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의 에피소드이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친구에 관한 아무런 생각과 선입견도 없이 그저 하루의 시간을 보내면서 만나게 되는 이들 중에서 그나마 친분이 있고, 제법 오랜 시간을 부대낌 없이 보냈으면 친구라고 생각했던 조금은 어리숙한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대학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고시공부 한답시고 학교 정독실에서 한참 책만 보며 지내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함께 공부를 하던 친구였는지, 아니면, 선배였는지 몇 명 되지 않던 정독실원 누군가의 생일이었다고 기억에 남아 있다.
생일이라고 매번 그렇게 하진 않았는데, 이날은 저녁을 먹으며 축하주를 반주로 곁들여 소주를 서너 병 마셨던 듯 하니 어림잡아 참석 인원 각자 반 병이상은 마셨나 보다.
저녁모임이 끝나고 자리를 파한 후 집으로 돌아왔고, 다음 날 오전에 책 몇 권을 들고 나섰더니, 어젯밤 저녁을 함께 했던 동기 놈 하나가 차를 운전해 귀가하다가 음주단속에 걸려 벌금이 60만 원 넘게 나왔단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가 그렇게 말렸건만, 키를 뺏었어야 했었는데. 아무튼, 형 몰래 차를 갖고 나왔고 음주단속에 걸린 것을 형이 알면 맞아 죽는다고 하며 벌금으로 낼 돈을 빌려 달라고 했다.
이미 다른 누군가에게 들었는지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비로 모은 돈을 내가 갖고 있단 것을 알고 있었으니, 나는 아무런 부담 없이 흔쾌히 빌려줬다.
"고맙다."라고 하며, "최대한 빨리, 꼭 갚겠다."라고 했으니 그저 갚겠지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졸업할 때까지 되돌려 받지 못하고 시간은 지나갔다.
졸업할 무렵, 아버지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전혀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코마상태로 아버지의 죽음을 맞아야 할 줄 알았지만, 다행히도 보름 만에 돌아오셨고, 난 어른들의 바람대로 공부를 접었다.
공기업에 급하게 취업을 했고, 결혼을 해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그때까지 그 동기 놈에게 단 한번 그 돈을 갚으란 말을 했었고, 그는 돈이 생기는 대로 곧 갚겠다고 했다.
이후 아버지께서는 며느리가 차려드리는 밥상 한 번 받지 못하시고 뭐가 그렇게 바쁘셨는지, 이승에 잠깐의 미련을 가지실만 하셨지만, 서둘러 귀천하셨다.
장례를 치른 후에 진급시험을 공부하던 나는 무슨 미련이 남아서인지 공부를 다시 하겠다며 퇴사를 했고, 신림동에서 안암동을 오가며 한 눈 팔지 않고 책만 보며 살았다.
다행인지 운 좋게 1차 시험에 합격했으나, 그해 2차 시험에서는 낙방했다. 다음 해 2차 시험을 공부하는 중에는 갖고 있던 돈이 바닥이 났다.
하는 수 없이 단기간 봉천동 종합입시학원에 고등부 외국어 단과강사로 출강을 하고 있었던 그즈음.
어느 주말, 동기모임이 있었는지 친구가 전화를 해서는 이놈을 바꿔주는 것이 아닌가.
친구를 통해서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며, 대뜸.
"공부할 시간도 없을 텐데, 웬 입시학원?" 그러더라.
그래서 기왕지사 말 나온 김에, "책값과 고시원비 때문이니 몇 년 전 빌려간 돈 좀 갚아라" 했더니 잠시잠깐의 정적. 짧은 침묵 뒤에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말은..."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
그리고는 잊으라는 둥의 몇 마디를 덧붙였는데,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원하던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고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지만, 참 어이없었다.
결코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아니 될 말을 한 듯한 모멸감이 느껴지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그래, 갚을 놈이었다면 진즉에 갚았겠지."
동기 놈이 시험에 합격할 듯하다고 하니 뭔가 덕이라도 볼 수 있으려나 하고 통화를 했는데, 잊은 줄 알았던 이야기를 꺼냈으니 네놈도 적잖이 당황스러웠겠지.
그러나, 아무리 당황스러웠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그 이후 음주운전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극단적으로 싫어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친구라면서 전화했던 그놈과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인연의 끝을 맺었고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했던 작은 실수가 상대방에겐 상처가 되기도 한다.
이럴 때 그 실수나 잘못을 나중에라도 알았다면 상대방에게 미안해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인간다움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미를 가진 사람들과는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끈덕지가 있다.
더군다나 상대방이 스치듯이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오랫동안 정을 나눈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불행은 누가 진정한 친구가 아닌지를 보여준다.
Misfortune shows those who are not really friends.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