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의 바다
비가 오던 어느 날, 개천의 물이 불어나며 바람이 불었다.
우산이 뒤집히자, 윤정은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 속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다.
어디선가, 어린 시절의 자신이 갯가에서 동생을 부르며 뛰어오던 발소리가 겹쳐 들렸다.
윤정은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바다를 떠난 게 아니라, 바다는 여전히 자신 안에 남아 있었다는 것을.
그건 기억이 아니라, 어쩌면 살아 있는 증거였다.
밤이 되면, 그녀는 도시의 창문을 열었다.
멀리서 자동차의 불빛이 흐르고, 바람이 커튼을 스쳤다.
그때마다 윤정은 눈을 감고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여기에도 바다가 있어요, 아버지.”
그 말이 허공에 흩어질 때면, 도시의 공기마저 잠시 짠내를 품었다.
그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모양을 바꾼 바다의 냄새였다.
십 년 만이었다.
윤정이 다시 바다로 돌아왔을 때, 마을은 조금 더 작아져 있었다.
비탈길의 돌담은 더 허물어졌고, 집집마다 붙어 있는 이름표들은 시간의 때가 껴 슬어 있었다.
바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더 조용했다.
어릴 적의 그 사나운 물결 대신, 이제는 숨을 죽인 듯한 파도가 해변을 천천히 핥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까만 자갈돌이 여전히 물결따라 윤슬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디뎠다.
모래는 여전히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반가웠다.
엄마는 여전히 그물터에 있었다.
굽은 허리, 느릿한 손짓,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동작이었다.
다만 윤정은 그 손이, 예전보다 훨씬 작아졌다는 걸 알아챘다.
“엄마.”
그 말이 좁은 목끝을 비집고 새어나오자 엄마는 고개를 들었다.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오랜 꿈속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그러다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왔구나.”
그 짧은 두 음절에 세월이, 눈물처럼 스며 들었다.
윤정은 가까이 다가가 엄마의 손을 잡았다.
소금기와 햇살이 밴 손.
그 손엔 여전히 굳은살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온기가, 오래된 파도처럼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도시에선 잘 지냈니?”
“응... 근데, 자꾸 냄새가 그리웠어요.”
“비린내?”
윤정은 웃었다.
“응... 그 냄새.”
엄마도 따라 웃었다.
그 웃음 속엔 지나간 세월과 용서와 이해가 함께 섞여 있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오래된 부엌에서 밥을 지었다.
밥 짓는 냄새와 파도 소리가 겹쳤다.
불빛 아래서, 윤정은 말했다.
“아버지 꿈을 꿨어요. 그물이 바람에 흔들리던 바다였는데, 그 안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슬프지 않았어요.”
엄마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행이구나. 이제, 그물에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은 거야.”
밖에서는 파도소리가 밀려왔다.
그 소리가 부엌 창문을 스치고 지나갔다.
윤정은 눈을 감았다.
그 소리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이제는, 돌아온 자의 심장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윤정은 오래된 방에 누워 창문을 열었다.
달빛이 바다 위를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속삭였다.
“아버지, 엄마는 여전히 여기 있어요. 그리고 저도요... 이제는, 이 바다가 좋아요.”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그 안에서 윤정은 들었다.
아주 낮은, 그러나 분명한 파도 소리.
그건 다시 시작되는 윤정의 삶의 숨소리였다.
다음날 새벽, 윤정은 바다의 냄새에 눈을 떴다.
안개가 낮게 깔린 해변은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고요했다.
엄마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이며 밖으로 나왔다.
그물터 옆, 오래된 나무 벤치 위에 엄마가 앉아 있었다.
손에는 아버지의 낡은 모자가 들려 있었다.
그 모자는 이미 바람에 닳고, 소금에 바래 있었다.
“오늘이 아버지 제삿날이야.”
엄마의 말에 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무릎 위의 모자를 천천히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질감은 마치 오래된 파도의 표면 같았다.
“그날도 비가 왔지.”
“응, 기억나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그물 작업하러 바다에 가셨던 날.”
두 사람 사이로 파도소리가 흘러들었다.
멈추지 않는, 그러나 더 이상 아픈 울음은 아니었다.
윤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 쪽으로 걸어갔다.
발밑에서 자갈이 부딛히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녀는 손에 쥔 모자를 조심스레 바다에 띄웠다.
모자는 잠시 떠 있다가, 천천히 물결에 삼켜졌다.
“이제 보내드릴게요, 아버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람이 불었다.
윤정의 머리칼이 흩날리고, 파도가 잠시 높아졌다.
그건 마치, 누군가의 대답 같았다.
엄마는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제 네 바다는 여기 말고도 많겠지.”
윤정은 고개를 돌려 미소 지었다.
“그래도, 여기가 시작이니까요.”
그녀는 바다를 한참 바라보다,
주머니 속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어린 윤정과 아버지, 그리고 아직 젊은 엄마가 함께 웃고 있는 바닷가 사진.
사진의 구석이 젖어갔다.
그러나 이번엔 닦지 않았다.
그건 눈물이 아니라, 바다의 손길이었으니까.
멀리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윤정은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마을은 여전히 작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제 바다보다 넓었다.
돌담길을 오르며,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제는, 그리워도 괜찮아요.”
그리고 그 말 뒤로,
새벽의 바다는 한참 동안 부드럽게 울었다.
돌담 끝에서 윤정은 한참을 서 있었다.
새벽의 안개가 걷히고, 바다는 천천히 빛을 품어올리고 있었다.
물결은 여전히 느렸지만, 그 속엔 오래된 리듬이 있었다.
그녀는 발밑의 모래를 내려다보았다.
그 위로 파도가 밀려와,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을 부드럽게 지워냈다.
모래는 다시 고요해졌고, 바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숨을 골랐다.
그 순간 윤정은 깨달았다.
돌아온다는 건 과거로 되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다시 살아보겠다는 조용한 결심이라는 것을.
그녀는 마지막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짙은 소금 냄새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고, 그 냄새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와, 젊은 날의 엄마 웃음이 섞여 들렸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했지만, 사실은 그 자리에 여전히 있었다.
형태만 달라졌을 뿐, 바다는 한 번도 그녀를 떠난 적이 없었다.
윤정은 고개를 숙여 작게 인사했다.
“잘 있을게요.”
그 한마디가 바람에 실려 멀어질 때, 바다는 조용히 물결을 일으켰다.
그건 이별의 대답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인사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