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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Sep 15. 2024

13. 소금쟁이와 까망귀신

명단은 거의 다 됐습… 죄송합니다, 처장님. 곧 보고 올리겠습니다. 네. 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맹조교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민주가 서있었다. 그는 맹조교를 보고 할 말을 잊은 듯 그냥 서있었다.


“어 너 여긴 또 웬일이야?... 야 정신 차려!”


“아… 피교수님 안 계신가요?”


“피교수님은 왜 찾는데?”


“아…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아직 못 찾으셨어요?”


“찾았는데, 아 몰라.”


“언제 들어오시나요?”


“그걸 내가 우예 아노?”


“피교수님 조교시잖아요?”


“조교는 개인 비서가 아니야.”


“그럼 학교엔 계신가요..?”


맹조교는 그 말을 무시하고 문을 닫다가 멈추고 갑자기 민주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너 김민주… 맞지?


“…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그게… 너 우리 과 학생이잖아.”


“교수님은 제 이름 모르시는데…”


“난 피교수님이 아냐!”


그는 문을 쾅 닫고 돌아와 자리에 앉아 서류에 몇 자를 적어 넣는다. 그리고 엄지살을 물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 주저앉은 책장의 책들을 건성으로 치우다가 떨어진 선반에 박혀있던 못에 찔렸다. 맹조교는 악 소리를 지르며 선반을 걷어차고 책들을 집어던졌다.


“이놈들이 똑 지 주인 닮아가지고!”


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맹조교는 서류를 잽싸게 서랍 속에 밀어 넣는다.


“야, 여기 다니까…”


피교수가 뛰어들어왔다. 땀을 흠뻑 흘린 그는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맹조교에게 물었다.


“없어?”


“아 어떤 학생이 자꾸 교수님을 찾길래…”


“아니 그거 말고. 혹시 동동이… 그 개 여기 안 왔어?”


“네? 개가 여길 와 옵니까?”


“아 이 앞에서 놓쳤는데 어디 갔지? 진짜 못 봤어? 동성이… 아니 동동이…”


“고만 좀 하이소! 교수님, 제 머리 터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이 엉망진창 된 거 안 보이십니꺼?”

맹조교는 화풀이처럼 책들을 거칠게 책장에 쾅쾅 꽂기 시작했다. 피교수는 비로소 방 안을 둘러봤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어 책을 두어 권 집어 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아 엉망이긴 하네…”


“교수님, 어젯밤에 어디 계셨습니까? 숙직실에서 안 주무셨다고 하던데요?”


“응,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지금은 내가 좀 나가봐야겠어.”


피교수는 당장 혜린이와 동동이의 행방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연구실의 상황은 별로 안중에 없었다. 문으로 향하는 그의 앞을 맹조교가 가로막았다.


“교수님, 숙직실에 안 계신 거 문제 될까 봐 제가 사감 선생한테 담뱃값 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걸 자네가 왜?”


“지진 난 밤에 당직 교수님이 사라진 거 문제 안 될 거 같습니꺼?”


“고맙지만 난 사라진 게 아니야. 사정이 좀 있었고…”


“그러니까 그 사정이 뭔데요? 어젯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능교? 아까 그 개는 또 뭐고 얼굴에 그 상처는 또 뭐고, 눈에 자꾸 뭐가 빈다는 건 또 무슨 얘깁니꺼? 자초지종을 말해 주셔야 알아먹을 게 아닙니꺼? 알아야 카바를 치죠. 아 지가 남입니까?”


피교수는 부릅뜬 그의 눈을 보며 그가 쉽게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도 감당이 안 되는 일들을 맹조교가 알아서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혜린이도 찾고 동동이도 찾아야 하지만, 일단 동성이의 일을 함께 조사해 온 맹조교에게 그간의 일을 설명해 주고 도움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았네. 미안. 자 잠깐 앉지.”


피교수는 맹조교에게 그간에 벌어진 일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당직하던 날 밤 운동장에서 동희를 만난 일, 그와 축구를 하다가 공에 맞고 기절한 일, 동희가 남긴 사망증명서를 꺼내 보내주며 12년 전 것으로 그가 동성이었음이 입증된 일,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12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간첩으로 몰려 제적 후 강제 징집되었다가 결국 첫 휴가 때 학교로 돌아와 자살한 일 등등… 처음에는 입을 멍하게 벌리고 듣던 맹조교의 표정은 동성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서서히 굳어져 갔다. 동성이가 사라진 자리에 개가 나타났는데 이 개는 아마도 동성이고, 그가 남긴 안경을 통해 귀신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할 때쯤에 그는 작정한 듯 몸을 흔들며 킥킥 웃기 시작했다.


“진정하게. 나도 처음엔 너무 무서웠어.


“아뇨. 지는 너무 웃겨서 웃는 건데요.”


“내 말을 못 믿겠단 말이야?”


“교수님, 이게 무신 납량특집도 아니고, 뭘 보고 믿으란 말입니꺼?”


“증거가 여기 있잖아. 12년 전 동성이 할아버지 사망진단서.”


“이거요? 이거 12년 전에 교수님이 이미 받았던 진단서잖아요.


“그래서?”


“생각해 보시소. 12년 전 종이 쪽 한 장을 귀신이 교수님 뽀깨뜨에 요래 요래 곱게 넣어 놨다고요? 그리고 뭐 귀신 보는 안경을 씌워주고 자긴 개가 되었다고요? 진짜 병원 가보셔야 안됩니까?”


“이건 내가 직접 겪은 일이야! 자네도 자네 도플갱어를 직접 봤다며? 그건 어떻게 설명할 텐가?”


“아 그거요. 그때 제가 상태가 많이 안 좋았심더. 지금은 아무 문제없심더.”


“그래서 헛걸 본 거다 그때?”


“맞심더. 교수님도 요 몇 달 상태가 억수로 안 좋으셨다 아입니꺼.”


“그래서 나도 헛걸 본 거다? 그럼 뭐야. 이 사망증명서도.. 내가 뭐에 씌어서 막 가짜로 만들고, 안경도 어디서 주워와서 쓰고 귀신이 보인다고 막 지어내는 거다? 이 말인가?”


가짜가 아니라 교수님이 12년 전에 받았던 걸 찾아서 뽀깨뜨에 넣어두고 깜빡 한 거란 말임다…”


아냐. 이건 분명히 동성이가 준 거라니까!”


“좋심더. 그라믄 그 귀신이 바라는 게 대체 뭔데요? “


“응?”


“그리 억울해서 찾아왔으믄 원하는 게 있을 거 아임니까? 뭐 햄릿처럼 원수를 갚아달라던지, 성불을 시켜달라던지 이런 거 말임더.”


“…기억….”


“에?”


“기억해 달라고 했네…. 자기를….”


“뭐 그리 시시한 귀신이 다 있노? 기억해 달라? 그게 끝?


“그렇게 간단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했어. 그게 다였네.”


“그럼 상황 끝이네. 그 귀신 참 착하네. 기억하는데 뭐 돈이 듭니꺼 시간이 듭니꺼. ‘알았다, 기억하겠다, 잘 가라,’ 이러면 끝인 거네. 교수님, 저 논문심사 해주셔야죠. 저도 학위 받아야죠. 교수님이 여기서 더 정신줄 놓으시면 전 큰일입니데이.”


“정신줄? 내가 미쳤다는 얘긴가?”


“아이 그게 아이라… 우리 소금쟁이 교수님 너무 오지랖… 아니 오바하지 마시고 이제 그만….”


“소금쟁이가 여기서 왜 나와?”


와요, 우리 소금쟁이 교수님이 언제부터 남일 신경 쓰셨습니까.


“우리가 같이 찾아보기로 했잖아. 진실을 밝혀보자고 했잖아.”


맹조교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교수님은 지금 진실이 아니라 뭐꼬 그 도리안 그레이처럼 자신에게 속고 있는 깁니더. 그기 아니면 귀신한테 속고 있는 거고. 그 망할 동성이 귀신에 속아서 교수님 인생을 망치고 있다 이겁니더!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한다고 그 안 어울리는 오지랖질 그만하시고 예? 정신병원 끌려가기 싫으면 적당히 하이소 마!”


잠시 정적이 흘렀다. 피교수는 고개를 돌려 비딱하게 걸려있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화가 앞에 버티고 있는 캔버스 속에는 미완의 도플갱어가 그를 노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무서워 그림 속 화가는 붓을 멈추고 뒤로 물러난 것일까? 아니면 용기를 내어 붓을 들고 그를 대면하러 가는 것일까. 피교수는 매일 그림을 보며 떠올리던 그 모호한 질문에 답을 하듯 조용히 말했다.


“… 그래도 한 가지는 확인해 봐야겠어.”


맹조교는 자신이 화낸 것이 좀 미안해져서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꾸한다.


“그기 뭔데요?”


“내가 본 학적부에는 사인이 사고사였어. 그런데 동성이는… 자살했다고 했어. 귀신의 절벽에는 그의 구두도 남아있어.”


“아 쫌 교수님…!”


“누군가 조작을 한 거지. 살았을 때 그를 간첩으로 조작한 자들이 죽은 후엔 사망 장소와 사인을 조작한 거야. 누가, 왜 그랬을까? 난 알아야겠어.”


“지금까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기 다 교수님 머릿속에서 나온…”


“헛것? 망상? 그런데 이상하잖아? 아무리 내가 미쳤다고 해도 어떻게 이 모든 정보들을 지어내지?”


“후~ 좋심더. 그래서 만약 동성인지 그 귀신 말이 맞다 치면, 그럼 어떡하실 건데요?”


“바로 잡아야지. 진실을 밝혀야지. 그게 억울해서 걘 여길 못 떠나고 있는 거잖아.”


“아니 귀신은 그냥 자길 기억해 달라고 했다면서요? 그럼 된 거지, 와 귀신도 부탁하지 않은 일에 교수님이 나섭니꺼?”


“기억은 그냥 이름을 알고 끝나는 게 아니지 않나. 내가 맹조교를 기억한다는 것은 이름이 아니라 시간을 기억하는 걸세. 우리가 함께 알고 믿고 나눈 그 모든 시간들…. 그러니까 동성이를 제대로 기억하려면 그 아이의 빼앗긴 시간들을 찾아서 진실을….


맹조교는 갑자기 발끈했다.


“그놈의 믿음, 진실이 뭐 밥 먹여 줍니꺼? '우리'요? 교수님이 나에 대해 뭘 아는 척합니까? 진짜 날 압니까? 아는 척, 위하는 척, 같잖은 동정은 집어치우. 내는 이 지긋지긋한 세상 그냥 산속에 처박혀서 혼자 살고 싶심더. 교수님이고 부모고 동창들이고 날 지들 멋대로 기억하는 거 자체가 지옥임더!”


소리를 지르고는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고 입술을 떨며 손의 볼살을 깨무는 맹조교를 보며 피교수의 마음은 착잡해졌다. 일면 딱해 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을 밀쳐내는 그의 무례한 반응에 섭섭함과 노여움이 올라왔다. 맹조교는 콧소리를 킁킁 내며 양복 주머니에서 삐라를 꺼내서 피교수에게 휙 내민다.


“교수님, 이거 보셨습니까?”


“이게 뭔가?”


“지진 났던 날 새벽에 학생들이 사방에 뿌린 삐라입니다. 대자보도 붙어있었고요.”


봤어. 12년 전과 똑같은 일이 또 벌어졌어! 그러니까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지!”


맹조교는 그의 대답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하게 훈계하기 시작했다.


“교수님, 제 말 단디 들으시소. 백번 양보해서 교수님 말씀이 다 사실이라 하입시더. 갸가 군대 끌려가서 죽은 게 맞다 칩시더. 그래서 더더욱 진짜 아무 일도 하시면 안 된다는 겁니다. 진짜 죽은 듯이 가만히 있어야 합니데이.”


“억울하게 죽은 제자들이 있는데 죽은 듯이 가만있으라고?”


“네! 가만 계시소!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12년 전 일을 뭐 누구한테 물어보실 겁니까?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빨갱이로 군대 붙들려 갔는데 누구한테 따질 겁니까? 경찰이 도와줍니꺼, 아님 검찰이 도와줍니꺼? 예? 이 나라는 영원히 이리 갈 겁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데 까진 해 봐야지.”


“그게 어디까진 데요?”


“몰라, 하지만 적어도 죽은 듯 가만있는 건 아니겠지.”


“생각 좀 해보이소. 교수님이 지금 여기저기 12년 전 일을 캐고 다니시지요? 그럼 바로 이 뭐꼬 얼굴 없는 이 놈들이랑 연결되지 않겠습니꺼? 이 학생들을 뒤에서 사주한 수괴로 몰리지 않겠습니꺼?”


그래도 동성이 일도 밝히고 성민 학생 일도 밝혀야 하는 거 아냐? 다 우리 학생들이야.”


“그러다가 같이 빨갱이로 몰리시면요? 남산에 끌려가시면요? 하루아침에 짤리고 감옥 가시면요?”


“이 사람아. 억울한 사람 편을 드는 게 왜 빨갱이야?”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습니까?”


“뭐라고?”


“법치국가에서, 걔들이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리 잡아가겠습니꺼? 막말로 걔들 머리에 빨간 물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교수님이 우째 압니꺼?”


피교수는 아까부터 억누르고 있던 화가 터졌다. 절반은 맹조교의 시종 가시 돋친 태도에 대한 화였고, 절반은 자신의 두려움에 대한 화였다. 그렇다. 동성이의 존재와 그의 이야기를 받아들인 것은 개인적인 믿음의 문제였지만,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은 큰 위험과 대가를 초래한다. 맹조교가 한 말은 잔인하지만 모두 사실이었다. 이미 끝이 보이는 싸움이었다. 설사 명백한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피교수는 결국 질 것이고, 최소 용공분자로 몰려 직장과 명예 등 그간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하물며 개 한 마리와 안경 하나, 종이 쪽 한 장, 버려진 구두 한 짝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 해도 그것을 잔인하게 확인 사살하는 맹조교가 미웠다. 어쨌든 잡혀갔으니 죄가 있다는 식의 반지성적인 태도에도 화가 났다. 자기에 대해 멋대로 아는 척하지 말라던 매몰찬 비난이 피교수의 마음을 더욱 모질게 만들었다. 임계점을 넘어간 그의 분노는 안에서 요동치다가 마침내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맹조교를 향해 달려들었다.


“맹조교, 그럼 자넨 까망귀신인가?”


“네?”


“자네 별명이 까망귀신이었다며? 그때나 지금이나 시커먼 까망귀신.”


“아니라고 했지예.”


여기서 참아야 했다. 그러나 맹조교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피교수는 묘한 반격의 통쾌함을 느끼며 한 마디 더 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자네가 까망귀신 같으니까 다들 까망귀신이라고 부르는 거 아닌가?”


“그 말 한 번만 더 하시면…”


“왜 억울한가? 분한가? 동성이나 여기 윤성민 군 보다 더 분한가?”


“닥치시소!!”


맹조교는 엄지두덩을 깨물었다. 그리고 뭔가 결심한 듯 삐라를 찢어버리고 일어섰다. 그의 온몸이 부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번 입장을 바꾸어서…”


“절대 용서하지 않을 니다.”


그는 피교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그 김에 비뚤게 걸려있던 벽시계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피교수는 고개를 떨궜다. 가슴 한 구석이 휑한 느낌이었다. 그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소금쟁이 교수님이 언제부터 남일 신경 쓰셨습니까?”

소금쟁이는 우아하다. 여느 곤충과 달리 물 위에 고고하게 떠서 물에 비치는 자신만을 바라본다. 더러운 땅 위나 어두운 물 밑에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게에 짐을 가득 지고 위태롭게 발을 떼는 소금장수처럼, 소금쟁이는 매 순간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끝에 힘을 주고 버티는 것이다.


중학교 때 피교수의 교실에서 큰 싸움이 난 적이 있었다. 서로 주먹질을 하다가 책상 위에서 뛰어내려 포크로 상대의 얼굴을 찍고, 벽에 붙은 거울을 떼서 머리를 내리치는 난장판이 벌어졌고, 아이들은 도망가거나 싸움을 말리느라 난리였지만, 좀 떨어진 창가에 앉은 소년은 그저 영어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싸움이 끝나고 이를 말리다가 돌아온 짝이 그를 힐끗 보고 앉으며 한 마디 던졌다.


넌 꼭 소금쟁이 같다 새끼야.


피교수는 언젠가 자기 별명이 소금쟁이라고 맹조교에게 말해준 적이 있었다. 맹조교는 가끔 농담조로 이 별명을 부르며 피교수에게 소심한 보복을 하곤 했는데, 면담했던 학생 이름을 기억 못 할 때나, 자기에게 밥을 잘 사주지 않을 때나, 자기 논문에 대해 신경을 못 써줄 때였다. 그런데 이번엔 맹조교가 그 옛날 자기 짝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소금쟁이라고 불렀다. 너는 태생이 그런 놈이니 검은 물밑은 신경 끄고 혼자 우아하게 살는 그 모욕적인 시선  때늦은 수치심은 인이 박인 안온함을 밀어내고, 부력을 잃어버린 그의 다리는 위험하게 흔들린다.


피교수는 바닥에 떨어진 시계를 주워 툭툭 턴 후에 다시 벽의 못에 걸었다. 충격 때문이었는지 늘 멈춰 있던 시계의 초침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전화벨이 울렸다. 정신이 든 피교수는 전화를 받을지, 혜린과 동동이를 찾으러 나갈지 망설였다. 성난 듯 쉬지 않고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수화기를 들었다. 기가 센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보세요. 네 나처장님? 지금요? 지금은 좀 곤란… 네, 네... 알겠습니다. 찾아뵙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피가 통하지 않는 듯 두 주먹을 초조하게 쥐었다 폈다 했다. 꿈속에서 아무리 그곳을 가려고 해도 길이 굽어 가지 못하고, 문을 열면 엉뚱한 곳이 나타나고, 내가 찾는 사람이 돌아서면 타인의 얼굴로 바뀌는 것처럼, 그의 마음은 혜린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계속 끼어드는 이 장애물들이 마치 악몽 같았다. 몸과 마음이 지친 그는 지금 나교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의 어깃장을 대충 받아넘기고 혜린의 행방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하며 그는 소금쟁이처럼 발끝에 힘을 잔뜩 주고 위태로운 발걸음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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