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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Apr 03. 2024

Call It A Day...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

영어로 보는 삶의 풍경 #05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두 다리 쭈욱 펴면 고향의 안방~"


'팔도 사나이'는 군 복무 시절 제일 신나게 불렀던 군가였다. 고된 훈련을 마치고, 무거운 군장을 벗어던지고, 오와 열을 맞춰 병영식당으로 가며 목청 높여 불렀던 그 노래...

단순한 가사였지만  속된 말로 '뺑이'친 하루가 '보람찼다'는 가스라이팅 효과와, 좀처럼 두 다리 쭉 뻗기 어려운 내무반 생활이 고향의 안방과 같다는 정신승리가 절묘하게 버무려진 국방부의 명가였다.



그 영향은 실로 지대해서, 오랜 세월이 지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그때의 기억이 이따금 소환된다. 업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도 석양이 창가를 물들이면 이 노래가 떠오르며 내 안의 외침이 들려온다.

Let's call it a day! 퇴근합시다!
Call it a day, boss! 퇴근시켜줘요 과장님!
Let's call it a night! 야근 끝냅시다!
Call it a night, boss! 고마 하입시더, 사장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시작과 종료의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한다. '출근'과 '퇴근'이건 'day'와 'night'이건, 제 때에 시작과 종료 버튼을 눌러서 부하 걸린 프로세서와 메모리를 리셋하지 않으면 먹통의 위험성이 증가한다. 그러나 알면서도 이를 지키기는 쉽지 않다. 일과를 무사히 해냈다는 홀가분함과 안도는 잠시... 몸은 풀려났지만 마음은 내일, 이번 주, 이번 달에 해야 할 목록들을 보며 여전히 일에 붙들려있다. 나와의 대화가 필요한 시간이다. Call it a night , drink a cup of hot milk, and go to bed...




굳이 낮밤의 구분 없이 쓸 수 있는 유사 표현도 하나 있다.


Let's call it quits.


'일을 마무리한다'는 의미의 같은 표현이지만 그 이면에는 화자의 조금 발칙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 아래의 다른 뜻과도 손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빚을 다 갚다. 빚진 것 없다. (월급 받은 만큼 일 했으니 그만합시다.)
-관계를 끝내다, 직장을 그만두다 (자꾸 이러면 나 진짜 사표 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상사에게 한방 먹였다는 성취감을 위해 직장에서 가끔 용감하게 시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되치기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대표적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 Bartleby, the Scrivener>는 업무를 거부한 어느 직장인의 비극적 이야기를 다룬다. 월가의 어느 변호사 사무실 신입으로 들어온 필경사(속기사) 바틀비는 엄청난 양의 업무를 잘 감당해 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업무 지시를 받자 이렇게 답변한다.


I would prefer not to.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점점 일을 안 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완전히 손을 놓은 채 창밖만 바라본다. (그래봤자 보이는 것은 다른 건물의 벽이다.) 설사 마음에 한두 번 울컥한 적은 있어도 아무도 입밖에 내지 않는 그의 대답, 상사와 동료를 모두 놀라게 한 그 대답, 동시에 그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대답....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선택해 멈춘 톱니바퀴가 되어버리고, 그렇게 멈춘 채로 치열하게 버티고, 그의 존재는 서서히 세상에서 지워져 간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바틀비의 고용주인 변호사다. 어쩌면 바틀비는 그의 분신인지도 모른다. 치열한 월가의 사무실에서 본명이 아닌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고, 그 사람의 존재가치가 업무 수행 능력으로 대체되는 비인격적인 환경에서, 그는 자신의 불안한 영혼을 바틀비에게서 봤는 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차이는 아마도 "I would prefer not to"를 실제로 입밖에 냈는가 안 냈는가 정도이지 않았을까. 또 어쩌면 변호사는 '아니요'를 할 수 있는 그의 무모한 용기를 몰래 부러워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이야기는 바틀비의 죽음에 대해 들은 화자의 안타까운 탄식으로 끝난다:

"아 바틀비! 아 인간이여(Ah humanity)!"


우리와 다른 별종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우리 인간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담겨있다.


바틀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고, 실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죽음에 이른 유일한 비극적 영웅이다. 그가 실행에 옮긴 소극적 저항은 에이합이 모비딕과 맞짱  것 이상의 무게와 반향을 직장인들에게 불러일으킨다. 잠시 우리의 가슴은 뜨거워지고 "I would prefer not...." 입술에 침을 바르고 발음해 보지만...


"Let's call it a day!"

"Thanks, boss!"


그래, 영웅은 어벤저스로 충분하지.


보람찬 하루 일과는 끝났고, 소시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두 다리 쭉 뻗으러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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