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교수와 민주 앞에는 백양대학의 캠퍼스가 펼쳐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백양대를 그린 그림이었다. 텅 빈 여백의 하늘 아래에 거친 연필 자국의 밑그림과 목탄으로 밀도를 채운 흑백의 백양대 안으로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이들이 나온 곳은 귀신의 절벽이었다. 절벽 밑 해변에는 목탄으로 그린 파도가 거세게 일고 있다. 그 위를 날고 있는 한 두 마리의 갈매기도 보였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색과 질감으로 충만한 현실의 공간이 이차원적인 흑백의 선과 여백으로 대체된 이곳을 둘러보며 두 사람은 낯선 친숙함에 당황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피교수가 탄식을 쏟아냈다.
“어 이건…”
절벽 끝에 연필로 그린 동성이의 신발이 보였다. 민주도 생경한 흑백의 풍경에 어리둥절하며 주변을 돌아본다.
“교수님, 우리 학교로 돌아온 거 맞죠?”
“글쎄다… 혜린! 혜린아!”
“아이린 언니! 혜린 언니!! 어디예요?!”
메아리가 사라질 때 즈음 바람 같은 속삭임이 들려왔다.혜린의 목소리. 민주의 실망 어린 탄식.
“아…”
“오세요… 그곳….”
“야외극장…. 민주야 가자.”
두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목탄으로 그린 굽어진 해송들과 바위, 숲 속을 지나운동장으로 나오자 먼발치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집트 벽화처럼 이차원으로 그려진 그는 공을 몰고 있었고, 제 자리에서 그의 팔과 다리가 마치 종이 인형극처럼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피교수는 하! 하고 혀를 찼다.
“이거 왠지 교수님 닮았는데… 맞죠?”
피교수는 끄덕이며 연필로 그려진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발로 공을 건드려본다. 공은 움직이지 않고 대신 검은 가루가 흩어진다. 피교수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공 모양을 매만진 후에 물러섰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운동장을 빠져나와 광장 쪽 길로 접어들었다. 가스등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있는 노인이 보였다.
“교수님, 저 할아버지랑 얘기해 본 적 있으세요?”
“아니, 말이 없으시잖아 원래…”
“저분이… 이 대학 설립자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일제 시대에 간호학교를 세운? 에이 그건 말이…”
“진짜예요. 간호대 그 다락방 있잖아요. 그게… 어!”
민주는 말을 마치기 전에 앞으로 달려 나갔다. 몇몇 학생들이 걷고 있다. 뒤미처 따라간 피교수는 민주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민주가 보고 있는 것은 친구들과 자신의 그림이었다. 한 친구는 자전거를 끌고 있다.
“인석이 자전거… 이거… 어제, 아니 그날 밤 우리들이에요. 송희야! 얘들아! 다들 괜찮은 거지?… ”
그들은 운동장의 피교수와 마찬가지로 종이인형처럼 느릿느릿 고개를 서로 까딱거리고, 손짓을 반복하며 제 자리에서 걷고 있다. 민주는 못내 아쉬운 듯 자리를 뜨며 뒤를 돌아봤다.
어느덧 이들은 광장으로 접어들었다. 아무도 없는 광장은 을씨년스러웠다. 분수에서는 목탄가루가 만들어낸 물이 소리 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야외극장 쪽으로 접어들었다. 늘 앉아있던 그 자리에 등을 진 혜린의 모습이 보였다. 피교수와 민주는 계단을 내려가 그림 속 혜린의 앞에 섰다. 저만치에서 그림 속 누군가가 마리오네트처럼 까딱까딱 다가와 혜린 옆에 앉았다. 연필로 그린 피교수였다. 혜린의 무릎에는 두툼한 책이 펼쳐져 있고 그는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빈 책장 위로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그림 속 피교수는 고개를 직각으로 돌리기를 반복하며 혜린과 책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민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이거 어디서 본 장면 같은데….”
민주는 피교수를 돌아봤다.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던 그에게서 신음처럼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이카보드(Ichabod)…”
“네?”
“낭패로구나….”
바람결 소리가 같은 혜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오셨군요.”
피교수가 사방을 둘러보며 혜린을 찾았다.
“어딨니? 혜린아, 어디 있는 거야?”
“바로 앞에 있잖아요.”
“아니… 이건… 그냥 그림이잖니…”
“아뇨. 잘 보세요. 찬찬히…”
피교수는 혜린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연필로 입체감 없이 슥슥 그린 긴 머리와 눈, 코, 입. 딱히 자세히 볼 것이 없는 만화 같은 스케치였다. 답답해진 피교수는 옆에 있는 민주를 힐끗 돌아봤다. 그 역시 혀를 살짝 깨물고 미간을 찡그린 채 그림에 담긴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민주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어 그림을 만지려는 순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제가 너무 못 그렸나요? 저 닮은 것 같은데…”
“아 뭐야!”
혜린은 고개를 까딱 돌려 민주를 돌아봤다.
“민주씨, 고마워요. 많이 힘들었죠?”
“네 아주 많이! 대체 우리가 지나온 그 거울방이랑 터널은 뭐죠? 아주 죽는 줄 알았다고요.”
“그와 비슷한 경험이었을 거예요. 우리가 있는 곳이 너무 달라서…. 위험하지만 그 방법밖에 없었어요.”
“아… 근데 언니…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암튼 언니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게 진짜 많았는데, 근데 이렇게 그림이시고, 아 이젠 뭘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조급해진 피교수가 끼어들었다.
“혜린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왜 갑자기 사라진 거야? 그리고 왜 이런 그림 속에서 만나야 하는 거지? 여긴 어디고 진짜 넌 어딨는 거야?”
“지진이 났을 때, 키쿠들이 저를 습격해서 끌고 갔어요.”
“키쿠라면 그 기분 나쁘게 웃는 괴물들 말하는 거죠? 언니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타난? 그리고 간호대 지하에서 우릴 공격했던?”
“맞아요. 그리고 계단을 뛰어내려올 때 민주씨 발목을 잡았던 것도 키쿠였죠. 제 몸이 그들에게 삼켜지면서 잠시 그들과 동화되었고, 그 키쿠가 닿았던 민주씨를 그래서 찾을 수 있었던 거예요.”
“삼켜져? 동화돼? 그게 무슨 뜻이야?”
피교수가 놀라서 물었다. 혜린은 선으로 가늘게 그려진 두 어깨를 으쓱하면서 가볍게 받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이죠.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요. 지금은 이 그림이 혜린이랍니다.”
“이 세계라면, 뭐 저 세계도 있단 말인가요? 그럼 언니는 뭐 외계인이에요?”
“후훗 그런 셈이죠?”
“대박.”
“혜린아, 그렇지만 네 책이 있으면 널 다시 데려올 방법이 있는 거 아니냐? 그래서 이 책을 찾아달라고 한 거 아니야?”
혜린의 스케치는 자신의 무릎에 놓인 책으로 고개를 까딱 숙였다.
“이 책은… 제 것이 아니라 교수님의 일기예요. 백양대에 오신 이후 모든 기록이 여기 담겨있어요. 물론 이 두꺼운 책이 아니라 수십 권의 공책을 남기셨죠. 뭐 일기라기보다는 교수님의 관점에서 쓴 백양대의 연대기랄까… 학교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셨어요. 강의실, 학생들, 그리고 학교의 풍광을 많이 좋아하셔서 시간마다, 계절마다 캠퍼스 이곳저곳, 일상에 대한 생생한 스케치가 많았죠. 그 글들을 읽노라면 교정을 교수님과 함께 걷는 느낌이었어요.”
“잠깐, 그게 어떻게?”
“제 손에 들어왔냐는 말씀이시죠?… 이렇게 제 손에 남기고 떠나셨으니까.”
“떠나? 내가? 난 백양대를 떠난 적이 없어.”
“네, 그리고 머물지도 못하셨죠.”
피교수는 더 묻고 싶었으나 두려워졌다. 마치 동성이의 존재를 확인하려 하면서도 동시에 달아나고 싶었던 것처럼, 여기서 질문을 한 번 더하면 그때보다 더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 문을 열고 튀어나올까 봐 그는 본능적으로 말을 돌렸다.
“그럼… 글을 쓰고 있던 게 아니라 정말 읽고 있었던 거였어?”
“읽기도 하고 쓰기도 했죠. 교수님은 무엇이든 마치 현장을 들여다보듯 꼼꼼히 기록하셨지만 사실 내용은 평범했어요. 소소한 하루의 일과, 수업과 학생들, 동료 교수들 근황, 기억에 남는 대화들, 교수님이 보고 들은 학교의 재미난 일화들과 기담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나 고민의 흔적들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런데… 어느 날부터 글들의 내용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글자들이 저절로 바뀌었다고요? 대박!...”
“그래요 민주씨. 처음엔 나도 믿기지 않았어요. 마치 교수님이 내 앞에서 일기를 새로 덮어쓰고 있는 듯한…. 어떤 것은 사소한 수정이었지만 어떤 것은 완전히 생소한 것들이었어요. 새로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잃어버린기억들을 되살리기 시작했죠.
“동희와 동성이, 성빈이, 재현이…?”
“네. 그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각성…. 그때 저는 필사적으로 교수님의 생각을 막기 위해 노력했어요. 일기 내용을 원래대로 되돌려 쓰면서 한편으로는 동성이가 한동안 나타나지 못하도록 분기가 나타날 때마다 지웠고, 교수님이 일상의 안전함에 안주했던 날들을 떠올리게 해서 더 이상 모험을 하지 않도록 유도하기도 했죠. 그런데 소용이 없었어요. 깨어난 의식은 새로운 이야기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그리고 소멸되었던 기억들, 묻혀 있던 과거의 모든 사람들이 각성해서 함께 살아났어요. 그리고… 마침내 그 때문에 그날이 온 거죠. 파멸의 시작. 그 지진의 날이….”
“잠깐만요. 교수님의 일기장이 지진과 무슨 상관이죠?”
“미안해요. 제가 너무 앞서 나갔네요. 모든 것은 이렇게 시작되었답니다. 하늘을 보세요.”
구름으로 윤곽이 그려진 백양대의 하얀 하늘이 밤하늘의 은하수로 바뀌었다. 그리고 반딧불 같은 무수히 작은 불빛들이 은하수 물결처럼 고요히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저 파도 같은 불빛들은 하나하나가 인간의 영혼이에요, 생을 마친….모두가 정든 육신을 떠나 잠시 잠들어있죠. 요람에 담긴 아기처럼. 이승을 떠난 모든 인간은 저 영혼의 강에 잠들어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 그날을 향해 저렇게 고요히 흘러가고 있는 거예요.저기….”
혜린은 불빛들 중 작은 하나를 가리켰다. 갓 생겨난 작은 불빛이 한 바퀴 맴돌다가 서서히 흘러간다.
“저 불빛이…”
“나….”
“설마 교수님이… 말도 안 돼!”
민주는 고개를 저으며 피교수를 돌아봤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말없이 자신의 불빛을 응시하고 있었고, 혜린도 침묵했다.
맥박 소리에 반응하듯 피교수의 불빛은파르르 떨다가 흘러가기를멈춘다. 멈춰 선 불빛은 작게 진동하며 어둠에 묻혔다가 떠오르기를 반복한다.마치 물 위로 솟은 작은 돌이 물결을 일으키듯 주변의 불빛들이 그 멈춰 선 불빛 때문에 옆으로 비껴가기 시작했다. 작은불빛은 그 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빛난다.
혜린의 잔잔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죽음은 교수님을 놓아주지 않았지만 데려갈 수도 없었어요. 영혼의 잠에서 깨어난 교수님은갓 태어난 아기처럼 새롭게소리를 내고 말을 걸기 시작했답니다. 믿기 어려웠지만, 전 너무 기뻤어요. 그날, 일기를 읽고 있던 저에게 생생하게 들려온 음성…
'어이 혜린이…'
새롭게 쓰인 그 한 조각 문장. 눈을 들어보니 저는 어느새 백양대 야외극장에 앉아있었어요. 글자로 읽었던 파도 소리가 귀에 들려왔고 바다에서 몰려오는 오렌지 빛 안개가 눈앞에 펼쳐졌어요. 그리고 이렇게 교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죠.”
그림 속 혜린은 고개를 까딱 돌려 옆에 앉은 피교수와 눈을 맞춘다.
“그냥 지나친 날도 많았는데….”
“히….”
민주는 문득 항상 앞에서 걸어가던 아빠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하나의 짧은 문장이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가 더 많은 기억을 살려냈답니다. 결국 교수님은하나 둘 이생에서 자신과 연결된 모두를 깨우기 시작했고, 인간과 망자들의 수많은 새로운 분기가 함께 살아났어요, 이를 위협으로 감지한 키쿠는 총력을 다해 교수님의 의식 속, 이 백양대로 파고들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그들은 단순한 괴물이 아니랍니다. 저 영혼들이 순행하고 있는 질서를 지키는 영계의 감시자들이죠. 이들은 아무런 지적이나 도덕적인 판단을 하지 않아요. 마치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백혈구처럼 영혼의 순행을 위협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 존재하는 감시자죠. 저렇게.”
멈춰 선 피교수의 불빛이 점점 밝아지며 커지자, 사방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들이 모여들어 소용돌이처럼 원 주위를 에워쌌다. 어느덧 불빛은 큰 암초처럼 많은 불빛들의 진행을 가로막고 있는 심각한 장애물이 되었다. 길이 막힌 불빛들은 좌우로 비껴나가 방향을 잃고 속도를 바꾸는 등 무질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소용돌이로부터 수많은 촉수들이 뻗어 나와 원 경계를 때리고 부딪히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튕겨 나갔고 그중 가장 작은 촉수 하나가 마침내 원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저 순간 기억하세요? 태풍이 오던 9월 어느 날 저녁, 교수님은 연구실에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멍하니 보고 있었죠. 그날의 일기는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이상하다. 한 학생의 얼굴에서 옛날 학생의 얼굴이 자꾸 겹쳐 보인다. 너무 많은 학생들을 가르친 탓일까? 옛날의 그가 다시 나를 찾아온 듯한 이 이질적인 느낌…'
교수님은 여느 때처럼 조교와 커피를 마시고 태풍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퇴근한 내용이 전부였어요. 그날, 저는 그림 속 화가의 눈으로 교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죠. 그런데 교수님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지만 눈동자는 계속 캔버스에 숨겨진 무언가를 찾고 있었어요.저는 간절히 바랐죠. 라디오 소리, 창문을 때리는 바람 소리, 조교가 시험지 넘기는 소리, 무엇에라도 주의를 빼앗겨 생각을 멈추기를 기도했어요. 그런데 교수님의 눈이 빛나며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어요. ‘그래 너야, 너였어....’ 그 순간 제 귀에는 키쿠들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울렸어요. 창문이 활짝 열리고 비바람이 들이친 그순간은, 각성의 진동이 만들어낸 찰나의 균열을 뚫고 첫 번째 키쿠가 침투한 순간이었답니다.일기에는 지진에 대한 기록이 없어요. 하지만 교수님이 동성이를 만나 그를 완전하게 기억하게 된 그날 새벽, 이 세계에는 거대한 분기와 팽창이 일어났어요. 이 틈을 타서 경계 밖을 맴돌던 모든 키쿠들이 곳곳이 갈라진 보호막을 일제히 뚫고 들어왔고, 그 충격으로 지진이 백양대를 뒤흔들었죠. 이제 그들은 우리 모두가 소멸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예요. 파멸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죠.”
하늘에 떠 있는 피교수의 불빛은 검은 촉수들로 뒤덮여 점차 빛을 잃어갔다. 몇 번 밝게 깜빡이던 불빛은 촛불처럼 떨리더니 암흑 속으로 삼켜졌다. 영혼의 강물은 다시 질서를 찾고 불빛들은 고요히 흐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민주는 분한 목소리로 혜린에게 항변했다.
“잠깐만요. 이건 아니죠. 전 살아있거든요. 교수님의 의식 속에 남아있는 기억이 아니라, 스물두 살 김민주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거든요. 제 친구들도 모두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거든요! 그 일기장에 성민이 얘기가 써져 있나요? 아이린 언니 얘기가 쓰여있던 가요? 우리는 교수님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 아니라 우리 의지, 우리 인생이 있는 진짜 사람들이라고요!”
“민주씨, 맞아요. 교수님이 원래 기록한 민주씨 이야기는 단편적인 언급밖에 없었답니다. ‘재미있는 학생, 수업을 왠지 즐겁게 만드는 학생. 그리고 젊은 날 그녀와 참 많이 닮은…’ 네, 그 정도의 호감이었어요.그런데 교수님이 각성한 이후로 그 어딘가의 분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자라나듯이 민주씨의 기록도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마치 민주씨가 자신의 일기를 쓰고 있는 것처럼. 난 아이린이라는 분과 성민씨, 그리고 송희, 연주, 경덕, 인석 네 사람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읽게 되었어요. 이제 이들은 또 다른 가지로 뻗어나가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겠죠. 그래서 아까 교수님의 의식이 자기 세계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깨우기 시작했다고 말한 거예요.”
“하지만 그건 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잖아요. 제 말은, 제가 누구의 일기장을 빌어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 없이도, 아니 그런 것과 상관없이 실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요.”
“미안해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일기장이 아니었다면, 민주씨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나도 민주씨를 만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이름을 알고 불렀을까요? 아이린 언니라는 사람의 이야기와 목소리, 노래까지 알 수 있었을 까요? 어떻게 교수님의 과거를 민주씨가 볼 수 있었을까요?”
“그건…”
반박할 수 없었다. 상식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그러나 부인할 수도 없는 이 악몽과도 같은 현실 앞에서 민주의 머리는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무력감과 함께 무작정 치미는 서러움에 눈물이 핑 돌았다. 피교수가 민주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충혈된 눈과 민주의 눈이 만났다. 민주는 피교수를 보며 울음을 꾹 삼킨 채 계속 따졌다.
“그럼 나는 뭐죠? 지금 여기 있는 나, 열흘 동안 저 밖에 돌아다니고 있는 나, 그리고 교수님의 기억 밖에서 원래의 나로서 살고 있는 나. 뭐가 진짜죠? 뭐가 진짜고 뭐가 그림자인 거예요? 어디까지가 일기 속의 나고, 어디서부터가 진짜 나냐고요? 그럼 나도 죽음이 붙들고 있는 건가요? 교수님처럼 나도 의식만 남은 거예요?”
“그건 스스로 답을 찾게 될 거예요 민주씨.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어떻게요? 힘센 언니도 키쿠에게 당해서 그림이 되어버렸고, 우리도 곧 소멸될 거라면서요? 파멸의 시간이라면서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으라는 거죠?”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피교수의 쌓였던 답답함과 억울함이 터져 나왔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나도 기억나지 않는 일기장의 내용과 나의 죽음, 깨어난 의식. 다시 그 의식을 집어삼키는 파멸, 그런데 아직 끝난 게 아니라니… 이걸 네가 어떻게 네가 다 알고 있는 거니? 아니… 넌 누구지? 혜린이가 네 이름이 맞긴 한 거니? 우리가 왜 네 말을 다 믿어야 하는…”
“아빠의 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지금도 내 옆에서 싸우고 있으니까요.”
“아빠?”
민주와 마주친 피교수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혜린의 발치에는 모래로 거의 가려진 글자 끝이 살짝 보였다. 피교수는 무릎을 꿇고 혜린의 발밑 모래를 파헤친다. 검은 모래들이 흩어지고 연필로 그린 네모 칸이 드러났다. 민주가 그 안에 쓰인 글씨들을 소리 내 읽었다.
“'아빠와 나’…?”
피교수는 무릎을 꿇은 채로 그 글씨를 뚫어지게 노려본다. 민주는 인사도 없이 떠나간 아버지 생각이 겹쳐져 마음이 시려왔다. 피교수는 떨리는 손으로 아픈 아기를 만지듯 글씨들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피교수의 그림이 혜린의 손을 잡는다. 세 사람이 함께 걷다가 엄마가 스륵 혜린의 손을 놓고 풍선처럼 공중으로 떠올라 빙글빙글 돌며 하늘 위로 올라가 사라진다. 피교수는 물끄러미 하늘을 보다가 엄마를 찾는 혜린을 업고 걷는다. 혜린은 어느새 아빠 등에서 폴짝 뛰어내려 주변을 뛰논다. 아빠와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도는 혜린의 몸이 점점 자라고 등에는 날개가 돋아난다. 원을 돌던 혜린의 발은 공중에 떠 있고 두 사람은 잡았던 손을 놓는다. 날개 치며 공중으로 날아오른 혜린은 피교수 머리 위를 한 바퀴 빙글 돌고 손을 흔들며 비행기가 되어 먼 수평선너머로 사라진다. 피교수만 덩그러니 홀로 서있다.
그는 서서히 바다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피교수는 일어나 그림 속 자신을 따라가려 하지만 이때 하늘에서 연필로 그린 눈의 결정들이 휘몰아쳐 그의 앞을 막는다. 그는 눈송이들을 헤치며 서서히 바다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자신의 희미한 윤곽선을 눈으로 뒤쫓는다. 그림 속 피교수가 소리 없는 파도 속으로 사라진 후에 어린 혜린의 속삭임이 바람결에 실려 다시 쓸쓸히 들려온다.
“그리고 나…”
피교수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아빠와 딸의 정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솜사탕 후우~ 솜사탕 후우~
몽실몽실~ 푸우 뭉게뭉게….
거센 파도에 얻어맞은 듯 그의 가슴은 숨이 막히고 머리가 아득했다. 그 충격은 곧 아픔으로, 아픔은 쓰라림으로, 형언할 길 없는 슬픔으로 돌아와 다시 후려쳤고 그는 커억커억 숨찬 울음을 토해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찾아갈 때마다 그리웠구나. 그렇게 뭉클하고 가슴이 시리곤 했구나. 그 자리를 떠나기가 아쉬워 그렇게 돌아보고 또 돌아봤구나. 그는 그림 속 혜린을 부둥켜안고 소리 없이 통곡을 했다. 눈물과 콧물이 혜린의 얼굴과 어깨에 범벅이 되어 번져 내렸다. 민주는 충혈된 눈으로 시선을 돌려 물끄러미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혜린이의 차분하지만 명랑한 음성이 또렷이 들려왔다.
“저 지워져요… 히히.”
“혜린아, 미안하다…. 내가 너무 미안해….”
“아빠, 제 이름은….”
순간 강력한 진동이 울려왔다. 피교수와 혜린을 그린 선들이 흔들리며 사이렌 같은 비명 소리가 흑백의 캠퍼스에 울려 퍼졌다. 피교수는 다급하게 외쳤다.
“혜린아 괜찮아?”
“놈들이 왔어요.”
피교수는 안 주머니에서 출석 체크용 펜을 꺼내 허공에다 대고 미친 듯이 뭔가를 그린다.
“교수님, 뭐 하세요?”
“여긴 그림 속이잖아. 총을 그리면 총이 나오겠지. 수류탄이 더 좋을까? 그래, 놈들이 불엔 약하니까 화염 방사기? 이거 왜 안 그려지는 거야!”
“아빠, 이제 가세요.”
“널 두곤 못 간다. 다시는 널 두고 가지 않을 거야!”
“맞아요. 나도 그 터널로는 죽어도 돌아가지 않을 거야. 교수님, 빨리 뭐라도 그려서 줘봐요.”
“이게 잉크가 다 됐나?”
“아 교수님!”
“그들은 절 더 해칠 수 없어요. 키쿠가 노리는 것은 아빠예요.”
“싫다. 안 간다. 여기마저 뺏기면 널 또 잃어버리는 거잖아. 네버(never), 네버, 네버!”
“저를 위한다면 가세요. 그래야 우리 모두를 구할 수 있어요. 어서요!”
피교수의 품에서 혜린의 머플러가 빠져나와 두 사람에게 가자는 손짓을 한다. 민주는 유심히 살핀다.
“또 널 버리고 도망치란 거니!?”
“헤어졌지만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요. 파멸이 와야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어서!”
“그게 무슨 말이니?...”
“쿠쿠쿠쿠쿠~”
키쿠들의 소음과 함께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림 속 세상이 뒤흔들리며 진동했다. 선의 윤곽들이 흩어지며 혜린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모래로 만든 형상이 파도에 씻겨 내려가듯이 손끝 발끝 머리끝부터 해체되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피교수의 그림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민주가 생각난 듯이 외쳤다.
“이건 그때 내가 본그 장면…”
머리와 어깨만 남은 혜린이 쾌활하게 작별인사를 남겼다.
“딩동댕 민주씨. 아빠, 잠시 안녕!”
“안돼, 혜린아!”
“돌아가세요. 그곳에 답이 있어요. 그리고 꼭 돌아오세요. 그때처럼.”
“가지 마, 혜린아…”
숨찬 호흡 같기도 하고 기계음 같기도 한 차가운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믿어요 아빠.”
거대한 검은 토네이도가 캠퍼스의 건물들을 날려 버리며 사납게 광장에 들어선다. 머리만 남은 혜린이가 명랑하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옆에 역시 머리만 남은 피교수의 그림도 즐겁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머플러는 양탄자처럼 두 사람 앞에 쫙 펼쳐진다. 민주는 피교수를 머플러 쪽으로 끌어당긴다.
“캔자스 시골 소녀 도로시는,
무서운 회오리바람 타고 모험 떠났죠.
눈을 감아요. 소원 빌어요. 은빛구두 뒤축 탁탁탁
집이 최고야!”
삐삐삐삐!!!
토네이도가 야외극장의 윤곽선을 밟자 날카로운 경고음과 함께 백양대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분해되어 날아갔다.혜린에게 가려던 피교수의 팔을 낚아챈 민주는 머플러의 끝을 잡았고, 머플러는 하늘로 치솟았다. 머플러에 매달린 민주와 피교수는 무수한 선의 조각들과 목탄 가루의 회오리바람에 실려 한 순간에 키쿠들의 촉수가 닿을 수 없는 텅 빈 하늘 너머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