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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은 수현과 편의점에서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서 따뜻한 김이 수줍게 피어오르는 홍차를 마셨다. 조용히 그저 이따금씩 웃으며 아무런 말이 없는 짧은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리고는 일어나 답답했던 편의점 밖으로 무작정 걸어 나갔다. 누가 보면 마치 이별의 말을 주고받은 연인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 노란 은행나무잎이 바람에 낮게 쓸려가는 모양이 늦가을의 서정을 더해 주었다. 그래선지 얼마간 그 모양새를 바라보며 걸었을 뿐인데, 수현의 파란 스포츠카가 주차되어 있는 공원의 공터였으며 둘은 아무런 약속도 없이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연극 좋아하는지 물어나 볼 것을..."
매일 반복되는 단순한 업무 속에서 짧은 오후의 시간을 보냈다. 회사에서 나와 10여분 남짓 걸으면 지훈의 작은 아파트가 있었다. 회사에서 제공한 사원아파트였다. 이 사원아파트는 꽤 오래된 아파트였지만, 회사에서 지나칠 정도로 관리에 신경을 써서인지 외관이 그랬던 것처럼 신축아파트처럼 보였고, 그다지 불편함이 없었다. 아파트 건물 사이사이에는 근방의 다른 아파트보다 나이가 든 아름드리 큰 나무가 꽤 많았고, 지훈은 퇴근 후엔 그런 큰 나무들 사이에서 몇 가지 상상을 하며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 오늘은 수현과 함께 산책을 하는 자신을 그렸다. 입가에 살짝 그려졌던 미소가 그녀의 작은 얼굴에 가득 찼다. 그녀의 작은 얼굴에 꿰맞춘 듯 오목조목 자리한 눈과 코와 입이 무척이나 예쁜 모양새라고 생각했다.
"에프터도 없이 헤어지다니?"
수현은 지훈과의 짧았던 점심데이트가 아쉬웠다. 더욱이 에프터도 없이 헤어지다니. 내일도 오늘처럼 의례히 공원에서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조금 이르게 퇴근을 한 수현은 병원에 들렀다. 특별히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외례진료로 받는 짧은 정기검진이었다. 의사와 간단히 문진으로 진료를 받고 병원을 나섰는데, 정문을 돌아선 꽃가게에서 국화과 꽃들이 조용히 그렇지만, 화사하게 가을이 스러져감을 알려주고 있었다. 수현의 맑은 눈에 맞춤당한 보랏빛 달리아 몇 송이가 그녀의 스포츠카 조수석에 놓여 있었다.
휑하다. 수현은 투명한 기다란 유리컵에 물을 받아서 달리아를 담았다. 보랏빛 꽃송이가 거실조명에 비쳐 은은하게 거실을 감싸 안는다. 조금 전까지 휑하기만 하던 아파트가 몇 송이의 꽃으로 분위기가 일순간에 바뀌다니. 수현은 기다랗게 놓여있는 소파에 몸을 던지고는 가만히 엎드려 달리아꽃의 은은한 보랏빛을 맘껏 즐겼다. 어느 순간 지훈의 얼굴이 떠올랐다. 맑고 깨끗한 지훈의 눈동자였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콧날과 꼭 다문 입술이 잘 어울렸다. 거기에 어울리지 않게 생각되는 그늘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사람일까?"
"아픔이 있는 사람이 분명한데, 어떤 상처를 가진 사람일까?"
수현은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에게서는 가질 수 없었던 왠지 모를 동질감을 지훈에게서 느꼈다. 그녀 스스로는 그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훈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밤새 뒤척거리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흐릿한 과거의 기억이 낡은 사진에서처럼 이질적으로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것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지난밤의 꿈이기도 했다. 그것이 그녀의 머릿속을 계속해서 짓눌렀다. 그래서일까, 어떻게 오전을 보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시간은 벌써 점심을 향해 무겁게 움직이고 있었다.
파란 스포츠카를 몰고 노란 은행나무잎이 날리는 공원의 이면도로를 따라서 천천히 움직인다. 오늘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그 바람 속에서 지훈은 어제도 앉고, 그제도, 그 전날에도 앉았을 바로 그 벤치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수현의 파란 스포츠카가 미끄러지듯이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훈은 그런 수현의 스포츠카가 그녀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