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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녀의 바다

열여섯 살의 소녀

by 몽유

그건 분명히,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 윤정은 자주 바다에 나갔다.

비가 오는 날에도, 바람이 거센 날에도.

엄마는 말리지 않았다.

대신, 윤정이 돌아올 때마다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등을 토닥였다.


그 손길 속에 담긴 건 두려움이었을까, 혹은 체념이었을까.

윤정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밤마다 파도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바다는 여전히,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이제, 윤정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열여섯의 윤정은 더 이상 바다를 바라보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왔고, 창문을 닫고,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라디오에서는 서울의 봄을 말했다.

벚꽃, 신호등, 카페, 그리고 지하철.

그 낯선 단어들이 윤정의 머릿속에 자꾸 맴돌았다.


엄마는 여전히 새벽마다 어판장으로 향했다.

이젠 말이 줄었고, 웃음도 줄었다.

대신 일의 손놀림은 더 빨라졌다.


윤정은 그런 엄마의 등을 볼 때마다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어쩐지 배신처럼 느껴졌다.


“서울 가면… 바다 냄새는 안 나겠지?”

어느 날 윤정이 물었다.

엄마는 손에 들린 생선을 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거긴 바다가 없으니까.”

“그럼… 아버지는 들을 수 없겠네. 내 목소리.”

그 말에 엄마의 칼질이 멈췄다.

잠시,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괜찮아. 네가 사는 곳에서도, 아빠는 듣고 계실 거야.”


윤정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그건 위로를 가장한 체념이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부엌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보았다.

짠내가 났다. 언제나처럼.


밤이 되자, 윤정은 작은 가방을 꾸렸다.

낡은 교복 한 벌, 아버지 사진 한 장, 그리고 오래된 조개껍질 하나.

그건 은비가 모아둔 것 중 가장 깨끗한 것이었다.

은비는 여전히 바다를 좋아했다.

조개껍질을 귀에 대고, “바닷소리 들려?” 하며 웃곤 했다.

윤정은 그 웃음이 부서질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새벽, 버스가 마을 어귀를 벗어날 때.

창밖으로 바다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파도는 밀려오고 있었다.

윤정은 창문에 이마를 대고, 속삭였다.

“아버지... 이제, 나를 놓아줘요.”


그 순간, 바람이 불었다.

멀리서 종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건 마치 대답 같았다.

윤정은 눈을 감았다.


버스가 굽이진 길을 돌아, 바다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윤정은 처음으로 울었다.

그 울음은 슬픔이 아니라, 어쩌면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도시의 공기는 무취였다.

윤정은 그게 이상하게 불편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거리, 모든 것이 정돈된 듯한 빌딩 사이에서 그녀는 자주 방향을 잃었다.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 사이에 서 있으면 세상이 마치 자신과 상관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어딘가로 향하지만, 아무도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 속에서 윤정은 자신이 아주 조용히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방 한켠,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조차 바다의 냄새는 없었다.
대신 먼지와 사람들이 뿜어내는 악취와 비릿한 냄새에 전기기기들이 내는 냄새만.
그녀는 밤마다 그 냄새 속에서 문득문득, 바다를 떠올리곤 했다.
비린내가 싫다던 어린 날의 자신이 이제는 그 냄새를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때로는 꿈을 꾸었다.
아버지가 부표 위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는 꿈.
“윤정아, 그물 좀 당겨라.”
그 목소리는 언제나 바다처럼 잔잔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물을 잡으려 작고 하얀 손을 뻗어낼 때마다 손끝이 닿기 전에 파도가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꿈은 깨어졌다.

출근길, 버스 창문에 비친 아지랑이처럼 흐릿한 자신의 얼굴이 가끔은 낯설었다.
소금기에 벼락처럼 굳어 있던 어린 얼굴이 이젠 도시의 먼지 속에 희미해졌다.
그녀는 그 사실이 서글펐다.
시간이 자신을 다듬는 대신, 서서히 지워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어쩌면 이대로 흔적 없이 영영 지워지는 것은 아닐까.


어느 날, 버스 정류장에서 누군가의 손에 들린 생선 냄새가 스쳤다.

윤정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 냄새는 오래된 기억을 단숨에 깨웠다.

해 질 무렵, 그물터에서 울던 자신과 손끝에 느껴지던 거칠었던 그물매듭, 그리고 엄마의 굳은살 박인 손.


윤정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도시의 하늘은 회색이었다.

파도 대신, 자동차의 불빛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바다는, 잊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구나.”


그날 밤, 윤정은 오랜만에 창문을 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어쩐지 파도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속삭였다.


“나... 아직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나 봐요.”


바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커튼이 흔들렸다.

그 움직임 속에서 윤정은 자신의 심장이 아직 바다의 박동에 맞춰 뛰고 있음을 느꼈다.


그해 여름, 도시는 이상할 만큼 더웠다.

건물과 아스팔트가 열을 머금은 채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윤정은 퇴근길마다 버스 대신 걸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어딘지도 모를 골목길로 들곤 했다.

골목 끝에는 낡은 세탁소가 있었고, 그 옆 좁은 틈 사이로 작은 개천이 흘렀다.
녹슨 난간 밑으로 고인 물이 한참을 들여다봐도 알 수 없을 속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래도 그 물 위엔 햇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윤정은 한참을 그 앞에 서 있었다.
물의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나마 짠내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그녀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이 도시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비록 그것이 아주 작고 탁한 물결이라도 자신은 여전히 ‘흐르는 것’ 곁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윤정은 출근길마다 그곳을 지나며 잠시 멈춰 서곤 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하수라 했지만, 윤정에게 그것은 그녀만의 작은 바다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파도의 흔적을 만지며, 아버지의 목소리 대신 물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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