 되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 서로의 성격 차이로 인한 문제, 배려의 차이로 인한 문제, 선호하는 것의 차이로 인한 문제. 그런 것들이 거추장스러워 혼자 여행하는 것을 즐기다가도, 또 사람이 고파지면 함께 여행하는 것을 그리워하게 된다. '혼자는 외롭고, 함께하면 숨 막혀... 어느 상태든 영원한 행복은 없어.'라고 했던 알랭드보통의 말이 딱 어울리는 순간. 결국 툭툭를 타고 기차역에 갔고, 기차를 타고 방콕, 다시 바로 동부터미널로 가서 파타야로 이동했다. 그리고 파타야에서 방콕으로 돌아오던 날, K군은 파타야에 남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렇게 소개팅남과 시작한 동남아 일주는 태국 파타야에서 끝났고, 난 파타야-방콕-씨엠립-방콕-끄라비-방콕까지 혼자 여행했다. 처음에는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고, 나중에는 외로운 느낌도 들었다. 그러다가 K군과의 여행을 추억하기도 했다. 지금은 어디 즈음에서 잘 살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