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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Sep 27. 2024

23. 구원의 손길

때마침 사범대에서 집회를 준비하고 있던 장명훈은  민주 일행을 일일이 포옹하며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훤칠한 키에 건치 미소를 날리는 호남형의 그는 도망 다닌 사람치고는 말끔한 모습이었다. 경덕은 그가 입은 일류 브랜드의 옷과 깨끗한 나이키 운동화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민과 성자단을 위해 금식 기도를 올리며 자신들을 찾았다는 말에 민주 일행은 큰 위로를 얻으며 감정이 받쳐 올랐다. 한 가지 더 희소식이 있었다. 오늘 밤 전국의 대학들이 정권 퇴진을 위한 대규모 집회를 동시다발적으로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출구 없는 방에 갇혀버린 그들에게 그 소식은 구원이었고 기도응답이었다. 이젠 더 이상 홀로 싸우지 않아도 됐다. 구세주를 만난 심정으로 경덕을 제외한 일행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잠시 후… 비밀집회가 열린 사범대 지하 창고. 민주 일행은 수십 명의 학생들과 함께 참석했다. 장명훈은 앞에서 결의에 찬 연설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3년 전 서울의 봄을 기억합시다. 10만 명의 민주 시민과 학생들이 모였던 서울역에서 우리는 역사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군부독재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력하게 물러났습니다. 그 치욕스러운 서울역 회군 이후 어떻게 됐습니까! 이틀 후 계엄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그다음 날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었습니다.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되었고 민주주의는 압살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다시는 물러서지 맙시다!”



소리 없는 박수가 이어졌다. 장명훈은 민주일행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경찰의 수배를 피해 숨어있던 중 사랑하는 후배 성민이의 소식을 듣고 밤새 통곡했습니다. 어용 교수들과 어용 총학만 남은 백양대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자랑스러운 학우들의 대자보를 보셨습니까? 친구를 위해, 불의에 대항해 분연히 일어난 이들의 올곧은 외침을 들으셨습니까? 백양대는 죽지 않았습니다. 다시는 비겁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물러나지 않습니다. 다시는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


다시 소리 없는 박수소리가 이어졌다. 모두의 눈빛이 결의에 차 있었다. 장명훈은 민주 일행에게 말을 건넸다.


“자 여기서 얼굴없는성자단 학우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겠습니다.”


명훈은 그들에게 손짓했다. 민주 일행은 서로를 보며 망설였다. 민주와 연주가 송희를 앞으로 밀어냈다. 송희가 수줍게 장명훈의 옆에 섰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저는 정치를 잘 모릅니다. 독재정권이 뭔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성민이 때문에 불안했습니다. 영문학자를 꿈꾸던 내 남자친구가 왜 열람실에 있지 않고 뛰쳐나가, 날마다 목이 쉬고 최루탄 냄새로 범벅이 되어 돌아오는지 무서웠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물어봤을 때 성민이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부끄럽지 않으려고.’ 저는 태어나 처음으로 대자보를 붙이고, 사복에게 얻어맞고 끌려가면서 깨달았습니다. 이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정작 부끄러운 것은 내 친구, 내 이웃의 고통에 대해서 함께 울고 싸우지 않는 것이라고. 그들이 지고 가는 십자가를 외면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부끄러워야 할 자들이 부끄러워질 때까지, 저를 지켜보고 있을 성민이를 위해 싸우겠습니다.”


소리 없는 박수 소리가 격하게 이어졌다. 인석이가 자리로 돌아온 송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 감동 먹었다 송희야!”


장명훈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서서 불끈 쥔 손을 들고 소리를 높였다.


“자, 동지들 두려워 말고 싸웁시다. 흔들리지 말고 함께 갑시다! 이제 잠시 후 8시면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의 대학에서 우리의 동지들이 이 땅의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설 겁니다. 이 일을 위해 이 장명훈이가 돌아왔습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백양의 뜻은 밝은 태양입니다. 백양인들이여 태양처럼 빛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태양처럼 타오릅시다. 투쟁의 횃불을 높이 듭시다. 이 장명훈이 앞장서겠습니다 여러분!


함성과 박수 소리로 창고가 떠나갈 듯했다. 밖에서 망을 보던 학생들도 고개를 들이밀고 함께 연호했다. 명훈은 흡족한 표정으로 내지른 주먹을 거두고 차분히 지시를 내린다.


자 아까 짠 대로 조장들의 지시를 따라주십시오. 주력은 스크럼을 짜서 대학본부로 돌진하고, 유단자, 예비역들은 사복들을 견제합니다. 횃불과 전단팀은 확성기를 들고 도서관 4층으로 갑니다. 자 물품들을 나누고 신속히 이동합시다.”


“난 이거 별로 안 내키는데…”


학생들이 흩어져서 준비를 시작하자 경덕이가 친구들을 향해 굳은 얼굴로 입을 뗐다. 인석이가 경덕이를 윽박질렀다.


“야, 여기까지 와서 무슨 소리야? 우리 작전이 결국 성공한 거잖아. 우리 때문에 저 형도 다시 싸우겠다는 거 아냐. 개교 이래 저렇게 많은 학우들이 일어선 건 처음이야.


“아는데, 난 저 사람 못 믿겠어.”


“무슨 소리야? 저 형의 리더십이 아니었음 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모여? 와 말발 장난 아닌데?


“글쎄 아는데… 그래서 더 아닌 거 같애.”


“죽겠네. 그러니까 대체 뭐가 아닌 거 같냐고!?”


흥분하는 인석을 제지하고 연주가 끼어들었다.


“경덕아, 혹시 그 군대 선임 때문에 그래? 저 형은 정말 그런 사람 아니야. 남을 괴롭힐 거면 수배 중인 사람이 여기 왜 와 있겠어?


“그건 몰라. 하지만... 너무 비슷해.”


“아 뭐가!?”


인석이가 동동 뛰며 답답해했다.


표정, 말투, 저런 선동 방식까지….”


“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저 형이 선동한 거면 그럼 송희도 선동한 거냐?”


민주가 인석을 말리며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시간이 없어. 우리 성자단은 늘 만장일치였어. 가면 함께 가고 아니면 함께 남는 거야. 각자 생각을 말해보자.”


“가자. 난 어차피 군대 끌려갈 거야.”


“나도. 난 저 선배를 믿어.”


“난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으니까…. 민주야 넌?”


“… 난… 후 뭐냐 이 기시감… 후우… 이상하네…”


민주는 불편한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품에서 성민이의 메모를 꺼냈다.


“난 성민이가 끝까지 싸웠다고 세상에 알리고 싶어. 성민이는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고, 이 메모로 그 약속을 지켰다고 말해주고 싶어. 우리에게, 모두에게…”


학생들은 그룹을 나눠 물품을 챙기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장명훈이 1층 계단으로 올라가다 말고 머리를 내민 채 이들을 앙칼지게 불렀다.


“성자단, 안 오고 뭐 하나? 동작 봐라.”


그의 머리는 사라졌고, 민주 일행은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민주가 불안한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뭐지, 저 태도 변화? 연주야, 저 사람…”


형도 긴장한 거야. 이해해 주자. 그보다 경덕이 넌 정말 반대인 거야?


경덕이가 어색한 표정으로 씩 웃으며 답했다.


아냐, 민주 말이 맞아. 우린 결사대 임무를 완수해야지. 그래, 가자. 가보면 알 수 있겠지. 자…”


경덕이가 소심하게 두 팔을 벌렸다. 다섯 친구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짧게 기도를 올린 후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경덕은 조금씩 뒤로 처지다가 홀로 빠져 기민하게 어디론가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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