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살의 소녀
열한 살의 윤정은 바다가 싫었다.
바닷가에선 바람이 불면 머리카락이 눈을 덮었고,
바닷물은 종종 아무런 이유 없이 차가웠다.
그런 윤정은 학교가 끝나면 늘 갯가로 나갔다.
동생 은비가 언제부턴가 혼자서 조개껍질을 모으며 뛰어다녔기 때문이었다.
윤정은 동생을 마냥 따라다녔다.
가끔은 작은 물고기들이 죽은 채 밀려오는 바다였다.
엄마는 새벽이면 어판장에 나가 경매에 올릴 생선들을 정리했고, 낮에는 어부들의 그물에서 고기와 게를 떼어내며 그물을 손질했다.
윤정의 집엔 늘 비린내가 맴돌았다.
그 냄새는 아무리 창문을 열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얼굴은 사진 속에만 남았다.
그 얼굴은 늘 웃고 있었지만, 사진을 오래 바라보면 파도 소리가 들렸다.
윤정은 파도 소리를 들으면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태풍이 몰아치던 밤, 사람들이 우르르 바닷가로 달려갔다.
그들의 다급한 목소리, 울부짖음, 그리고 엄마의 눈물.
그날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는 왜 사람들을 데려가?”
윤정이 종종 물었다.
“그건… 바다가 너무 외로워서 그래.”
그때마다 할머니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윤정은 바다가 외롭다는 말을 오래 생각했다.
언젠가는, 자신도 그런 바다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밤에는, 좁은 창문 틈을 비집고 스며드는 바람 속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
그런 날에 윤정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파도 소리에 묻혀 들려오는 아버지의 음성은 계속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엄마는 바다를 향해 원망을 쏟아내지 않았다.
그저 일했다.
새벽이면 어판장에 나가 경매에 내놓도록 어부들이 잡아온 생선을 크기 별로, 신선도 별로 분류했다.
그물에 걸린 게와 고기를 떼어내며 그물을 정리했고, 떨어진 매듭을 이어야 했다.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바람이 세찬 날엔 손가락 사이로 피가 번졌다.
소금기 밴 손등의 상처마다 바닷물이 스며들어 따가웠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다시 그물을 골랐다.
윤정은 그런 엄마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
'엄마는 이렇게 버텨가는구나.'
봄이 와도 집에는 꽃향기가 없었다.
대신에 그물과 조개껍질, 젖은 빨래 냄새가 어울려 있었다.
어느날부턴가 학교 친구들은 하나씩 도시로 전학을 갔다.
윤정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떠나면, 엄마가 혼자 남을 것 같았다.
그날 오후에는 바람이 유난히 세차게 불었다.
윤정은 집 뒤편 그물터로 나갔다.
그물 무더기, 주낙의 줄이 뒤엉켜 있었다.
윤정은 엄마가 낮에 하던 일을 이어하기로 했다.
주낙 몇 줄을 가리지도 못하고 손끝이 아파서 눈물이 났지만, 끊어진 낚시매듭을 다시 묶었다.
해가 기울 무렵, 생기라곤 찾아보기 힘든 얼굴로 엄마가 돌아왔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윤정을 바라봤다.
말없이, 멍하니, 뚫어져라.
“이제 나도 할 수 있어요.”
윤정이 말했다.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윤정의 손을 쥐었다.
작고, 거칠고, 아직 미숙한 손.
하지만 그 손에 묘한 힘이 느껴졌다.
밤이 되자, 파도 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 소리는 무섭지 않았다.
윤정은 창문을 열고 바다를 보았다.
달빛이 물결 위를 흘렀다.
그날 밤, 바다는 유난히 잔잔했다.
하지만, 윤정은 이상하게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달빛이 파도 위에서 반짝이고, 멀리서 부표가 파도에 몸을 비비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신음처럼 들렸다.
윤정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발끝으로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지나, 창가로 다가갔다.
바람이 멈춘 바다는 낯설었다.
언제나 바람소리를 내던 바다가, 마치 숨을 죽인 것처럼 고요했다.
그 순간, 윤정은 바다에서 어떤 형체를 보았다.
멀리에, 파도와 어둠이 맞닿은 곳에 희미하게 무언가가 떠 있었다.
윤정은 눈을 비볐다.
그건 사람의 형체 같았다.
“아버지…?”
그녀의 입에서 저절로 그 말이 흘러나왔다.
그 이름을 부르자, 바람이 다시 일었다.
살결을 스치는 바람은 차가웠지만, 동시에 익숙했다.
그건 오래전, 아버지가 윤정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의 손길과 닮아 있었다.
그날 새벽, 윤정은 다시 잠들지 못했다.
바다의 냄새가 방 안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 냄새는 사진 속 아버지의 웃음과 섞여, 어쩐지 더 슬프게 느껴졌다.
며칠 뒤, 바닷가에서 큰일이 났다.
이웃집 아저씨가 새벽 조업 중에 배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바닷가 포구로 몰려가고, 누군가는 통곡을 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그곳으로 향했고, 윤정은 뒤따라갔다.
그날 바다는 어느날보다 잔잔했지만, 그 잔잔함이 오히려 더욱 무서웠다.
사람들이 던진 밧줄이 허공을 가르고, 누군가는 “잡았다!”며 소리쳤다.
그때 윤정은 깨달았다.
바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전히 물결치고 있었다.
엄마는 돌아오는 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정은 그 옆을 걸었다.
파도는 밀려왔다가, 다시 돌아갔다.
마치 아무것도 삼킨 적 없다는 듯이.
그날밤, 윤정은 바다를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아버지를 돌려주세요.”
대답은 없었다.
멀리서 번개가 치며 잠시 고요한 바다를 비췄다.
그 찰나의 빛 속에서 윤정은 파도 위의 그림자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