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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

by 몽유

아이들과 함께 집을 나서고 나란히 길을 걷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그것이 산책을 나서는 길이든, 볼 일을 보러 나서는 길이든 여하 간에 즐겁다.


겨울 햇살이 수줍어하는 듯하더니 하루종일 봄이라고 해도 될만한 날의 오후에 아이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지난 며칠, 햇살이라곤 없이 잔뜩 흐린 날씨에 바람 속에서 눈이 날리더니 곧 비를 불렀다. 비는 하얗게 쌓인 눈을 형체도 없이 녹여 버렸지만, 그 비에도 군데군데 구석진 자리 그늘 속에는 작은 눈사람 하나, 아직도 하얀 눈덩이가 앙상한 뼈다귀만 남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 없는 거리엔 포근한 햇살을 맞으며 삼삼오오 아이들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길 위에서 포근함과 가벼운 쌀쌀함이 번갈아 감도니 따뜻한 라떼 한 잔씩 손에 들었다. 아이들은 별 말은 없었지만, 옆에서 말없이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녀석들 많이 컸구나 싶다. 종종걸음을 걸으며 앞서가면 성급한 걱정과 불안에 이름을 부르면 쪼르르 달려와서 내 손을 잡아주던 아이들이 이젠 여드름 투성이다. 지난가을 농구장에서 농구공을 주고받던 때와는 또 다른 아이들의 모습에 설렘이 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볼일을 보고, 면허갱신용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병원에 들러야 했지만, 내 속도 모르고 하필 이럴 때 말썽을 피우다니. 암만 겉과 속이 다르다지만, 이건 또 무슨 일인 것인지. 하긴 이 속과 그 속은 다른 것이겠지만. 결국 대기자가 너무 많았던 병원진료는 다음날 아침으로 예약하며 진료를 미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화원에 잠시 들러 장미꽃 몇 송이를 샀다. 지난번 즉흥적으로 몇 송이 사 왔더니 너무 좋아하던 그녀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요즘 장미꽃이 금값이라고 하며 꽃바구니에서 몇 송이를 집어드는데, 한송이는 꽃잎 몇 개가 만지면 부서질 듯이 마르고 시들었다.


"그것만 다른 녀석으로 바꾸고 안개꽃이랑 포장해 주세요. 포장은 너무 예쁘게 하지 않아도 되고요. 집에 가자마자 화병에 꽂아 둘 테니."


그렇게 말하고 나서 아이들과 화원을 둘러보는데, 그 사이 포장이 다 되었다며 건네준다. 엥, 조금 전 바꿔달라고 했던 녀석이 그대로 껴있다. 분명히 다른 녀석으로 바꾸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그래도 이젠 어쩔 수가 없다. 아이들과 즐거운 추억 만들기 마지막 장면을 망치고 싶지 않다. 꽃으로 때릴 수도 없고.


마른 잎은 잘라내고, 대충 다듬어서 거실 화병에 꽂아두니 은은한 꽃향기가 금방 거실을 가득 채운다. 살짝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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