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
눈이 내리기 시작한 건 해가 완전히 기울기 직전이었다. 입김이 먼저 보이고, 말은 늦게 도착하는 그런 저녁이었다.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던 그는 손바닥을 몇 번 비벼보다가, 주머니 속에서 낡은 장갑을 꺼냈다. 오른쪽 장갑의 엄지 끝은 해어져 있었다. 오래전, 누군가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서는 젖은 채로 말리지 않은 탓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이 장갑을 버리지 못했다. 장갑을 버리면 그 겨울도 함께 사라질 것 같아서였다.
눈발은 점점 굵어졌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바삐 지나갔고, 세상은 점점 더 소리를 줄였다.
그때, 정류장 맞은편, 편의점 문이 열리며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붉은 목도리를 두른 여자가 종이컵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거요."
그녀는 말없이 컵을 내밀었다. 김이 가늘게 올라왔다.
"왜요?"
그가 묻자, 여자는 잠시 눈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오늘은... 그냥요."
그는 뜨거운 컵을 받았다. 손끝이 찌르듯 아팠다가, 이내 서서히 풀렸다. 커피는 조금 달았고, 너무 뜨겁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오래전부터 온도를 맞춰둔 것처럼 입안에서 따뜻하게 감돌았다.
버스가 도착했고, 여자는 다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며 종이 한 번 더 울렸다. 그는 컵을 양손으로 감싸 쥔 채 버스에 올랐다. 창문 밖으로 눈이 계속 내렸다.
그날 밤, 그는 장갑의 해진 엄지를 바늘로 꿰맸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더 이상 찬 바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겨울은 여전히 차가웠고, 눈은 멈출 줄 몰랐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이유 없는 온기가 사람을 하루만큼은 더 살아가게 한다는 걸 그는 이제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