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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Sep 11. 2024

11. 얼굴 없는 성자단


우리는 고발한다!


우리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압살 하는 군사독재정권과, 이에 야합하여 진리와 학문의 상아탑인 백양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교 측의 만행을 고발한다!


본교 81학번 윤성민 학우는 군대에서 타살되었다. 그는 군 면제 대상인 3대 독자였다. 그러나 작년 서울에서 시위를 하다 체포되고 바로 강제징집 되어 강원도 모 철책사단 소총수로 복무했다. 그가 보초 근무 중 자살했다는 군의 발표는 거짓이다! 윤성민 학우는 이른바 녹화사업의 희생자로, 동료를 밀고하라는 프락치 노릇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보안사의 고문, 회유, 협박에 맞선 절절하고 참혹한 기록을 우리에게 남겼다. 우리는 이제 그를 대신해 다음과 같이 고발한다!


먼저 우리는 백양대의 기획처장, 학생처장, 교무처장을 고발한다! 이들 보직 교수들은 보안사와 안기부의 지시를 받아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학사징계를 내리고 특수학적변경자로 분류해 군대로 넘겨주었다. 교육자의 양심을 저버리고 불의한 권력과 야합하여 제자들을 팔아넘긴 당신들을 우리는 고발한다! 해당 보직 교수들은 사죄하고 물러나라!


우리는 학내 사찰을 자행하고 있는 공권력(짭새, 사복)을 고발한다! 이들은 신성한 상아탑에 학생과 직원으로 위장하고 버젓이 들어와 24시간 백양인의 말과 행동을 감시하고 교내 집회 발발 시에 진압과 체포의 선봉대 노릇을 하고 있다. 이는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 21조를 유린하는 심각한 범법 행위다. 여학우의 머리채를 잡고, 온몸에 소화기를 뿌리고, 옷을 찢고 짐승처럼 구타하여 끌고 가는 반인륜적인 폭력 진압을 즉각 중단하라! 위장 경찰은 학교 밖으로 당장 물러가라!


우리는 녹화사업을 주도한 국방부, 내무부, 문교부 등 대한민국의 정부와 이에 협조한 대학당국을 고발한다. 정부는 반민주적인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을 즉각 중단하라! 대학은 불법적인 징계와 학적 변경을 중단하라! 군은 윤성민 학우의 죽음을 재조사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끝으로 우리는 N교수, H교수, C교수 등 상습적으로 성희롱을 일삼는 일부 교수들을 고발한다. 여학생들에게 지분거리는 그 더러운 손과 기름진 입술은 관심이 아니라 추행이고 사랑이 아닌 폭력이다. 과거에 이로 인해 비극적인 일들이 벌어졌음에도 아무런 반성도 대책도 마련하지 않는 대학 당국은 각성하라! 해당 교수들은 연구실과 강의실, 캠퍼스 곳곳에서 공공연히 저지르고 있는 파렴치한 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라! (그렇지 않을 시에는 명단을 공개하겠다.)


우리들은 얼굴이 없다. 얼굴을 잃고 돌아온 우리 성민이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친구의 빼앗긴 명예와 진실을 되찾을 때까지, 우리도 얼굴 없이 그와 함께 싸울 것이다. 백양과 이 땅의 모든 학우들과 함께 싸울 것이다.  


추신: 지진과 갈라진 건물들은 하늘의 경고다!


얼굴없는성자단 일동


이른 아침, 백양대 보직 교수 회의. 백발의 얌전한 선비상인 학생처장이 대자보 내용을 차분히 읽어 내려가자 한숨과 쯧쯧 소리가 들려온다. 부총장이 학생처장에게 묻는다.


“그게 몇 장이나 붙어있는 겁니까?”


“한 스무 장 정도가 학내 곳곳에 붙어있는데, 하필이면 지진으로 금 간 곳에 골라서 붙여놔서…”


“이런 지독한 일이 있습니까? 다 수거하셨죠?”


“네네, 녀석들이 삐라도 뿌렸는데 학생들이 얼마나 읽었는지…”


“어찌 조용한 우리 대학에 이런 일이… 큰일입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져서 앉아있던 나두일 기획처장은 퉁명스럽게 학생처장에게 묻는다.


“누구 소행인지 알아보셨습니까?”


학생처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우물쭈물 답을 한다.


“그게… 아직. 이 얼굴 없는 성자들이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고, 얼굴이 없다는 건 비밀결사라는 얘긴데 찾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나교수는 넥타이를 풀며 언성을 높인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학교를 싹 뒤집어서라도 잡아내야죠! 학생회 중심으로 그 요주의 리스트에 오른 놈들부터 족쳐봐야지. 가만, 이거 불문과 놈들 아닌가? 그 뭐냐, ‘나는 고발한다’랑 느낌이 비슷한데 말야…”


도서관장을 맡고 있는 불문과 여교수가 콤팩트를 들여다보다가 펄쩍 뛰었다.


“자메(Jamais), 자메! 나처장님, 절대 아니에요! 우리 애들이 얼마나 착한데요. 다 여학생들이고 에밀 졸라 따위는 읽지도 않아요.”


“하긴 그쪽은 꽃밭이죠 흐흐. 근데 거긴 교수도 학생도 미모 보고 뽑나 봐."


“아이 처장님도. 아빠… 아니 이사장님이랑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 호호.”


“이사장님 모시고 언제 꽃밭에서 회포 한 번 풉시다.”


“네, 쎄시봉(C’est si bon).”


도서관장은 다시 화장에 몰입했고 학생처장이 불편한 듯 안경을 매만지며 끼어들었다.


“그런데… 누가 썼는가도 찾아야겠지만, 그… 마지막 성추행에 대한 부분 있지 않습니까? 이 문제는 우리도 더 알아보고 대처를 해야…”


부총장이 난색을 표하며 말을 막고 나섰다.


“아니, 처장님, 설마 우리 백양대에 그런 교수님들이 있겠어요? 난 믿기 어려운데?”


다들 부총장에게 동조하듯 웅성거린다. 학생처장은 이 경직된 분위기가 못내 버거운 듯 얼굴 근육이 조금씩 떨리며 한 마디를 더 한다.


“네 그렇지만, 구체적인 명단도 있다고 하고, 제게 들려오는 이야기들도 있어서… 그 이니셜들만 해도…”


“난 R이야!”


“무슨 말인가?”


“난 N이 아니라 R이라고! 두음법칙 몰라요?


“아니 그러니까 라~교수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


처장이야!”


나교수가 책상을 탕하고 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가 앉았던 의자는 뒤로 나뒹굴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찌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신의 배꼽을 긁다가, 학생처장에게 삿대질을 했다가를 반복하며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학생처장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빨갱이 새끼들이 학교를 집어삼키려는 이 마당에 뭐? 교수들이 성추행을 해? 그런 소리가 들려와? 이니셜이 어째? 뭐가 성추행인데? 공부 열심히 하라고 어깨 두드려주면 그게 성추행이야? 딸 같애서 귀엽다고 좀 만지면 뭐 그게 성추행이야? 잘 생각해 봐요. 이놈들이 정치 얘기하다가 왜 이 문제를 슬쩍 얹었겠어? 이렇게 덥석 무는 사람이 있거든. 교수라는 사람이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도 못하고 말야…”


학생처장은 얼굴이 귀 밑까지 벌게져서 소심하게 항변했다.


교수, 아니 처장님, 말이 좀 심하지 않은가? 학생들 문제는 그렇게 밀어붙이기만 하면 안 돼. 나는 단지 아이들의 고충을…”


“고충은 개나 줘버려 씨발!!”


그는 얼어붙은 교수들 틈을 성큼성큼 걸어 전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자 뭐라고 말할까? 나 안기부에 이거 보고해야 하는 거 알죠? 잘 아는 당신이 좀 알려주쇼. 이 따위 불온 대자보가 붙었는데, 우리 대학에도 빨갱이 새끼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는데! 그놈들이 얼굴이 없어서 찾기가 힘들고, 기집애들 성추행 고발에 대해서는 조사를 해보겠다고? 이게 말이야 방귀야?”


“이보게, 그래도 내가 한참 선밴데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아이들도 다 우리 제잔데 그리 험한 말을…”


“아 우리 선배님 용공분자세요? 그래서 지금 걔들 편드시는 거예요? 선배님도 이 정권이 독재정권이고 순화교육이 만행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왜 학적 변경에는 동의하셨어요? 왜 관리 대상 학생 리스트는 또박또박 결재해서 넘기셨어요? 왜 범죄 행위에 가담하셨어요? 제자 팔아넘겼다고 같이 고발당한 주제에 왜 이제 혼자 깨끗한 척하세요? 정년 못 채우고 실업자 되고 싶으세요? 아님 다 같이 학교 문 닫는 꼴 보고 싶으세요?


“그게 아니라…”


나교수는 대자보를 잡아채서 손에 들고 흔들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한다.


“이 새끼들은 제자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고 그냥 암덩어리요! 빨리 색출해서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 백양대와 조국의 온몸에 암을 퍼뜨리는 암덩어리! 정신 차려요. 아웅산 테러 일어난 지 얼마나 됐습니까! 지난달에는 소련 놈들이 칼(KAL)기 떨어뜨렸어요. 이웅평이가 미그기 몰고 내려올 때는 공습경보 떠서 인천이 불바다 된 줄 알았어. 지금도 밤마다 수천 개의 단파 무전이 이북으로 넘어가고 있어. 우리는 지금 빨갱이들이랑 전쟁 중이라고 씨발!”


정적이 흘렀다. 학생처장은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총장이 헛기침을 하면서 상황을 정리했다.


“자자, 이렇게 합시다. 학생처장님은 직원들이랑 어젯밤 수상한 학생들 행동이 없었는지 좀 살펴주시고요. 요주의 학생들 리스트랑 조사 결과를 우리 라~두일 기획처장님에게 넘겨드려서 도움을 좀 받으세요. 그리고 우리 처장님은 기관 쪽에서 말이 나오면 우리 대학 입장을 좀 잘 얘기해 주세요. 우리 대학이 그런 대학이 아닌데…”


“늦었어요. 이미 이쪽 담당자가 오겠다고 연락 왔습니다.”


“아이구 큰일이네. 아무쪼록 잘 좀 부탁해요. 총장님도 편찮으신데 이런 일이… 자 그리고 우리 모두 처장님께 무거운 짐을 얹어드렸으니 열심히 도웁시다. 신속하게 이 사건이 마무리될 수 있도록. 그리고 지진 대책회의는 내일 다시 열도록 하지요. 학생처장님, 지금 내 방으로 좀 오세요.”


회의가 끝나고 보직 교수들은 흩어졌다. 나교수는 회의실에 남아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왔다 갔다 하며 아직 가시지 않은 흥분을 삭이고 있다.


“뭐? N교수? 어이가 없어서… 이 새끼들이 나랑 해보겠다는 거야? 얼굴 없는 빨갱이 새끼들…”


그는 수화기를 들고 내선 번호를 누른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다.


“아 나다. 문제 생긴 거 알지? 내 방으로 와. 지금.”


그는 전화를 끊고 대자보를 잡아채서 북북 찢어버리고는 바닥에 팽개치고 그 위에서 망나니 춤추듯 종이 조각들을 마구 짓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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