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직을 돌던 피교수와 막 헤어진 민주는 기다리고 있던 동료들에게 달려갔다. 자전거를 타고 있던 인석이가 묘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야 그 사람 너네 과 교수 아냐? 그때 그...”
"맞아."
인석이는 민주가 들고 있는 전단지 뭉치를 보고 걱정스럽게 묻는다.
"괜찮겠어? 혹시라도..."
민주는 씩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 저 교수님은 내 이름도 몰라.”
“근데 굳이 인사를 왜 해?”
"몰라... 반가워서?"
"오호, 너 역시..."
“아니라니까인마! 너 이리 와.”
“내 입술은 소중해!”
인석이는 손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방어자세를 취한다. 옆에서 아이들이 낄낄 웃는다.
“싱거운 소리 그만하고 이거나 자전거에 좀 싣자. 무거워 죽겠다.”
“난 글을 썼으니까 넌 힘을 써야지.”
“법대생이 글 쓰는 게 뭐 대수냐?”
“힘센 여장부가 그거 드는 게 뭐 대수냐?'앙 교수님~ 제가 힘이 세거든요 호호.'”
“너 오늘 죽었어.”
“나 잡아 봐라~.”
인석이가 냅다 페달을 밟고 내빼는데 민주가 잽싸게 따라잡아 종이뭉치를 휘둘러 머리통을 갈겼다. 자전거는 뒤뚱거리다 쓰러졌고 인석이는 어어어~~~ 하다가 보기 좋게 나뒹굴었다. 그 꼴이 우스워 아이들이 모두 깔깔 웃었다. 누군가 그러다 둘이 정들겠다고 놀렸고, 민주는 아니라고 손을 내젓다가 자전거 바퀴를 밟고 인석이 위에 엎어졌다. 둘 사이에 당혹스러운눈길이 오갔고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민주는 인석을 쥐어박으며 일어났다.
“이 자식 아주 선수네 그냥.”
“야 그건 내가 할 말…”
얼핏 자신들을 돌아보다가 멀어지는 피교수의 뒷모습이 민주의 눈에 들어왔다. 지난 강의 시간 그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서로 기억해 줄 때 우리는 인간이다…”
민주는 웃고 있는 네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 인석, 송희, 연주, 경덕… 함께 이렇게 웃고 있는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평소에 말이 없는 경덕이가 눈치를 채고 인석을 쿡 찔렀다. 인석이는 민주에게 대뜸 물었다.
“민주야, 우냐?”
“뭐 울긴 누가.”
“울다가 웃으면 그곳에 털 나는 건 아는데, 웃다가 울면 어디 털이 나는 걸까?”
인석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또 한방을 날렸다. 민주의 주먹질을 예상하고 몸을 잔뜩 웅크렸는데 민주는 반응이 없었다. 인석이는 머쓱해서 수습을 했다.
“이마? 아님 혓바닥? 아 볼에 나나보다. 니 볼 시커멓다 민주야 하하.”
“인석아.”
“응?”
“고맙다 친구야…”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다들 고맙다.”
“아이 민주야. 왜 그래. 내가 고마워 너무.”
정이 많은 송희가 민주를 꼭 안아줬다. 가장 침착하고 냉정한 연주가 낮은 목소리로 분위기를 바꿨다. 모두 발걸음을 늦추며 집중했다.
“자 기숙사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자. 행동 개시는 정각 5시. 시계 모두 맞췄지? 각자 맡은 구역 기억하고. 대자보랑 전단지는 하나도 남기면 안 돼. 만약 도중에 걸리면…”
“안 걸려. 그래도 걸리면 무조건 묵비권. 경덕인 좋겠다. 취미가 묵언수행이잖아. 입이 싼 내가 제일 문제다 하하...”
인석이가 웃다가 말았다. 그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그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몇 번 망설이다가 말을 다시 꺼냈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해보지 않고 어떻게 알아.”
민주가 답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연주가 담담하게 말했다. 침묵이 흘렀다. 자전거 체인 겉도는 소리만 들렸다.
“성민이를 위해서…”
경덕이의 한 마디에 모두가 침묵으로 동의했다. 그들은 말없이 걸었다. 어느덧 광장에 도착했다. 연주가 민주에게 말했다.
“맞다. 성민이가 쓴 거, 민주야 이제 그거 잘 숨겨야 한다. 절대 뺏기면 안 돼.”
“알았어. 목숨을 걸고 지킬게.”
광장에는 오렌지빛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섯 친구들은 전단 뭉치를 잡초가 우거진 분수대 안쪽에 신속하게 숨겼다. 땅에서 올라온 안개가 바닥을 이불처럼 덮고 있어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고 다섯 사람들은 잠시 둥글게 모여 서로 손을 잡고 기도를 드렸다. 송희가 대표로 소리 내어 기도했고, 기도가 어색한 인석은 눈을 떴다 감았다 끔뻑거리다가 눈을 아예 뜨고 있는 연주와 마주쳤다. 연주는 인석에게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여 ‘파이팅’을 외쳤다. 인석은 씩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리베라 노스 아 말로. 아멘(Libera nos a malo. Amen.)”
성호를 긋고 서로 눈을 맞추며 ‘악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를 나지막이 외친 그들은 각자 숙소로 흩어졌다.
민주는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마치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책상과 소지품을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벌써 3시가 지났지만 이불속에서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는 민주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민주는 이불속에서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건너편 침대에는 룸메이트인 송희가 침대에서 내려와 조용히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성민이를 잃어버린 송희의 심정이 지금 어떨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다시 먹먹해졌다.
기도를 드리는 송희를 보며 민주는 자신과 가장 친했던 선배 인경 언니가 떠올랐다. 그의 세례명은 이레네(Irene)인데 민주는 영어식 발음인 아이린 언니라고 불렀다. 외동인 민주는 그를친언니처럼 의지했다. 새내기 때 민주가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힘들어했을 때, 아이린은 그를 안고 청아한 목소리로 성가를 불러 시름을 달래주곤 했다.
늘 자상하고 상냥하던 아이린은 언젠가부터 말 수가 적어지고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에게 추근대며 몇 번이나 사귀자고 들이대는 복학생이 있었는데 아이린은 군대 간 남친이 있다며 몇 번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그는 막무가내로 길을 막고, 강의실까지 따라와 수업을 방해하면서까지 아이린을 괴롭혔다.
한편 아이린이 무척 따르고 존경하던 교수가 있었는데 그가 어느 날 연구실에 온 아이린이 자신의 첫사랑과 닮았다며 껴안고 몸을 더듬었다. 반사적으로 뿌리치자 그는 별일도 아닌데 불쾌했다면 미안하다고 애매한 사과를 했다. 아이린은 몸과 마음이 충격으로 얼어붙어 별다른 대응도 못하고 방을 나왔다. 엄한 군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린은 가부장적 권위에 대해 저항해 본 적이 없었고, 그날 일도 교수를 원망하기보다는 자기 잘못이 아닐까 자책하는 바람에 민주는 속이 터졌다. 그 강제추행 이후에도 교수는 일을 핑계로 아이린을 계속 방으로 불렀고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 아이린의 순순한 태도를 보고 그 교수는 한술 더 떠서 캠퍼스에서 아이린을 만날 때마다 스스럼없이 그의 손을 잡거나 얼굴과 몸에 손을 댔다.
이런 모습을 모두 지켜본 그 남학생은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혀, 아이린이 어느 교수와 그렇고 그런 사이이며 임신까지 했다는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좁은 대학에서 소문은 파다하게 퍼졌고 걔는 완전 꽃뱀이라더라, 대체 누구의 애를 가진 거냐는 뒷담화가 난무했다. 아이린은 너무나 괴로워 그 교수에게 도움을 구했다. 교수는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봐 화들짝 선을 그었다. 너에 대한 별별 소문을 들었다며 네 헤픈 행실로 나까지 피해를 입었다고 몰아붙였다.
그 무렵 아이린이 그토록 기다리던 남자 친구가 제대해서 돌아왔다. 재회의 반가움은 잠깐, 무성한 소문에 귀를 연 그는 곧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아이린을 피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남친이 자신을 스토킹 하던 남자와 나란히 웃고 떠들며 힐끗거리는 그 눈빛을 본 이후 아이린은 입을 닫았다. 등 뒤에서 험담하는 학생들과 싸우고 대신 화를 내는 민주에게도 말없는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화창한 어느 봄날, 아이린은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차려입고 곱게 단장을 했다. 표정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밝아 보였다. 민주는 아이린 언니가 이전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너무 기뻤다. 울 언니 정윤희 보다 훨씬 이쁘다며 누구랑데이트하냐고 놀렸다. 아이린은 그분도 너처럼 좋아하셨으면 좋겠다고 환히 웃으며 방을 나섰다. 그것이 민주가 본 아이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날 오후 교련 연습장에서 훈련을 받던 학생들은 절벽 쪽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었다.
“풀잎 끝에 맺혀진 이슬방울 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 덧없이 지나네. 꽃들 피어 시들고 사람은 무덤에. 변치 않을 분 홀로 천주뿐이로다…”
민주는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이린 언니를 걱정하다가 베개 밑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언니의 묵주를 발견하고는 뛰쳐나갔다. 그 묵주는 한 번도 아이린의 손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날 밤, 학교 안팎을 다 찾아봤지만 언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시신은 며칠 후 바닷가에서 발견되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편히 잠든 것처럼 파도 거품 위에 누워있었다. 물에 불지도 상하지도 않고, 잠에서 곧 깨어날 것 같은 모습이 기이해서 한동안 또 하나의 기담이 되어 캠퍼스에 돌아다녔다. 물론 아이린을 추행하고 내쳤던 그 교수는 지금도 강의실과 캠퍼스를 활보하고 있다.
민주는 머리맡에 놓인 아이린의 묵주를 꼭 쥐고 다시 잠을 청했으나 다른 번잡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도서관에 반납하지 않은 책과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는 모임 약속들, 미처 하지 못한 빨래 등… 문득 엄마한테 깜빡 전화를 못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엄마 식당일 마친 밤 시간에 해야 하는데 오늘은 그럴 틈이 도저히 나질 않았다. 오늘 무사히 그 일을 마치면 꼭 해야지. 그런데 안 붙들리고 돌아올 수 있을까? 엄마의 목소리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끙끙대다가 그 꼬리를 물고 그날 갑자기 기숙사로 걸려왔던 성민이의 전화 목소리가 떠올랐다.
성민이와 민주는 같은 과 동기이자 임원단 일도 같이 해서 제법 친한 사이였다. 본 지가 꽤 되어서 반가운 마음에 욕지거리를 날리고 학교 때려치웠냐고 물었더니 휴가 나왔다고 했다. 얘가 언제 군대를 갔나 싶어 어리둥절하는 민주에게 좀 만나자고 했다.
그날 모임에는 성민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절친인 경덕과 인석, 여자친구 송희, 토론 동아리 동기 연주가 함께 모였다. 총학에서 같이 활동한 인석을 빼고는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초면의 어색한 분위기는 성민을 다시 만난 기쁨 속에 곧 풀어졌고,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가며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민주는 이 매정한 자식이 군대 간지 1년도 넘었는데 왜 이제야 연락을 했냐고 성민이의 뒤통수를 갈겼다. 인석이도 성민이의 목을 조르며 이 자식이 지난번 외출 때도 송희만 만났다며 사랑 때문에 친구를 버린 놈이라고 타박을 했다. 송희는 그래도 이제 살이 좀 붙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연신 성민의 거친 손을 쓰다듬었고, 유일하게 복학생인 경덕이는 군대밥이 꽤 맛있다고 딱 한 마디 거들었다. 오랜만에 사회로 나와서인지 성민이는 어딘지 주눅이 들은 것 같았고 누구와도 딱히 오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짧은 머리에 구릿빛 피부, 절도 있는 말투와 동작이 생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쾌활한 웃음과 맑은 눈빛은 점차 학생 때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면서 흥도 살아났다. 민주가 갑자기 빈 소주병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인석이가 웃으며 한 마디 했다.
“민주, 발동 걸렸구나. 오늘도 ‘단장의 미아리 고개’냐?”
“아냐 씨. 요로분, 답답하십니까? 고단하십니까? 이 거지 같은 세상 실망스러우쉽니까?”
모두가 웃으며 ‘네!’ 하며 웃었다. 민주는 탄식하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런 미췰, 미췰, 미췰 것 같은 이 세상…. 좌앙 좌앙~”
소주병을 껴안고 기타 전주를 하던 민주는 록 가수로 돌변해 헤드뱅잉을 하며 “미칠 것 같은 세상”을 열창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젓가락으로 냄비와 상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췄다.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X2)
주여 내 기도 들으소서 세상 어디 가나 실망뿐이요 먹고 자고 애써 일할 뿐 (씨발, 씨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주여 나는 무엇하리까 (쭈여, 쭈여, 쭈여!)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X2)
주여 내 기도 들으소서 어둠 속에 손 펴 도움 바랄 때 밝은 빛이 돌연 비치네
예수님이 서서 눈물 흘리며 지체 말고 오라 하시네 (아멘, 아멘, 아멘!)”
민주는 ‘에브뤼바디’를 외치며 모두를 일으켜 세웠다. 모두가 소주병, 숟가락, 젓가락, 밥공기를 타악기 삼아 두들기며 “미칠 것 같은 이 세상”을 무한 반복으로 외치면서 상 주위를 뛰어다녔다. 이 시대는 이랬다. 술자리에서조차 시대의 무거운 분위기와 분노 어린 무력감이 청년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어느덧 하나둘씩 몸을 구긴 채 곯아떨어지고 상 위에는 공연을 마친 빈 소주병들과 잔들, 그리고 바닥을 보이는 양은냄비가 피곤한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김치 이파리들과 으깨진 두부 조각들은 마치 소진된 젊음처럼 냄비 밑바닥에 들러붙어 있었다. 마지막까지 깨어 안주도 없이 술잔을 들이켜던 민주 옆자리에 비스듬히 누웠던 성민은 갑자기 눈을 뜨고 말을 건넸다.
“야, 민주야.”
“아 깜짝이야. 자는 거 아니었어?”
“난 말야… 꼭 유학 갈 거다.”
“짜식, 그래 너 같은 인재는 박사 해야지! 내가 꼭 보내준다!…”
성민이는 활짝 웃으며 자세를 고쳐 바닥에 팔베개를 하고 신이 나서 말했다.
“그리고 거기 가면 캠퍼스 드넓은 잔디밭에 이렇게 누워서 매일 하늘을 볼 거야. 하늘은 더 파랗고 구름은 더 하얗겠지 거긴? 숨 막히는 잿빛 하늘이 아니라, 진짜 자유로운 파아란 하늘… 하아…”
봉투 속에는 뭔가 빼곡히 적힌 갱지 묶음이 들어있었다. 종이를 펼쳐 내용을 본 민주는 깜짝 놀라 성민의 얼굴과 글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면서 읽어 내려갔다. 성민은 담담하게 술잔을 비웠다. 민주는 글을 다 읽고 성민을 빤히 쳐다봤다. 성민이도 민주의 눈을 마주 봤다. 두 사람의 눈가가 동시에 촉촉이 젖었다. 민주는 성민을 꼭 끌어안았다. 성민은 움찔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닿은 볼에 서로의 체온과 물기가 느껴졌다. 끄윽 거리는 숨죽인 울음소리와 두 몸의 떨림이 한동안 이어지다가 잦아들고, 민주는 성민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이고 경쾌하게 몸을 풀고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 두 사람은 동시에 잔을 들고 마주 보며 동시에 잔을 비웠다. 민주가 말을 먼저 꺼냈다.
“얘네들은 알아?”
성민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송희 씨도?”
“네가 처음 본 거야.”
“근데 이거…. 걸리면 큰일 나는 거 아냐?”
“그러니까 너한테 주는 거야.”
“야, 네 여친도 있고, 절친도 있고, 동창도 있는데 왜 굳이 나한테…”
“그래서 주는 거야. 네가 제일 멀고, 그래서 제일 안전하니까...”
“칫... 근데 이걸로 뭐 하려고?”
“몰라. 그냥… 내 저항의 방식이랄까, 잊지 않으려고 썼는데… 제대할 때까지 부탁해.”
“음 좋아. 근데 공짜론 안 되고, 이자 또박또박 쳐서 술 사라. 그니까 꼭 돌아와!”
“알았다. 꼭 돌아올게.”
“약속해.”
“그래 약속…”
성민이는 민주가 내민 손가락을 힘 있게 마주 잡았다. 형광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벽에 기대앉아 빛과 어둠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방 안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성민이가 앞을 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 이 장면 믿기질 않아. 꿈속에서라도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그래서 이 악물고 버텼는데, 이렇게 다 함께 있잖아. 내일 잠에서 깨면 나 울 지도 몰라 하하.
'꿈을 꾸었네. 하늘이 열리고 보물이 내게 곧 쏟아질 것만 같은 꿈을. 잠에서 깨었을 때 나는 그 꿈으로 돌아가고 싶어 울었네…'”
성민이는 가장 좋아하던 셰익스피어의 <태풍>에 나오는 캘리반의 대사를 암송했다. 그의 표정은 깜빡이는 형광등 빛 아래 그늘이 지고, 그의 음성은 점차 목이 메어갔다. 민주는 얼른 그의 말을 끊고 너스레를 떨었다.
“걱정 마라 캘리반, 우리가 결사대를 조직해서라도 널 지켜줄 테다. 우리가 맛있는 거 싸들고 꼭 면회 갈 거니까 쫄지 말고 딱 버텨! 이것들 다 죽었어!”
“와우 결사대! 좋아, 이것들 다 죽었어! 하하…”
다음 날 새벽, 그는 귀대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었다. 그동안 친구들의 면회 신청이 두 번 거부되었고, 간신히 날짜가 잡혀 그를 만나러 가기 사흘 전, 성민이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사인은 자살이었다. 보초 근무 중 자신의 총으로 머리를 연발로 쐈고 머리는 사라진 채 몸통만 돌아왔다. 성민의 홀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지시고 다섯 친구들은 을씨년스러운 영안실을 함께 지켰다.
발인 전날 밤, 민주는 이제 유품이 되어버린 성민이의 빼곡한 기록을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그가 왜 학기 중에 돌연히 사라졌는지, 왜 외출이나 휴가를 나와서도 학교에 오거나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는지, 왜 그날 술자리에서 그리 슬픈 눈빛을 하고 있었는지, 왜 그의 글씨가 쫓긴 듯 갈겨써져 있고 여기저기 얼룩진 잉크 자국들이 있었는지, 성민이는 이제야 친구들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송희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구겨진 종이 한 장, 한 장을 펴고 또 폈다. 그날 밤, 아무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의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파란 불꽃을 응시하며 그렇게 장례의 마지막 밤은 흘러갔다.
다음 날, 발인을 마치고 돌아오던 오후, 때 이른 태풍은 많은 비를 뿌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역으로 향하던 중 민주는 친구들에게 그날 성민이와 나눴던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리가 너를 지킬 결사대를 만들어주겠다 했다고… 그랬더니 성민이가 좋아했다고…. 갑자기 송희가 발걸음을 멈췄다. 다섯 개의 우산이 동그랗게 모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송희가 조용히 입을 뗐다.
“우리 하자… 결사대.”
송희가 우산을 내렸다. 경덕이가 우산을 내렸다. 연주와 민주가 우산을 내렸다. 이들을 지켜보던 인석이는 한숨을 쉬며 우산을 내렸다. 둥그렇게 마주 선 이들 위로 하늘에선 우르르 천둥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