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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Sep 13. 2024

12. 그들이 보인다

아침 햇살이 안개를 흩으며 교정을 환히 비칠 무렵, 피교수는 긴 밤을 보냈던 바닷가 절벽에서 내려와 운동장에 들어섰다. 바로 뒤에는 절벽에서 만난 개가 꼬리를 흔들며 따라오고 있다. 피교수는 자신이 얻어맞고 기절했던 축구공과 그 옆에 알이 깨진 채 떨어져 있는 자신의 안경을 발견한다. 그는 안경을 주워 깨진 알을 살피며 혼잣말을 한다.


“꿈이 아니었네…”


그는 자기가 쓰고 있는 안경과 깨진 안경을 번갈아 써보다가 자기 안경을 일단 주머니에 넣고 개를 바라본다. 공을 가볍게 툭 차자, 개는 멍멍 짖으며 쫓아가 코와 앞발로 공을 피교수에게 가져와서는 혀를 내밀며 꼬리를 흔든다. 피교수는 어색하게 개를 쓰다듬는다.


“야 적응 안 되네. 음… 가만 널 뭐라 부르지? 동성이? 아무리 그래도 널 보고 동성이라 부르기는 좀 그렇고… 옳지. 동동이 어떠냐? 동성이랑 동희에서 한 자씩 따서, 동동이?..”


개는 기분 좋게 멍멍 짖으며 꼬리를 힘차게 흔들면서 코로 공을 피교수 쪽으로 민다.


“좋았어. 동동이! 후반전 시작해 볼까?”


피교수는 공을 몰고 뛰기 시작한다. 동동이는 꼬리를 마구 흔들고 멍멍 짖으며 쫓아와 앞발로 피교수의 공을 낚아챈다.


“오 그 실력 어디 안 갔네 하하.”


“교수님!.”


멀리서 맹조교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맹조교는 손을 휘저으며 헉헉거리며 뛰어온다.


“교수님, 괜찮으십니까? 온 데를 다 찾아다녔심더.”


“오 학과장님, 굿 모닝!”


“굿 모닝이라뇨! 학교에 지진난 거 모르십니꺼! 지금 난리났심더!”


“무슨 지진?”


피교수는 자신이 깨어날 때 느꼈던 땅의 울림을 떠올렸다.


“아 그럼 그게…”


“아니 얼굴은 또 왜 멍이… 다치셨습니까?


“아~ 그게 아니고… 말하자면 긴데, 아무튼 동성이를 만났네.”


“동성이요?! 어디서요?”


“지금 여기 있어.”


“에?? 어디요?”


그는 황급히 360도를 돌아보다가 동동이와 눈이 마주친다. 동동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멍 하고 짖는다.


“이 개는 또 뭡니까?”


“얘가 동성이야. 내가 동동이라고 이름을 지어줬는데… 그러니까 얘가 동희고 동성이야. 하하하~”


맹조교는 피교수와 동동이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젓는다.


“교수님, 병원 가보셔야겠습니다. 동동이고 뭐고 지금 한가하게 이러실 때가 아니고요. 어서 가입시더. 지진에, 대자보에, 연구실도 지금 난장판이 됐심더.”


맹조교는 다짜고짜  피교수의 등을 떠밀고 두 사람은 문과대 쪽으로 향했다. 맹조교는 이 상황에 횡설수설하고 있는 피교수가 영 야속했다. 새벽에 지진이 나자마자 학교로 헐레벌떡 뛰어와 당직을 서고 있던 피교수를 찾아다녔다. 제일 먼저 가본 연구실은 책장이 넘어져 문이 열리지 않아 교수님 안에 계시냐고 목이 터져라 외쳐댔고, 불길한 마음에 문을 억지로 밀치고 들어가느라 어깨와 허리를 삐끗했다. 동이 틀 때까지 기숙사는 물론, 모든 학교 건물을 뒤지고 다녔다. 여진은 더 이상 없었지만 날이 밝은 후에 보니 건물들은 금이 가고, 외벽의 벽돌들은 여기저기 무너져 내렸고, 학생들은 아직도 건물 밖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흡사 전쟁터 같은 이 상황에 어느 틈엔가 붙은 대자보와 전단을 본 맹조교는 무력감과 화가 더 치밀었다. 자연 재난도 모자라서 이 상황에 학교를 들쑤시는 학생들이 있다니… 아무튼 이런 자신의 힘든 상황을 피교수가 알아주기를 바랐고, 고맙다는 말이나 기운 내라는 격려를 기대했는데… 그는 이 모든 상황과 상관없는 사람인 것처럼 귀신타령을 하며 한가롭게 굿모닝 인사를 건네고 있지 않은가! 암만해도 연구실에 가서 한 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뒤에서 피교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맹조교, 저 버드나무 위에 왜 사람이 올라가 있지?”


“어디요? 아무것도 없는데?”


“우릴 보고 있는데… 거꾸로 서서…”


맹조교는 머리카락이 쭈뼛 섰지만 꾹 참고 걸었다. 피교수가 또 한 마디 더했다.


“맹조교, 그럼 저기 수영복 입은 남자는 혹시 보이나?”


맹조교는 대꾸하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디 넘어져서 뇌진탕이 왔던지 아니면 귀신에 완전히 홀려버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새벽부터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벌어져 머리가 뒤죽박죽이 된 그의 뒤통수에서 피교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아, 네가 그 인민군 소년병이구나? 금동이라고 했지?”


개가 멍멍 짖어댔다. 맹조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씩씩대며 휙 돌아서서 고함을 질렀다.


“와 이리 짖어대노 이 똥개 새끼!”


맹조교는 개에게 냅다 발길질을 했다. 개는 잽싸게 뒤로 물러나면서 으르렁댄다.


“맹조교. 왜 이러나. 얜 진짜 동성이라니까.”


맹조교는 입을 벌린 채 고개를 가로젓다가 아악!!!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피교수는 멍하니 서있다가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이런 난감하군…”


피교수는 안경을 벗어 들고 뭔가 확인하는 눈빛으로 동동이를 바라봤다. 동동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피교수는 결심한 듯 깊은숨을 내쉬고 다시 안경을 쓰며 할로우맨의 한 구절을 읊조렸다.


“With direct eyes. 눈을 똑바로 뜨고…”


피교수는 연구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동동이가 피교수와 나란히 걷고, 그 몇 걸음 뒤에는 소년병 금동이가 따르고 있었다.


맹조교 말대로 캠퍼스는 어수선했다. 조그만 석조건물인 문과대 건물은 여기저기 유리창이 깨져있었고 돌 부스러기들이 바닥에 널려있었다. 금이 간 곳은 없었지만 기절했던 피교수를 깨운 그 땅 속의 울림이 생각보다 강한 충격이었던 것은 틀림없었다. 피교수는 맹조교를 만나러 연구실로 향하다가 지난밤 당직을 완수하지 못한 죄책감 반, 그리고 야외 공연장에 앉아있을 혜린이에 대한 염려 반으로 발걸음을 돌려 광장 쪽으로 향했다. 다른 건물들 역시 파손된 곳들이 보였고 심지어 건물 외벽에 금이 간 곳도 있었다. 좀 심하게 부서진 것은 낡은 분수대였는데 벼락을 맞은 듯 가운데가 쩍 갈라져 한쪽이 기우뚱 기울어져 있었고 밑에 수도관이 터졌는지 물이 샘솟고 있었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어두운 표정으로 서로 수군대고 있었는데, 그래도 학생들이 건물에 드나드는 것을 보면 수업은 어쨌든 진행 중인 것 같았다.

그러나 피교수는 곳곳을 할퀸 지진의 여파보다도 바뀐 안경을 통해 보이는 캠퍼스의 풍경에 더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갈라진 분수대 틈 사이에 누군가 보였다. 사람이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공간에 성별을 알기 힘든 흰옷 차림의 사람이 턱을 괴고 피교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솟구치는 물에 가렸지만 아무리 봐도 허리 아래가 없는 것 같았다. 저만치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학생들의 뒤로 긴 머리의 여자가 미끄러지듯 지나가고 있었다. 립스틱 바른 빨간 입술, 오뚝한 콧날, 그런데 그 위에 있어야 할 눈은 지워진 듯 보이지 않았다. 긴소매 원피스를 입은 몸은 이미 학생들을 지나쳤는데 손목은 소매 아래로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져 손가락들이 무심한 학생들의 등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저 손을 강의실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땡땡이 무늬의 원피스를 입은 여자도 있었다. 창백한 입술이 유난히 부풀었고 목에는 빨간 줄이 보였다. 그는 남학생들 주위를 맴돌며 팔을 뻗어 말을 걸 듯 끊임없이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바로 앞을 훅 스치는 누군가가 있어 돌아보니 아까 운동장에서 봤던 수영복 차림의 청년이 어느 틈에 광장까지 내려와 기숙사를 향해 헤엄쳐 가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던 그의 원념이 그를 자기가 살던 방에 묶어둔 것이 아닐까. 옛날 가쿠란 교복 차림으로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동성이처럼 얼굴과 손이 창백하고 검은 대학 교복 가슴에는 학교 배지가 달려있었다. 이마에는 한자로 ‘대일굴욕 결사반대’라고 쓴 머리띠를 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20여 년 전 6.3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머리띠 위로는 있어야 할 머리 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윤곽이 대부분 뚜렷한 이들도 있는 반면 희미한 형체들도 눈에 띄었다. 어떤 이는 그림자 같은 회색 실루엣만 보였고, 어떤 이는 상체만 어렴풋이 남았거나 손목만 떠다니는 경우도 있었고, 어떤 이는 이제 투명인간처럼 몸의 윤곽선만 얼핏 얼핏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아마도 이들은 마지막 사멸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영들이 아닌가 싶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이들은 늘 이곳에 있었고 산자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피교수는 누구의 얼굴도 기억할 수 없었다. 윤곽과 특징은 떠올릴 수 있지만, 그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돌아서고 나면 기억나지 않았다. 심지어 얼굴을 보고 있는 순간에도 그 김새를 인식할 수 없었다. 돌이켜 보니 동희도 그랬다. 연구실로 처음 찾아왔던 그를 불빛 아래서 분명히 만났고 얼굴을 봤지만, 안경, 마른 체구, 창백한 피부, 긴 손가락과 저는 다리 밖에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재현이와 성빈이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떠올린 그들의 얼굴은 백지 같이 비어있었다. 이것이 준엄한 생과 사의 경계일까? 삶의 경계 밖에서 떠나지 못하고 기억해 줄 단 한 사람을 찾아 헤매던 그들은 그렇게 텅 빈 얼굴로 통곡하며 배회하다가 결국 사멸하는 것이다.


동동아… 이건… 후….”


피교수는 이 처음 보는 광경에 압도되어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안경을 벗어 들고 야외극장 쪽으로 향했다. 동동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피교수의 뒤를 따랐다. 야외극장에 거의 도달할 무렵 갑자기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피교수! 여기!”


나두일 교수였다. 그는 멀찌감치 서서 택시를 부르듯 자기 쪽으로 손을 휘저었다. 피교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피교수 팔자 좋구만. 다들 지진 나서 난린데 강아지 새끼랑 산책이나 하고 있어?”


“아 그게 아니라…”


순간 동동이가 나두일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동동아 가만있어. 착하지.”


“이 버르장머리 없는 개새끼가 지금이 어떤 시국이라고 콱!...”


나두일이 걷어찰 듯이 발을 구르자 동동이는 깽깽 짖으며 꼬리를 말고 피교수 뒤로 숨어 계속 낮게 으르렁댔다.


“똥개 새끼. 콱 잡아먹어버릴까 보다.”


피교수는 불쾌함을 누르며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아, 피교수 어젯밤 당직이었잖아.”


“네. 그런데 서울 안 가셨습니까?”


새벽에 내려왔지. 내가 이래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요 아이고. 내가 없는 건 어떻게 알고 이 사단이…”


“지진 말씀이시죠?”


“그것도 그거고… 이거 말야.”


그는 주머니에서 전단지를 꺼내 피교수에게 건넸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피교수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그런 그를 미심쩍게 지켜보며 나교수는 캐물었다.


“어젯밤에 말야. 뭐 수상한 거 없었어?”


“수상한 거라뇨?”


“아 학교 전체에 이걸 도배하려면 틀림없이 놈들이 야밤에 움직였을 거 아냐. 우리 후배가 당직이었으니까 수상한 놈들을 보지 못했냐 말야…. 어이 피교수?!”


굳은 표정으로 피교수는 전단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절벽에 외롭게 버려진 동성이의 삭은 구두를 입 속에 넣고 씹는 기분이었다. 12년이 흘렀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는 분노와 수치심과 무력감이 뒤범벅되어 얼굴이 벌게졌다. 동동이는 피교수의 마음을 읽은 듯 낮게 그르렁거렸다.


“표정이 왜 그래? 뭔가 짚이는 게 있는 거지?”


“아, 아닙니다… 어젯밤엔 별일 없었습니다.”


피교수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추스르며 짧게 답했다. 피교수의 반응을 수상쩍게 살피던 나교수는 배꼽을 긁고 피교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뭔가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참이었다. 그때 한 무리의 학생들이 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주변에 학생들이 모여 있음을 의식한 나교수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말을 바꾸었다.


“여기선 말하기는 좀 그렇고, 내 방으로 좀 와. 긴히 의논할 게 있네. 그리고 저 광견병 걸린 것 같은 미친 개새끼는 갖다 버려.”


나교수는 전단을 다시 빼앗아 총총히 사라졌다. 피교수는 불쾌함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동이가 꼬리를 흔들며 피교수의 손등을 핥았다. 피교수는 얼핏 지난밤 민주와 그 일행을 마주쳤던 일을 떠올렸다. 좀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학생들이 밤에 나돌아 다니는 일은 흔했기 때문에 수상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민주의 얼굴에 묻어있던 잉크 자국과 종이 뭉치가 마음에 걸렸다. 아무튼 피교수는 나두일이 자신을 불러 이 일로 강짜를 부릴 생각을 하니 마음이 언짢았다. 피교수는 고개를 흔들어 복잡한 심정을 털어내고 혜린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외극장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극장 가장자리의 석조 객석 일부에 금이 간 것을 본 피교수는 마음이 급해져서 잰걸음으로 극장 가장자리에 발을 디뎠다. 혜린이가 늘 앉아 있던 자리를 본 순간 피교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혜린이는 간 곳이 없었고 자신이 준 머플러만 금이 간 빈자리에 뒹굴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피교수는 머플러를 집어 들고 사방을 뛰어다니며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혜린은 없었다. 가슴 한쪽이 아프도록 시렸다. 지난밤부터 너무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지만 그래도 견디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혜린의 빈자리와 버려진 머플러는 피교수의 평정심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엄청난 상실감이 그를 덮쳐왔다. 그는 자신의 볼을 세게 두드리고 제 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후후 심호흡을 했다. 내가 왜 이러지?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수업에 들어간 것일 수도 있고, 지진을 피해 급히 움직이다가 머플러를 떨어뜨렸을 수도 있다. 언제라도 망부석이라고 놀렸던 이 자리로 아무 일 없이 돌아올 것이다… 손에 든 머플러의 냄새를 킁킁 맡던 동동이가 피교수를 보고 짖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잡을 겨를도 없이 사냥감을 쫓듯이 냅다 달려 나갔다. 피교수는 그를 멍하니 보고 있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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