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 거사 일주일 후. 야외극장에서 사복들에게 잡혀 끌려가던 인석, 송희, 연주, 경덕은 가까스로 탈출해 달아나는 중이다.
“송희야 나한테 업혀! 얼른!”
경덕이는 숨찬 목소리로 송희에게 등을 들이댔다. 뒤처져 있던 송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쪽 구두를 벗어던져버리고 경덕에게 업혔다. 다른 쪽 맨발은 이미 스타킹이 찢어져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인석이가 숨을 헐떡이며 손을 내저었다.
“야, 안 따라오는 거 같은데 숨 좀 돌리고 가자.”
“안 돼. 계속 가야 돼.”
경덕이는 송희를 업고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연주가 경덕이를 잡으며 말했다.
“송희가 피가 많이 나.”
“괜찮아 난…”
“아니야. 일단 길에서 벗어나자. 저쪽으로.”
일행은 샛길로 빠져 담벼락을 따라가다가 움푹 파인 내리막 아래로 내려가 몸을 숨겼다. 경덕이는 송희를 내려놓고 자신의 점퍼를 벗어 밑에 깔아줬다. 연주는 경덕의 부축을 받아 치마를 조심스럽게 여미며 그 위에 앉았다. 연주는 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펼치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송희의 발을 싸매기 시작했다. 인석이가 땀을 닦으며 아까 상황을 떠올렸다.
“야 근데 그 짭새들은 갑자기 왜 그런 거야? 경덕아 네가 해치운 거야?”
“아니.”
“아 난 네가 한 놈씩 파박~ 특공 무술로 작살낸 줄 알았지.”
“미안하다.”
경덕이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내밀고 누가 따라오지 않는지 살피고 있었다. 송희가 발을 만지며 말했다.
“근데 아까 기분 나쁜 웃음소리 같은 게 들리지 않았어?”
“그니까, 맞을까 봐 뒤도 못 돌아보고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면서 가는데… 이번엔 우웩 토하는 소리가 들리더란 말이지. 그래서 돌아보니까, 어떻게 다섯 놈이 다 배를 잡고 그렇게 구부리고 있냐. 하하~ 그 와중에 우리 천사 같은 송희는 ‘괜찮으세요?’ 하하하~. 근데, 근데 연주가 그중 한 놈 엉덩이를 냅다 걷어차곤, ‘얘들아 뛰어~’ 그러니까 송희가 뛰다가 갑자기 휙 돌아서 그놈들에게 ‘죄송합니다’ 하면서 이렇게 배꼽 인사를… 하하하하~.”
“쉿.”
경덕이가 인석이에게 눈치를 줬다. 연주는 응급조치가 끝난 송희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경덕이가 송희에게 다시 등을 내밀었다. 인석이가 물었다.
“근데 경덕아 어디로 갈 건데?”
“일단… 학교 밖으로 나가자.”
“해봤잖아 그건. 얘 업고 몇 시간 걷다가 다시 교문이 나오면 어떡할 건데?”
“그래도 시도해 봐야지.”
“따돌렸으니까 이제 괜찮지 않을까? 학교 안에 있어야 민주도 찾을 수 있고….”
“송희야 정신 차려. 그 놈들은 우리가 누군지 알고 있었어. 우리가 대자보를 뿌린 거 알고 있다고. 우리는 얼굴 없는 성자단인데, 얼굴이 이제 알려졌다고!”
“인석아, 그러니까 더도망가야지. 넌 미필이라 더 잡히면 안 되잖아!”
“아 씨발, 내가 그걸 몰라? 학교를 빠져나간다 쳐. 그런데 이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도망갈 데가 어딨는데!”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연주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어차피 승산 없는 싸움이었어. 하지만 지금 도망가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인석이가 자기 이마를 치면서 소리쳤다.
“누가 안 싸운대? 싸웠잖아? 이 지경이 되도록 싸웠잖아. 승산 없는 싸움이라며? 이길 수 없는데 왜 계속 싸워야 하는 건데?”
“이길 수 없는 것과 싸우지 않는 것은 다른 거야.”
“아 돌겠네. 할 만큼 했잖아! 근데 아무것도 바뀐 게 없잖아! 뭘 더 바래?!”
“할 만큼? 네가 할 만큼 뭘 했는데? 성민이가 한 만큼 네가 한 게 뭐여?”
“연주야, 인석아…”
송희는 두 사람을 제지하려 했으나 연주는 송희의 말을 끊고 거친 전라도 사투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3년 전 광주에서 할 만큼 했던 사람들. 울 오빠, 내 친구들, 우리 선상님, 다 죽어부렸으라. 사람은 싹 다 같은 것인디, 다 귀한 것인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만큼 하다 보니 싹 죽어 부렸으라. 그게 할 만큼 한 것이여.”
송희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연주를 안았다. 경덕이는 고개를 숙이고 코를 훔쳤다. 인석이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 몰랐어… 난…”
“말하지 않았으니까. 괜찮아.”
연주는 다시 서울 말씨로 돌아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이때 경덕이가 무거운 음성으로 연주에게 긴 질문 아닌 질문을 던졌다. 아마도 그가 최근에 했던 말 중에 가장 길고, 가장 많은 단어를 구사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광주 사태 때 말이야, 전방은 계속 비상경계 섰거든. 대대장이 맨날 그랬어. 빨갱이들이 광주에서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고. 북에서 곧 밀고 내려올 거라고. 그게 다 거짓말인데, 사람들은 지금도 그걸 믿고 있잖아. 그리고, 그걸 지어낸 사람들이 성민이도 죽이고 또 거짓말을 한 거잖아. 내 말은, 왜 나쁜 놈들은 아직도 승승장구하는 거지? 무고한 사람들이 그 많은 피를 흘렸는데도 왜 세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거야?”
연주는 차분하게 답했다.
“바뀌었어 이미. 아직 보이지 않을 뿐이야. 그날이 오면 모든 게 새롭게 기록될 거야. 나쁜 놈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거야. 새날은 이미 약속된 거야. 우리 얼굴없는성자단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함께 결사대를 만든 그날, 함께 대자보를 붙인 날, 그리고 경덕이 네가 우리를 구하겠다고 놈들에게 맞서고 인석이가 우리를 구하겠다고 달려와 준 오늘, 세상은 이미 바뀐 거야. 놈들이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야.”
“뭔가 굉장히 감동적이다.”
인석이가 연주를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경덕이도 옆에서 끄덕였다. 송희는 울먹이며 말했다.
“민주 보고 싶어. 민주도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하는데… 오 성모님…”
송희는 어느새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네 사람은 잠시 눈을 감고 함께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마치고 성호를 그은 후에 송희가 말했다. 연주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말을 꺼냈다.
“흠흠, 이런 말은 좀 어색하지만 기도하면서 확신이 든 게 있는데 … 아까 야외극장에서 망설였던 건데…”
“괜찮아. 말해봐. 이 오빠가 들어줄게.”
인석이가 너스레를 떨었다. 연주는 싫지 않은 듯이 눈을 흘겼다.
“내 생일이 더 빠르거든. 암튼, 그 수배된 학생회장 있잖아. 지금 학교에 들어와 있어.”
인석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 이 시국에? 왜?”
“그건 몰라. 근데 그 형 영향력이 장난 아니거든. 우리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 같아서.”
경덕이가 물었다.
“어떤 사람인데?”
“이름은 장명훈이고 사학과 4학년 예비역이야. 그때 성민이랑 서울에 시위하러 갔을 때도 그 형이 우리 데려간 거였거든. 서울에 있는 대학 총학들이랑도 꽤 친분이 있더라고.”
“믿을만한 사람인 거 확실해?”
“경덕아, 그 형은 내가 보증해. 성민이가 제일 따른 선배였어. 내가 망설인 이유는 그 형이 못 미더워서가 아니라, 쫓기는 사람한테 도와달란 소리 하기가 좀 그래서였어.”
인석이가 정색하며 연주를 나무랐다.
“야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야? 그렇게 훌륭한 분이면 우리 성자단에 모셔야지. 학교에 들어와 있는 걸 보면 뭔가 비장한 각오를 하신 거 같은데, 안 그래 경덕아?… 야, 말 좀 해봐.”
“응… 근데… 이름이 좀…”
“이름이 왜?”
“지뢰 밟은 그 선임 이름이랑…”
“똑같아??”
“아니, 그 사람은 장병훈이었는데…”
“난 또…그럼 뭔 상관인데?”
“그렇긴 하네. 그래 한번 만나보자.”
송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연주의 손을 잡고 끄덕였다.
“그럼, 이 뒷길을 타고 사범대로 가자. 우리 동아리 방에 가면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송희야 업혀.”
“나 안 무거워?”
“당연히 무겁지! 얘 얼굴 하얘진 거 봐라.”
경덕이는 인석이에게 꿀밤을 먹였다. 송희는 다시 경덕의 등에 업히고 네 사람은 주변을 살피며 좁은 숲길을 타고 사범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옛날 나무꾼들이 다져놓은 이 외진 숲길은 은밀하게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들이 가끔 찾는 곳인데, 다행히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일행은 경사진 오르막 좁은 길을 빠르게 걸었고 송희를 업고 가는 경덕이는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경덕의 목에 흘러내리는 땀을 본 송희는 미안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
“경덕아, 나 내려서 걸어갈게.”
“안 돼… 너 피나고… 맨발이잖아.”
“야, 우리 경덕이는 진짜 젠틀맨이야. 기사도가 뭔지 알아 흐흐.”
인석이는 연주와 함께 앞서 걸으며 경덕이를 놀렸다. 연주가 갑자기 멈추며 손가락을 입에 댔다.
쉬이익.
모두 그 자리에 멈춰 자세를 낮췄다. 연주가 속삭였다.
“무슨 소리 들었지?”
“귀신 소리 아니냐? 여기 처녀 귀신 나온다던데.”
“뒤돌아보지 마.”
경덕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들 몸이 굳었다.
“그 소리야. 교문 앞에서 들었던.”
인석이가 사색이 되며 경덕을 꼭 붙든다. 송희와 연주도 경덕을사이에 두고 서로를 꼭 껴안는다. 정적. 인석이 속삭인다.
"이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간 거 아냐?"
경덕이는 긴장을 풀지 않는다.
"아직. 소리가 들려. 부르는 소리… ."
뭐? 그 지뢰밭처럼? 우리 다 죽는 거냐 그럼?
다들 인석이를 노려보면서도 가슴이 콩닥콩닥뛰기 시작할 때,
" 인석아!연주야!"
꺄악!!!
모두가 기함하며 반쯤 쓰러진다. 그런데 그 소리는 등뒤가 아니라 반대편에서 들렸다.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모두가 움찔하며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송희야! 경덕아!”
“어머, 민주 목소리야!”
송희가 경덕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려 앞서 달려갔다. 인석이가 송희를 말리며 소리쳤다.
“송희야, 잠깐. 저거 함정일 수도….”
경덕, 연주가 인석을 두고 달려 나갔다. 인석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친구들을 쫓아 달렸다. 네 사람이 숨이 턱에 차 오르막을 다 올라 사범대 앞길로 나서자 사범대 입구에 서 있는 민주가 보였다.
“민주야!”
송희가 달려가 민주를 껴안았다. 세 사람도 달려가 얼싸안았다. 인석이가 민주의 등을 두드리며 농담을 건넸다.
“야 김민주, 우리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죽다가 살아난 간난이 보는 기분이다 야. 누나, 나 누군지 알지? 영구야. 누나 동생 영구. 엉엉~.”
“야 영구를 욕보이지 마라. 그 아역배우 얼마나 귀여운데.”
민주가 인석이에게 눈을 흘긴다. 인석이가 다시 깐죽거린다.
“오 진짜 김민주 맞네. 근데 너 일주일 동안 대체 어디 있다…
“뭐 일주일? 잠 깨라 못 생긴 영구야!”
민주가 인석이의 뒤통수를 갈겼다. 인석이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머리를 굴렸다.
“그래 아니지, 일주일은 아닌데… 가만 내가 널 언제 본 거지?”
송희가 포옹을 풀며 민주의 볼을 잡고 홀린 듯 빤히 바라보다가 눈물을 글썽이며 답했다.
“바보. 아까 같이 잡혀가다가 헤어졌잖아. 아 민주야, 너만 더 험한 데로 끌려가는 줄 알았어.”
“어? 경덕아. 아까 민주가 같이 있었냐?”
“없었지. 아니 있었지… 아니 없었… 음… 지금 같이 있음 된 거지.”
“근데 너 우리가 여기 오는 줄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여기서 만나기로 했잖아, 왜 이렇게 늦었어 이 짱구야.”
민주의 답변에 인석이가 여전히 머리를 갸웃거리며 뭔가를 말하려 할 때, 주변을 살피던 연주가 빠른 말투로 상황을 정리했다.
“내가 민주한테는 회장 형에 대해서 미리 귀띔해 줬어.”
“나한테? 언제?”
“그게… 야외극장 가는 길이었나? 근데 민주야. 저 사람 너네 과 교수 아냐?”
연주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방향에 피교수가 서 있었다. 그는 멀찌감치 서서 이쪽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응 맞아. 여기 오다가 만났는데 계속 말을 거시더라고.”
“저 교수 왠지 자꾸 마주치는 거 같은데 학교 끄나풀 아냐?”
인석이가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민주는 당연히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뭔가 가물가물해지면서 자신이 없어졌다.
“그건 아닌 거 같은데….”
“무슨 얘길 했는데?”
-민주야, 정말 혜린이가 기억 안 난다고?
-아뇨... 우리 과 선배인가요?
-그럼... 키쿠는? 거울방은? 인디아나 존스는? '
-인디아나 존스야 짱이죠! 거기에 키쿠가 나오던가?
-이카보드... 그럼 동동이는?
-하하 동동주 좋죠! 그보다 교수님, 내일도 휴강인가요? 전 교수님 수업 재밌는데....
민주는 인석의 질문에 있는 그대로 답하려다가 자신에게도 잘 납득이 되지 않아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뭐 수업이랑 이것저것?”
연주가 낮은 목소리로 모두를 채근했다.
“빨리 들어가자. 더 이상 남들 눈에 띄면 안 돼.”
친구들은 민주의 팔을 잡고 사범대 입구로 향한다. 민주는 가다가 피교수를 뒤돌아본다. 여전히 그는 움직이지 않고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연주가 민주를 쿡 찌른다.
“왜? 저 교수가 맘에 걸려?”
“응… 아-아냐. 가자.”
민주와 친구들은 사범대 안으로 사라졌다.
피교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민주 일행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이 돌아온 날은 지진으로부터 일주일 후, 피교수가 간호대 지하에서 민주를 만나기 삼일 전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민주는 “솜사탕 후우~”가 뭔지도 몰랐고, 그림 속 캠퍼스에서 함께 겪은 일들도 기억하지 못했다. 대화 내내 민주의 눈빛에서 그를 향한 낯선 거리감과 경계심이 느껴졌다. 이제 며칠 뒤면 축제가 시작될 것이고 그 첫날 비극은또벌어지겠지….
발걸음을 돌리며 피교수는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꼈다. 딸 혜린을 만나자마자 다시 잃어버렸고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 모든 일을 함께 겪었던 민주와는 아무것도 교감하고 나눌 수 없다. 키쿠는 이 세계를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나교수는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 대면하고 싶지 않은 수치의 순간들을 또다시 겪어야 한다.
이 세상을 떠나 영혼의 강에 잠들어있어야 할 자신은 무엇 때문에 깨어나 망자처럼 이 세계를 방황하고 있는 것일까. 동성이와 자신의 처지는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12년 동안 피교수의 주변을 맴돌며 마침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 동성이 보다, 일기장의 잉크 속에 홀로 영원히 갇혀 있는 자신의 처지가 더 비참해 보였다. 할로우맨의 시구처럼 머릿속이 짚으로 채워진 듯한 공허함을 그는 느꼈다. 용기와 의욕도 사라지고 어디론가 숨고만 싶었다. 그렇다. 차라리 그 지하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민주와 책을 찾고, 그 거울 복도와 오렌지 안개의 터널을 지나 그림 속 캠퍼스 속으로 걸어 들어가 혜린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 과정을 무한 반복하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덜 괴롭고 덜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교수가 무거운 발길을 옮기고 있을 때, 저만치서 백발의 가스등 관리인이 걸어온다. 피교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그는 본 듯 못 본 듯 지나쳐 걷는다. 노인은 알 수 없는 곡조의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처음으로 그 가사가 피교수에게 들렸다.
해가 져야 등불은 켜지고
등불이 꺼지면 아침이 오누나
해 속에 등불이
등불 속에 아침이…
피교수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노인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때 뒤에서 동동이가 멍멍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동동이와 금동이가 서 있었다. 책은 갖고 있지 않았다. 책의 위치를 찾는 건 삼일 후였고, 키쿠가 파괴한 그 책은 이제 별 의미가 없었다. 지하에서 벌어진 분기는 닫혀버렸고 혜린에게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 끝을 봐야 했다. 부끄럽게 패배한 전쟁터, 명예를 잃어버린 그 싸움으로 그는 다시 걸어 들어가야 했다.혜린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외나무다리를 향해발걸음을 옮겼다. 이 날은 가장 피하고 싶었던 날이다. 나교수가 시한을 준 마지막 날, 그 불쾌하고 치욕적인 만남을 두 번째 반복하기 위해, 아니 불가능해 보이는 새로운 분기를 반드시 만들어 내기 위해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연구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