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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지난 며칠 동안 단 한 차례도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신지훈입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좋군요, 반갑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수연에게 다가오더니 대뜸 인사를 건넨 지훈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유수연이에요. 근데 우리 만난 적이 있던가요?" 수연이 얼떨결에 답하며, 되물었다.
"만났다고 하면 만났을 수도 있고, 그런 거죠."
"무슨 말이 그래요?"
"이를테면 그렇다는 것이죠."
지난 며칠 동안 가졌던 혼자만의 생각과는 달리 다소 엉뚱해 보이는 지훈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던 수연은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인데, 어디서 본 듯한 이 기분은 뭐지?' '정말 만난 적이 있었던가?'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의 강렬한 첫인상이 아니었는데, 지훈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혼자서 생각한 시간이 너무 길었나...
"근데, 뭐 하시는 분이세요? 매일 정장차림에 점심시간마다 여기 나오시는 거 보면 근처 회사에 다니시는가 본데..."
"ㅎㅎ, 수연 씨 말씀대로 요 앞 회사에 다녀요. 그런데, 수연 씨는?"
"저도 가까운 곳에 사무실이 있어요."
"참, 식사는 하셨어요? 식사 안 하셨으면 함께 먹어요."
지훈은 얼른 종이봉투를 세로로 길게 찢었다. 그리고는 겉포장지를 젖히고 토마토와 양배추가 살짝 삐져나온 햄버거 하나를 수연 쪽으로 내밀었다. 몇 가닥은 더 많아 보이는 감자튀김, 아직은 따뜻해 보이는 커피 한 잔이 그 옆에 곧 놓였다. 수연은 먼발치에서 지훈이 이렇게 점심을 먹는 듯, 마는 듯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20대 남자의 점심치고는 열량이 너무 부족하지 않나 생각했었다. 마침 그녀도 아직 점심은 먹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만두전골 잘하는 집이 있는데, 가요."
"....."
감자튀김을 하나 집던 손으로 시계를 보더니 말없이 일어나 햄버거와 감자튀김, 커피를 챙기는 지훈. 수연도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둘은 나란히 아무런 말 없이 노란 은행나무잎을 밟았다. 한 발씩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훈과 수연의 말없음을 대신하는 듯 사각거리는 소리가 가을이 깊어감을 말해 주었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날엔가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왔던 동네 맛집이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홀에 십여개 남짓의 테이블을 둔 노포였다. 가족분들이 운영하는 오래된 맛집. 주변의 회사와 개인 사무실의 직원들이 북적이며 떠들썩하게 한참 식사 중이었다. 지훈과 수연은 운 좋게도 막 자리가 난 창가 쪽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옆에 나란히 앉았을 때와 달리 얼굴이 마주 보이며 앉았다. 왠지 쑥스럽기도 하고, 괜스레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지훈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 어떻게 그 많은 맞선을 보러 다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오신 적 있나 봐요?" 수연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짧았던 어색함을 깨뜨렸다.
"아, 네. 직원들과 밥 먹으러 한번 왔었나 봐요."
"그때 뭐 드셨어요? 이 집은 만두전골이 유명하지만, 다른 음식도 괜찮게 맛있는 편인데..."
지훈은 그때 뭘 먹었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낯선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지금의 어색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잠깐의 생각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도 만두전골 먹었던 것 같아요."
"그럼, 오늘은 다른 걸 먹어봐요. 괜찮죠?"
그렇게 묻더니 지훈이 답하기도 전에 칼국수를 주문한 수연. 사실, 지훈은 대부분의 분식을 좋아하지만 칼국수와 떡볶이는 그다지 즐기지를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칼국수를 주문한 것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큼지막한 칼국수 대접이 놓였다. 약간 불규칙하게 굵어 보이는 하얀 면발이 손으로 반죽해서 칼질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면발 옆으로 수북히 많은 바지락이 보였다. 아직 파릇한 생기를 잃지 않은 파와 함께 오래 끓여진 육수의 시원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눈으로만 맛을 봐도 시원함이 느껴지는 국물의 맛이었다. 그 순간 발길에 채일 듯 눈앞에 떨어져서는 하얀 연기를 뿜던 최루탄이 또다시 맴을 돌았다. '왜 지금 이 순간에...' 지훈은 요즘 들어 부쩍 잦아진 그날의 기억을 지우며 말없이 칼국수를 먹었다. 아무런 말 없이 젓가락질을 했다. 칼국수 그릇과 깍두기 찬그릇을 왔다 갔다 하느라 바쁜 젓가락질이었다
수연은 공원에서와 달리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지훈이 느껴졌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려 칼국수를 먹으며 몇 개의 잡다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지훈은 묵묵히 칼국수만 먹으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을까?' 수연은 식당에 들어오고 난 이후의 기억을 되살렸다. 침묵이 지속될만큼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칼국수와 깍두기를 번갈아 젓가락질을 하던 지훈과 눈이 마주쳤다.
"지훈씨, 칼국수 안 좋아하는군요."
"...."
"미리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미안해요."
"ㅎㅎ 아니에요. 즐기지를 않아서 그렇지 싫어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럼, 나갈까요? 억지로 드시지 말고요."
"수연씨는 드시지도 않았잖아요. 저는 잘 먹고 있는데, 말씀대로 시원한 국물이 좋아요. 수연씨도 어서 드세요. 칼국수 드시고 따뜻한 차 한 잔 하러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