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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Sep 23. 2024

20. 책 속을 걷다

피교수와 민주가 들어간 책 속은 민주의 예상과는 달랐다. 몸이 균형을 잃기도 전에 두 사람의 발은 바로 하얀 바닥에 닿았고 그 바닥은 종이로 만들어진 계단이었다. 그리고 긴 계단의 끝에는 역시 종이로 만든 손잡이 없는 문이 있다. 계단을 내려가 피교수가 문을 조심스럽게 밀자 마치 책의 페이지가 넘어가듯 문이 가볍게 열렸다. 문을 통과하자 피교수와 민주는 사방이 거울로 된 복도의 한쪽 끝에 서 있다. 끝이 안 보이는 기나긴 복도, 두 사람의 모습이 거울 속에 끝없이 늘어서 자신들을 마주 보고 있다. 피교수가 위축되어 흘깃 뒤를 돌아보니 종이문은 온데간데없고 거울 속의 자신과 마주친다.



“민주야, 문이 사라졌어.”


“이런, 뭐지? 불러볼까요?”


민주가 두 손을 모아 긴 복도 쪽으로 소리를 질렀다. 거울 속 민주들도 일제히 손을 모아 입을 열었다.


“혜린 언니! 아이린 언니!”


민주의 목소리는 거울에 반사되어 끝없이 반복되는 메아리로 울려 퍼졌다. 그런데 반사된 메아리들은 한 가지가 아니었다. 저음의 화난 듯한 메아리, 깔깔 웃는 메아리, 울먹이는 메아리, 비명을 지르는 메아리, 한숨짓는 메아리, 노래하는 메아리 등, 수많은 감정의 메아리들이 불협화음으로 ‘혜린 언니’를 마구 아우성쳐댔다. 민주는 두 번 불렀을 뿐인데, 메아리는 마치 바람에 울려대는 많은 풍경들처럼 엄청난 소음으로 번졌다.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메아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가라앉았고, ‘언니’를 부르는 가냘픈 속삭임이 바람 소리처럼 공기를 떠돌고 있었다. 피교수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수많은 자신의 모습들을 애써 외면하며 민주에게 속삭였다.


“민주야, 근데 우리가 맞게 온 거야?”


“모르겠어요. 제가 갔던 곳이랑 너무 달라서…”


“와우, 소리와 분노.”


“네?”


“이 메아리들 말이야. 맥베스의 독백이 생각나는구나. ‘소리와 분노가 가득한, 의미 없는 이야기…’”


“헐 교수님…!”


“그런데 여기 말고 다른 길은 없을까?”


“왜요?”


“저렇게 많은 내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좀 으스스하구나…”


“훗, 귀신 친구도 있으면서 거울이 무서우세요?”


“난 세수할 때도 거울을 안 보거든.”


“아 어쩐지… 히히.”


히히히~ 메아리가 다시 소용돌이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민주는 깜짝 놀라 ‘쉿’ 소리를 냈다. 이번엔 히히 소리와 쉿 소리가 이중창으로 반복되었다. 민주와 피교수는 거의 들리지 않는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인디아나 박사님?”


“음… 돌아갈 길은 막혔고, 인디는 늘 용감하게 돌진? 아, 거울방은 늘 함정이 있으니까 조심 조심하면서…”


“함정까지… 후…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가볼까?”


“잠시만요. 리베라 노스 아 말로. 아멘.”


“응?”


“악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소서. 아멘.”


“그래, 아멘!”


민주는 성호를 그었다. 피교수도 얼결에 따라 그었다. 메아리는 어느덧 잦아들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거울 속 모습들도 일제히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의 발소리 역시 자박자박, 저벅저벅, 쿵쿵, 온갖 메아리가 되어 끝없이 이들을 따라왔다. 민주는 처음 혜린의 목소리를 들었던 공간을 떠올렸다. 그때는 밤하늘에 마치 가벼운 깃털처럼 떠 있는 느낌이었는데, 이곳은 비교적 밝은 복도였지만 오히려 무덤 속에 갇힌 듯 몸이 무겁고 숨이 가빴다. 그리고 거울에 반사된 자신을 볼수록 까맣게 잊고 있던 과거의 온갖 괴로웠던 기억들이 동시에 되살아나 마음을 어지럽혔다….


어렸을 때 매일 싸웠던 아빠와 엄마, 한밤중에 물건들이 박살 나고 개 짖는 것 같은 고함 소리에 문고리를 붙들고 덜덜 떨며 오줌을 쌌던 일, 아빠 사업이 부도가 나고 온통 집안에 붙어있던 빨간딱지,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 베개 하나만 들고 엄마를 따라나서며 집에 두고 온 장난감 때문에 서럽게 울던 일….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보면 볼수록 비참하고 추레하게 보였다. 그들은 민주와 함께 걸으며 비웃는 것만 같았다. ‘다 너 때문이야. 네 잘못이야.’ 민주는 숨이 가빠와 눈물 없는 마른 울음소리를 흑흑 내며 힘겹게 한 걸음씩 내디뎠다. 말없이 옆에서 걷고 있는 피교수도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그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며 그때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지며 보았던 그의 절망적인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이곳에 오기까지 대체 어떤 일들을 겪어온 것일까. 그 순간 죽기 전 성민과의 마지막 대화와 비 오던 장례식장, 바닷가에 누워있던 아이린의 시신이 떠오르며 갑자기 불에 덴 듯, 가슴이 타는 듯이 아팠다. 그 감정은 불이 옮기듯 다른 기억과 감정으로 옮겨 붙고, 그 감정은 또 다른 불길을 만들어 내서 자신의 감정을 송두리째 태워버리는 것 같았다. 민주는 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다리를 힘겹게 버티다가 무릎을 꿇었다. 피교수도 얼굴을 감싸 쥐고 멈춰 선 채 민주 옆에 몸을 낮추며 귓가에 속삭였다.


“민주야, 눈을 감아라.”


“아 교수님, 더 못 걷겠어요…”


“쉿. 눈을 감아. 거울들이… 살아있다.”


“네? 그건 또 무슨 은유인가요?...”


민주는 지친 눈으로 거울들을 흘깃 봤다. 거울 속 수 천 개의 이미지들이 꼿꼿이 서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벌어진 입에서는 민주의 울음소리와 피교수의 신음 소리가 새 나오고 있었다. 민주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거울 속 얼굴들의 입이 쫙 벌어지고 비명의 폭풍이 복도에 몰아쳤다. 동시에 우르릉 소리가 나면서 거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울들은 이들을 향해 철컹철컹 군대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거울 속 이미지들의 팔다리가 거울 밖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피교수는 민주의 눈을 가리고 다급하게 말했다.


“귀를 막아. 자 뛰자!”


민주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일어나 몇 걸음 내딛다가 주저앉았다.


“다리가… 움직이질 않아요.”


“아… 그럼 내게 업혀라”


“에? 저 보기보다 무거운데…”


“눈 꼭 감고, 귀 꼭 막고!”


민주는 사양하려 했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피교수는 등을 들이대고 민주의 두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며 민주를 업었다. 거울은 점점 더 다가왔고 거울 속 놈들은 입을 벌린 무표정한 얼굴을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피교수가 외쳤다.


“즐거운 것만 생각해! 맛난 거! 먹고 싶은 걸 떠올려!”


민주를 업은 피교수는 힘껏 뛰기 시작했다. 폭풍 같은 소음과 진동 속에서 무슨 맛난 것이 떠오르겠는가 만은,… 민주는 가까스로 어렸을 때 처음 먹은 아이스크림을 생각하려 애썼다. 너무나 맛나 보이는 아이스크림 콘이었는데 한입 가득 베물려는 순간 아이스크림 덩어리가 통째로 바닥에 떨어졌다. 민주는 새삼 서러워 울음이 터졌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 뒤쫓아오는 울음의 메아리가 또 무서워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다가 민주는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너무나 많은 일이 추스를 시간도 없이 연이어 벌어졌다. 그 사이 열흘이 흘렀다면 민주는 열흘 동안 자지도 먹지도 못한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이렇게 정신줄을 놓는 것이 당연하다고 체념하며 민주는 피교수의 등에 업힌 채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민주는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거울들도 끔찍한 메아리도 모두 사라졌다. 두 사람은 거울 복도를 빠져나와 오렌지빛 안개가 짙게 깔린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피교수는 민주를 업은 채로 작게 노래를 부르며 걷고 있었다.


“솜사탕 후우~ 솜사탕 후우~


몽실몽실~ 푸우 뭉게뭉게 푸우~


어깨 위로 후우~ 목말 타고 후우~  


하늘 위로 쑤욱~ 구름 위로 쑤욱~”


피교수는 숨이 차서인지 목이 멘 소리로 계속 그 유치한 동요를 반복해서 불렀다. 노동요를 부르듯이 그는 후우, 푸우, 후우, 쑤욱 박자에 맞춰 발을 떼고 있었다. 잠이 깬 민주도 입술을 달싹거리며 노래를 조금씩 따라 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고 기분도 한결 가벼워졌다. 민주는 노래를 따라 하다가 픽 웃었다. 피교수가 코를 훌쩍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민주 깼구나.”


“너무 시끄러워서요.”


“하하 미안, 미안.”


“제가 얼마나 잔 거예요?”


“얼마 안 됐어. 더 자도 된다.”


“어떻게 빠져나온 거예요?”


“솜사탕 후우~ 솜사탕 후우~”


“그 노래를 계속 불렀다고요?”


“응. 그게 날 깨어있게… 아니 즐겁게 하는 노래거든.”


“교수님 어렸을 때 부른 동요예요? 중독성 있네요.”


“아니, 내가 지은 건데.”


“에 진짜요?”


“옛날에… 우리 딸이 하도 울어서… 솜사탕을 사줬는데, 그래도 계속 울길래 달래 보려고…”


피교수는 다시 코를 훌쩍였다.


“아, 그래서 그쳤나요?”


“하하 아니, 더 크게 울더라고.”


피교수는 웃다가 목이 막힌 듯 기침을 했다.


“하핫, 사모님한테 혼나셨… 흠흠 근데 교수님 음치시죠?”


“내가 왜 음치야. 성가대 테너였는데?”


“아이고야, 그 성가대 망했겠네.”


“민주,… 살아났구나 이제.”


“넵 살아났습니다. 저 이제 걸을 수 있어요.”


민주는 피교수의 따뜻한 등에서 내려오며 솜사탕을 손에 쥔 어린 딸을 어깨 위로 목말 태운 젊은 날의 피교수를 떠올려봤다. 문득 그 딸이 부럽다는 생각을 밀어내며 민주는 어색한 침묵을 깨고 입을 뗐다.


“그 거울 복도는 뭐였을까요? 그 키쿠들이 쫓아온 걸까요?”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럼 무슨 마법의 거울인가?”


“하하 백설공주에 나오는 거 같은?”


“어 맞아요! 근데 얘네들은 묻지도 않았는데 거울이 내게 마구 외치는 거 같았어요. 넌 못 생겼다, 추하다, 실패자다, 다 너 때문이다. 그 끔찍한 메아리들이 그… 온갖 기억들을 잡아 뜯고 헤집어 놓는 것 같은….”


“맞아… 그래서 난 거울을 보지 않아. 위험하거든.”


“에, 농담이시죠?”


“아니야. 거울은 판도라의 상자야 내 생각엔. 없으면 내 모습에 아무 신경도 쓸 필요가 없는데, 막상 들여다보면 내 눈코입이 왜 이렇게 생겼는지, 왜 나는 미간이 좁은지, 왜 내 콧날과 턱선은 뭉툭한지, 못 보던 주름은 왜 생겼는지 몰랐던 흠들을 보게 되잖아.”


“에이 꼭 그런 건 아니죠. 거울을 보면서 자기 미모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나르시서스처럼요.”


“있지. 그런데 나르시서스가 어떻게 됐지? 물에 비친 자기 모습마저 갖고 싶어 하다가 목숨을 잃었잖아. 그렇다면 자기애라는 것은 결국 만족을 모르는, 아무리 먹어도 채울 수 없는 배고픔이 아닐까? 그리고 나르시서스의 미모를 비춰준 그 거울은 결국 축복일까 저주일까?... 그러니까 결론은 거울은 위험하다. 그래서 난 세수할 때도 거울을 보지 않는다아~.”


“헐~ 결론이 왜 그쪽으로 가죠? 그래도 교수님은 거울 좀 보셔야 해요. 애들이 새둥지 교수님이라고 부른단 말이에요.”


녀석들, 하하… 음… 아까 그 거울들은 말야, 우리가 살아오면서 방문을 굳게 닫은 기억들이 있지 않니. 다시 들여다보면 아파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런 기억들. 우리는 그것들을 내 안 깊숙이 어두운 방에 넣고 잠가둔단 말이야. 그것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망각이라는 자물쇠를 채워서 잠을 재우는 거지. 그런데 그 거울들은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내면을 비춰서 자물쇠를 풀고 그 방 속에 잠들어 있는 모든 힘들었던 기억들을 한꺼번에 깨운 것 같아. 어쩌다 하나씩 들여다봐도 감당하기 힘든 그 기억들을 한꺼번에 보게 만든 거지.”


“교수님은 어떤 기억을 보셨어요?”


“음…. 이것저것 모두 뒤죽박죽이 되어버려서….”


“희한해요. 저도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 아무튼 여긴 혜린 언니의 책 속이잖아요. 그 언니를 만나러 가는데 왜 이런 것들을 대면해야 하는 거죠? 왜 남의 책 속에서 내 이야기를…. 앞으로 뭐가 또 나올지 무서워요.”


“후… 책 속의 빈 페이지들을… 우리의 기억들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오라는 것일까?…”


“어디로 오라는 거죠 대체? 참, 또 질문이 생겼어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 다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까 떠오른 그 기억들…. 생각해 보면 걔네도 나의 일부잖아요. 방에 가두고 잠을 재워도 이렇게 언젠가 밖으로 기어 나와 기어코 내 앞에 서는…. 그럴 바에야 제대로 대면해야 할까요 피하지 말고? 아니면 비겁하지만 또 가둬야 할까요? 내가 살기 위해서?”


“… 둘 다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대면할 용기, 외면할 용기. 각각 그때가 있지 않을까?”


“외면할 용기라…. 하긴 그곳에서 계속 대면하고 있었다면 미치거나 거울에게 잡아먹혔을 것 같고, 그렇다고 외면하고 빠져나온 것을 용기라 부르기엔…. 아 어려워요. 교수님 수업시간 같아요.”


“하하, 졸리기 전에 그럼 가 볼까요? 인디아나 박사님.”


피교수는 오렌지 빛 안개를 헤치며 성큼성큼 앞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민주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부러워했던 아빠의 어깨가 다시 떠올랐다. 민주는 기억나는 아빠의 어깨가 없었다. 혹시 생각난다 해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 사람의 어깨는 목말을 태워주긴커녕 자신과 엄마를 팽개치고 배신한 어깨였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이 기억하는 아빠의 얼굴은 눈코입이 없는 달걀귀신같은 허연 동그라미였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그를 자신의 어두운 방에 가두었기 때문일까? 사랑받지 못한 상처가 너무 아파서 그의 존재조차 외면하고 싶기 때문일까? 앞서 걸어가는 피교수의 뒷모습을 보면서 늘 앞장서 걸어가던 아빠의 모습이 겹쳐졌다. 어린 그의 눈에 그는 거대했다. 커다란 갈색 구두, 구겨진 양복바지, 담배 연기와 스킨이 합쳐진 매캐한 향기. 그는 기관차처럼 연기를 뿜으며 성큼성큼 앞서 나갔고, 어린아이는 붐비는 행인들 틈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릴까 봐 목이 메었다. 아빠는 걸음을 멈추고 기다려주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언제인지 모를 그날의 기억은 단 한 장의 아버지 사진으로 민주의 마음에 박제되어 있었다. 그래도 민주에게는 자신의 손을 놓지 않은 엄마가 있었다. 일이 힘들어 밤마다 끙끙 앓으면서도 새벽마다 자고 있는 자신을 깨워 따뜻한 우유를 먹여주는 엄마가 있었다. 아빠 없는 애라고 놀리는 애들을 쫓아가 동네가 떠나가도록 혼내주던 우리 엄마….


안개는 바닥부터 점점 짙게 깔려 가슴까지 차올랐다. 안개 낀 거리를 민주가 그 엄마의 손을 새삼 꼭 붙들고 걷고 있다. 그는 웃으며 엄마를 올려다본다. 안개 사이로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가 다정하게 자신을 돌아본다…. 그런데 그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민주는 깜짝 놀랐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민주는 얼른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다가 지나가는 행인에게 부딪혀 넘어졌다. 일어나 보니 아빠도 엄마도 보이지 않는다. 안개 사이로 바삐 오가는 행인들에 치여 민주는 가려던 방향도 잃어버렸다.


행인들 사이에서 아는 얼굴들이 보였다. 초등학교 친구들이었다. 반갑게 그들에게 뛰어가서 말을 거는데 그들은 멀뚱히 그를 바라본다. 모르는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자기들끼리 안갯속으로 사라진다. 책상에 앉은 학생들과 선생님이 열차처럼 다가온다. 자신의 고등학교 교실이다. 민주는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으려고 하는데 빈자리가 없다. 교실은 달리는 기차처럼 자신을 버려두고 지나쳐버린다.


뒤에서 낯익은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린다. 대학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다. 그들을 돌아보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이름을 부르려 하는데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다. 두 팔을 뻗어 붙들어보려고 했지만 이들은 민주의 손끝을 스치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지나간 오렌지빛 가로등 아래서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 예쁜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그 사람은 분명히 민주가 잘 아는 사람인데, 그래서 심장은 마구 고동을 치고 있는데 누구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민주는 그를 향해 달려간다. 아무리 달려도 그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그의 몸은 점차 투명해지다가 안개가 되어 흩어져 버린다. 피교수는 안 보이고, 기억 속 인적은 모두 사라지고 이제 민주는 안갯속에 혼자 남겨져 있다. 민주는 마른 숨을 꺽꺽 쉬면서 자신에게 필사적으로 말을 걸었다.


“내 이름은 김민주…  피교수님… 언니는 아이… 나는… 김민… 교수?… 무슨 언니…?... 난…”


민주는 몽롱해지는 머릿속을 필사적으로 뒤졌다. 이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기억의 책장들을 아무리 뒤져도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나’라는 마지막 한 글자가 지워지자 민주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몽유병 환자처럼 걷기 시작했다. 의식이 떠나간 듯, 두 눈에는 초점이 사라졌고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방향도 목적도 없이 안갯속을 표류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주변에 잿빛 동상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보였다. 기억과 사고가 텅 비어 백지가 되어버린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는 걷는 목적도, 움직일 이유도 남아있지 않았다. 인형의 태엽이 다 풀린 것처럼, 어떤 이는 마지막 발걸음 뗀 채로 멈춰버렸고, 어떤 이는 바닥에 웅크린 자세로, 어떤 이는 절규하듯 손을 뻗은 채로 동상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쩍 하고 동상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개 사이로 부서진 동상의 머리와 쓰러진 몸통들이 힐끗힐끗 보였다. 민주는 계속 걸었다. 의식의 수면 깊은 곳에서 본능적인 충동이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민주는 그렇게 기억을 잃어버린 태엽인형들의 마지막 종착역인, 동상들의 무덤에 도착했다.


코끼리의 무덤처럼 서로를 포옹하듯 겹겹이 뒤엉켜 포개진 동상들의 거대한 언덕. 껍데기만 남은 그들의 형체는 서서히 재로 돌아가고 있었다. 동상들의 무덤 사이를 걷던 민주는 쩍 소리를 내며 뒤에서 무너져 내리는 몸통들에 떠밀려 잿빛 더미 위로 엎어졌다. 그만 멈추고 잠들자는 듯이 그의 목 위로 누군가의 팔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뭔가에 이끌리듯 팔 조각을 떨쳐내고 일어나 그 언덕 위로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삐죽 나온 팔이, 함몰된 얼굴이, 조각난 몸통들이 재처럼 바스러졌다. 발 밑에 느껴지는 그 부드러운 회색 재들의 감촉은 포근한 이불처럼 민주를 영원한 잠으로 유혹하고 있었다. 움직이고자 하는 충동은 점차 사라지고 자석 같은 이끌림은 그 방향을 잃어버렸다. 그의 다리는 점점 무거워지고 몸은 잿빛 땅 위에 누울 듯이 기울고 있었다. 민주가 간신히 마지막 한 발을 내디뎠을 때 비죽하게 튀어나온 자전거 핸들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그 바람에 얼기설기 뒤엉켜 있던 동상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갑자기 생긴 내리막 길로 민주와 자전거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굴러 내려갔다. 동상들의 얼굴과 몸통을 온몸으로 훑어내려 가면서, 먼지 같은 기억의 편린들이 민주를 때리고 지나갔고 그 진동으로 그의 가슴속에서 반딧불 같은 희미한 불빛이 켜졌다. 휘어진 바퀴로 뒤뚱거리며 앞서가는 자전거의 희미한 헤드라이트는 재가 눈처럼 날리고 있는 뿌연 앞길을 비추고 있었다.

어느새 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온 것처럼 그는 땅에 엉덩방아를 찧었고, 자전거는 삐그덕 소리를 내며 갈지자로 비틀거리다가 따릉 소리를 내며 힘없이 땅에 누워버렸다.


자전거의 헤드라이트 빛 끝에 동상 하나가 보였다. 민주는 네 발로 그 동상을 향해 기어갔다. 그의 손가락과 무릎은 잿빛으로 변해 갈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자전거 불빛이 꺼짐과 동시에 동상 앞에서 도달한 민주는 희미한 오렌지빛을 받으며 서있는 그를 올려다봤다. 용케 이곳까지 온 그 동상은 몸을 숙인 채 누군가를 업고 가는 듯한 모습으로 굳어 있었다. 허공을 받쳐든 두 손은 하도 굳게 깍지를 끼고 있어서 실금이 잔뜩 생겨있었다. 민주는 끈 하나에 매달린 인형처럼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 동상 앞에 섰다. 움직이기를 멈춘 민주의 몸이 시멘트처럼 굳어가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동상의 얼굴을 응시했다. 동상과 자신의 몸에서 퍽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민주가 반사적으로 그 동상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이리저리 뒤뚱거리며 그 등 뒤에 올라탔다. 동상의 깍지 낀 두 팔이 그 사이로 다리를 넣은 민주의 몸을 받쳐주고 있었다. 다시 퍽 하고 동상의 어깨가 갈라졌다. 민주는 잿빛으로 변한 두 팔을 그의 목에 둘렀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민주의 눈이 감겼다. 잠시 후, 그의 입이 달싹거리다가 열리고 숨결과 같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후우…


….


후우…


….


아….


빠….


….


아빠…”


쿠욱 하는 둔한 소리와 함께 동상의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갈라진 어깨와 몸의 금들이 사라지고 잿빛의 얼굴과 손은 생기를 얻어 살결의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가 눈을 떴다. 동상이 되었던 피교수가 다시 살아나 고개를 들고 걷기 시작했다. 민주의 굳은 몸도 피가 돌기 시작하고 살빛이 되살아났다. 안개는 서서히 물러나고 이들이 걷고 있는 터널의 저편 끝으로부터 한줄기 환한 빛이 흘러들어왔다. 피교수의 등에 업혀있는 민주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생기를 되찾은 피교수는 터널의 출구를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딛으며 훌쩍거리는 민주에게 말했다.


“민주 깼구나.”


“혼자 멋대로 사라지고, 혼자 맘대로 잠든 게 누군데요 씨.”


“하하. 그랬나? 미안. 사과의 의미로 함께 노래할까?”


“에? 설마 또…?”


피교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시작했다. 민주는 눈물을 훔치고 피교수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노래를 함께 불렀다.


“어깨 위로 후우~ 목말 타고 후우~  


하늘 위로 쑤욱~ 구름 위로 쑤욱~”


슬픔의 강 아케론과 같았던 긴 거울 복도, 그리고 망각의 강 레테와 같았던 안개의 터널, 마치 저승으로의 여정과 같은 우여곡절을 겪은 두 사람 앞에 나타난 것은 뜻밖에도 그들에게 가장 익숙한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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