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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Sep 17. 2024

16. 작전 개시

‘삐삐삐’ 전자시계 알람이 울렸다.


민주와 송희는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일어섰다. 조용히 문을 열고 복도를 통해 기숙사 계단을 내려왔다. 수위실이 있는 정문을 피해 1층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다섯 시는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이른 아침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대자보를 많이 노출시키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직원들에게 들킬 위험 또한 적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세를 낮추고 광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경덕이와 인석이가 이미 자전거를 타고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을 기다리던 연주는 숨겨둔 전단 뭉치를 꺼내 나눠줬다.


“자, 송희는 상과대랑 문과대, 민주는 가정대랑 간호대, 나는 도서관이랑 사범대랑 정경대를 맡을게.”


“연주야, 도서관은 조심해. 학생들 눈에 띌 수 있어.”


전단 뭉치를 건네받으면서 송희가 걱정했다.


“걱정 마. 민주야, 네가 제일 먼 곳이어서 미안.”


“뭔 소리야. 나 백 미터 13초야. 자, 가자!”


민주와 송희는 같은 방향으로 뛰어가다가 상과대 앞에서 헤어졌다. 민주가 가정대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자전거 팀이 붙인 대자보가 보였다. ‘윤성민’과 ‘얼굴없는성자단’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민주는 기민하게 계단을 올라 4층 옥상에 도착했다. 낮에 확인한 대로 옥상문은 열려있었다. 그는 옥상으로 나와 건물 끝으로 달려갔다. 짙은 바다 안개가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 마치 학교가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민주는 전단들을 힘껏 뿌렸다. 하얀 전단지들은 바람을 타고 마치 갈매기 떼처럼 요란스럽게 흩어졌다. 민주는 전단들이 멀리멀리 날아가기를 기원하며 서둘러 가정대를 빠져나왔다. 간호대는 운동장 쪽 언덕에 홀로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 눈에 뜨일 확률은 적었지만 거리가 제법 있었다. 마지막 전단 뭉치를 끼고 달리는 민주의 호흡이 가빠졌다. 간호대로 꺾어지는 길모퉁이에서 민주는 갑자기 몸을 낮췄다. 손전등을 든 학생 둘이 주변을 살피며 간호대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민주는 초조해졌다. 캠퍼스 곳곳의 대자보와 전단은 이미 누군가 봤을 수도 있고 직원들이 알아챘을 수도 있다. 두 학생은 느릿느릿 간호대 출입구를 오르고 있었다. 둘이 깔깔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부지런들 하기도…”


두 사람이 건물 안으로 사라진 뒤 민주는 스물을 세고 입구를 향해 달렸다. 다행히 어두운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민주는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간호대는 반 목조 건물이어서 발을 옮길 때마다 나무 계단이 삐그덕 소리를 냈다. 민주는 최대한 소리를 낮추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한 계단씩 올랐다. 2층에서 3층 계단을 오르려 할 때 위쪽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끼익.


민주는 재빠르게 계단을 벗어나 빈 강의실로 숨어 들어가 몸을 숨겼다. 아까 그 아이들인가 싶었지만 발소리는 하나였고 묵직했다. 당직을 선 직원이나 교수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소리가 민주가 숨어있는 곳 바로 앞에서 딱 멈췄다. 민주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고 자기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지금 들키면 끝장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여기 숨어있을 수도 없었다.


쿠웅.


이때 아래쪽에서 끼익 하는 철제 소음과 문이 쿵 하고 닫히는 둔한 소리가 울렸다. 발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고 점점 멀어졌다. 소리가 난 일층으로 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민주는 조심스럽게 강의실을 빠져나와 아까보다 더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낮에 왔을 때는 못 느꼈는데 나무 계단 소리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마치 계단들이 자다 깨어나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민주는 점점 기분이 나빠지고 마음도 급해져서 소리를 개의치 않고 맨 꼭대기 다락층으로 이어지는 좁은 계단으로 빠르게 뛰어올라갔다.


간호대 건물은 옥상이 따로 없다. 지붕 바로 밑의 다락층은 좁은 나무 복도가 있고 양쪽으로 창이 나 있다. 복도 중간에 짧은 계단이 있어 작은 다락방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방은 늘 잠겨 있다. 잠긴 문 밑으로는 오렌지 불빛이 새어 나왔다. 민주는 한쪽 창으로 달려가 전단지 절반을 뿌리고 나머지를 뿌리기 위해 반대편으로 달려갔다.


우르르르 쿠쿠쿵!!!


그때 둔중한 소음과 함께 건물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다! 민주는 균형을 잃고 나뒹굴었고 전단들이 흩어졌다. 지진이라니! 하필 지금! 온 건물이 삐걱거리며 울부짖었고 위에서는 나무 파편, 돌가루들과 형광등이 떨어져 내렸다. 다락방 문이 굉음을 내며 떨어져 굴렀다. 틈이 벌어진 나무 바닥은 곧 꺼질 것만 같았다. 민주는 머리를 감싸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천주님, 안 돼요! 천주님!” 창문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어 번 크게 끄윽 거인이 트림하는 것 같은 소리가 나더니 진동이 멈췄다. 민주는 전단을 되는대로 집어 들고 반대편 깨진 창문 틈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계단을 향해 냅다 달렸다. 복도 중간에 문이 떨어져 나간 다락방이 얼핏 보였다. 오렌지 불빛 사이로 누군가 있는 것 같았지만 확인할 겨를도 없이 내달려 계단 난간을 휙 낚아채면서 몸을 트는 순간 민주는 멈칫했다.

계단 중간에 뭔가 웅크리고 있는 시커먼 형체가 버티고 있다.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고 지진으로 천장이 일부 무너진 잔해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것은 꼼짝 않고 좁은 계단 통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민주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되었고 발견되어서도 안 되었다. 그는 뛰어내려 가다가 계단을 박차고 그 묘한 장애물 위로 점프를 했다. 그가 힘껏 공중으로 도약을 한 순간 무언가가 그의 발목을 잡았고 민주는 악 소리와 함께 고꾸라졌다. 계단 모서리에 무릎을 세게 부딪혔다. 뒤에서 키키키키 바람 빠진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민주는 돌아보지 않고 사정없이 뒷발질을 했다. 단단히 잡힌 발목을 빼기 위해 있는 있는 대로 발길질을 하던 중에 갑자기 발목이 자유로워졌고 그 바람에 중심을 잃은 민주는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




학교 앞 바닷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우리 학교 학생이야?” “죽었나 봐” “불쌍해” 등의 수군거림이 들린다. 민주는 등을 지고 둘러선 선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기가 무서워 뒤에 서서 틈새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람들의 허리와 팔 틈으로 가지런히 놓인 다리가 보인다. 하얀 발끝과 종아리가 보인다. 다리 위에는 물방울들이 맺혀 반짝이고 있다. 민주는 주먹을 꼭 쥐고 발꿈치를 들어 앞사람의 어깨 위로 고개를 내민다. 하얀 벨트와 원피스의 화려한 꽃무늬가 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턱 막히면서 다리에 힘이 빠진다. 앞에 있던 사람 두엇이 빠져나가면서 누워있는 얼굴이 보인다. 밤마다 옆 침대에서 곤히 잠들었을 때와 똑같은 그 익숙한 얼굴.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데… 그 얼굴이 갑자기 민주 쪽으로 고개를 휙 꺾는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뜨고 민주에게 외친다.


“민주야 눈 떠!”




민주는 비명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건물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고 멀리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돌아와 급히 몸을 일으키며 계단 쪽을 돌아보니 계단에는 아무것도 없다. 검게 보였던 형체는 간 곳이 없고 그곳에는 계단이 무너져 내려 구멍이 뚫려 있다. 민주는 얼굴을 찡그리며 일어섰다. 다리에서 피가 나고 있었지만 움직일 수는 있었다. 시계를 보니 거의 한 시간 동안 쓰러져 있었다. 지진 탓인지 다행히 건물 안에 인적은 아직 없다. 민주는 서둘러 간호대 문을 열고 나왔다. 바닥에는 전단 종이들이 뒹굴고 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기숙사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누군가 민주를 불렀다.


“어이 너!”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학과장님이라는 별명을 가진 영문과 맹정환 조교였다.


“괜찮냐? 피나는데?”


“아… 네”


“어 너 영문과 학생 아닌가?”


민주는 가슴이 철렁했다. 맹조교가 자신을 알아볼 줄은 몰랐다.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야 너 혹시 피교수님 못 봤어?”


“아뇨. 왜요?”


“아 돌겠네. 당직을 섰는데 어째 본 사람이 아무도… 아, 아니다.”


민주는 어젯밤 피교수를 마주쳤던 일이 떠올랐지만 자신이 봤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맹조교에게 의심을 사지 않고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였다.”


“아 네… 그럼 수고하세요.”


“근데 니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었어?”


“… 운동이요.


“지진이 났는데 운동을 했다고?”


“나기 전에 했죠. 근데 지진이 나서 넘어졌죠.”


“근데 의무실로 바로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노… 뭐 하니?”


“빨리 못 걷거든요. 혹시 안 다쳐 보셨어요?”


민주는 목례를 하고 절뚝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전단 한 장이 민주 발 앞으로 굴러온다. 자기도 모르게 몸을 구부려 줍는다. 맹조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그거 가져와."


민주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돌아선다.


"왜요?"


"이리 가져오라니까?"


마지못해 맹조교에게 다시 가는데 그의 손에는 구겨진 전단들이 한 움큼 들려있다. 순간 열불이 올라왔지만 민주는 마른침을 꼴깍 삼켜 넘긴다.


"내놔."


"아직 안 읽었는데요."


"너 이거 갖고 내려가다가 사복들한테 걸리면 바로 닭장차야. 아나, 알어?"


맹조교가 낚아챈 전단은 날개 꺾인 새처럼 그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구겨져 포획된다. 민주의 불온한 눈빛을 느꼈는지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민주를 아래위로 훑는다.


근데 너 아까 저 건물에서 나오던데... 혹시 이거…”


민주의 동공이 흔들렸다. 저 두툼한 입술에서 “네가 한 짓이야?”라는 질문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맹조교의 눈과 민주의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 서로의 눈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이다. 빨리 가서 치료나 받아라. 에이 문디 자슥들.”


맹조교는 욕을 하며 전단을 마저 줍기 시작했다. 민주는 목례를 하고 돌아서 걷는다. 등 뒤가 따가웠다. 자기도 모르게 빨라지는 걸음을 자제하고 일부러 더 절뚝거리며 생각했다.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들켰을까? 전단을 괜히 주웠나? 동시에 그의 욕이 자기를 향한 것이라는 생각에 화도 났다. 자신들이 무슨 욕먹을 짓을 했단 말인가? 작전이 반쯤 실패했다는 심란한 마음으로 민주는 광장 쪽 길로 접어들었다. 이른 아침이지만 여기저기 놀란 학생들이 나와 서 있었고 건물들 이곳저곳의 균열이 눈에 들어왔다. 광장에 도착해서 반이 쫙 갈라진 분수대를 보자 민주는 비로소 친구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광장 쪽은 대자보와 전단이 이미 눈에 띄지 않았다. 지진 때문에 뛰어나온 직원들이 서둘러 모두 수거를 한 모양이었다. 민주는 분한 마음이 들어 입술을 깨물며 기숙사로 향했다. 송희가 무사히 돌아왔는지 걱정이 됐다. 민주는 절뚝거리며 기숙사로 돌아가 방문을 열었다.


“송희야?...”


송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방은 선반에서 떨어진 책들이 바닥에 널려있었고 벽에 실금이 생겼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민주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계단에서 구른 탓인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긴장이 풀리면서 동시에 한기가 느껴져 이불을 아무렇게 덮고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나라에 지진이라니… 지진과 함께 모든 것이 이상하게 꼬였다. 계단을 막고 있던 괴물체, 그날의 마지막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을 깨운 아이린 언니, 맹조교와의 만남… 그는 아마도 민주를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피교수님을 열심히 찾던 중이었으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지도.... 그런데 피교수님은 어떻게 됐을까? 별일 아니겠지? 이젠 내 이름을 기억해 줄까?.... 아이린 언니 보고 싶다...

생각이 꼬리를 무는 중에 민주는 반쯤 눈이 감겼다. 이불속이 따뜻해서 그런지 몸이 침대 속으로 푹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잠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을 떠보니 자신의 몸이 정말 늪에 빠지는 것처럼 침대 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몸이 이미 반쯤 침대 밑으로 사라졌고 머리 절반은 베갯속에 잠겨있다. 베개 밑으로 이미 사라진 오른쪽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베개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한 왼쪽 눈에 침대 위로 나와있는 그의 손가락 끝만 보였다. 왼쪽 시야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방문이 열리는 것이 얼핏 보였다. 그리고는 암흑이었다. 왼쪽 귀가 마지막으로 베개 밑으로 사라지면서 다급한 송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주야? 어딨어?”


민주는 여기 있다고 필사적으로 외쳤으나 아무 소리도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송희의 울먹이는 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렸다.


“오 주님, 모두를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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