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Argentina
이제는 혼자 배낭을 짊어지고 이름 모를 사람에게 지도를 들이밀며 길을 묻는 게 익숙하지만 나도 혼자 떠나기 겁났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혼자 다니는 것이 익숙해질 무렵, 여행지에게서 동행을 구해 다니는 것도 매력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복은 또 터져서 여행에서 좋은 인연을 맺고 또 한국에 돌아와서도 꾸준히 좋은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 이야기는 그렇지 못했던 사람과의 이야기.
남미는 30대가 되기 전 꼭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물론 가기까지 쉽진 않았다. 내가 떠났던 가장 길고 먼 여행이었다.
‘오늘이 내가 그곳에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몰라.’
‘떠날 수 있을 때 무조건 떠나야 한다.’
이게 내가 2014년 여름, 그리고 겨울에 터키행, 말레이시아행 표를 취소하게 되면서 느낀 것이었다. 여행을 가려면 비행기티켓만 있어서는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내 몸이 건강해야 하고, 가족 내 특별한 일이 없어야 하고, 내가 하는 일에도 별다른 일이 없어야 하고, 나라 안에도 별일이 없어야 한다. 그게 어릴 적에는 당연하다고 여겼었는데, 장례식에 갈 일이 많아지면서, 내 몸도 예전 같지 않다고 여기게 되면서, 세월호, 메르스 등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나라에 터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떠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015년 9월에 비행기티켓을 끊으면서도 반신반의했었다.
‘정말 갈 수 있을까?’
다행히 떠나기에 모든 조건들이 완벽하게 들어맞아주었고, 나는 2016년으로 해가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아 남미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을 수 있었다.
미국 달라스를 거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30시간을 걸려 도착,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박을 한 후, 다시 국내선을 타고 엘칼라파테로 이동했다. 그리고 엘칼라파테에서 K군을 만났다.
K군은 한국에서 엘칼라파테-엘찰튼을 함께 여행하자고 미리 약속한 동행이었다. 처음 엘칼라파테에서 만나 레스토랑에 들어가 밥을 먹는데,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하나는 내 고등학교 동창과 대학교 동기라는 것과 하나는 나와 성격이 참 다르다는 것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 4박 5일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사실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리고 보면 인도에서 만난 S군과 7박 8일을 함께 한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여행운이 좋아서 나는 늘 좋은 동행을 만났고, 내 여행은 행복하게 채색될 수 있었다. 좋은 기억만 많아서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어버리고 기대하게 되어버린 걸까. 남미에서도 평생 알고 지낼 소중한 인연을 만날 것이라고 믿어버린 것이다.
이 친구와 동행하고 둘째 날이 되었을 때 즈음, ‘아 이 K군과 다니는 것이 나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올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가 나쁘거나 틀려서가 아니다. 나와 달라서.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K군은 한식 없이는 못 살아서 저녁을 꼭 쌀을 사다가 해 먹어야 하지만 나는 한식보다는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K군은 사람이든 상황이든 스스로 판단 내리고 평가하여 그것을 여과 없이 다 입 밖으로 말하는 성격이지만 나는 생각은 자유롭게 하되 그것을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는 성격이다. K군은 자신의 프레임에 맞지 않는 모습들에 불평불만이지만 나는 그것을 느끼려 여행하고, 이 사람들은 이 환경에서 이렇게 자랐으니 그것이 당연할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마지막 날에는 정말 이 친구의 불평불만을 다 들어주다 못해 화가 나서 ‘그러면 여행을 뭐 하러 왔어!’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참았다. 내 주장이 통하지 않도록 자신의 생각이 견고했던 친구였기 때문에. 난 대신 입을 닫게 되었다. K군은 아마 그런 내 모습에 많이 답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K군 덕분에 중간에 포기할 뻔했던 엘찰튼 피츠로이 트레킹을 완주했고, 호스텔에서 밥을 지어먹으며 마트에서 산 싼 와인을 마음껏 먹어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 ‘이성적인 동반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내 지론은 그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여행을 같이 가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K군은 나와 맞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당연히 나는 여행을 가면 좋은 사람들을 만날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렇지 않은 동행을 만나 깨진 것처럼, ‘당연히 나와 맞는 사람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깨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또 그러면서 지금까지 나와 잘 맞았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아 엇갈렸던 인연들이 떠오르며 괜히 조급해졌다.
어쩌면 K군은 아르헨티나가 아니라 한국에서 만났다면 더 친해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와 술 먹는 스타일이 비슷했으니 술친구 하나 더 느는 셈이지 뭐.
바람마저 달콤했던 엘칼라파테와 엘찰튼에서 만났던 K군. 그리고 나는 이어지는 3주의 남미 여행에서 계속 나와 맞지 않은 동행들을 만나게 되었다. 누군가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여행지가 어디냐 물으면 ‘인도’라고 대답하는 이유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때문인 것처럼, 아이러니하게도 내 꿈의 여행지였던 남미는 ‘생각보다 인상적이지 않은 곳’이 되어 버렸다. 참, 내 인생에서, 내 여행에서 ‘사람’이 참 중요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