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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Sep 29. 2024

25. 배신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물가 심어진 나무 같이 흔들리지 않게. 


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흔들리지 흔들리지 않게, 

물가 심어진 나무 같이 흔들리지 않게.”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힘차게 노래하며 광장을 향해 경사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삼삼오오 멈춰 서서 이들을 바라봤다. 대열 양끝의 경계조는 화염병과 몽둥이를 챙겨 들고 사복 경찰들의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다. 경사길을 다 내려올 무렵 장명훈이 지시를 내렸다.


“자 도서관조 출발!”


“다녀올게.”


민주가 스크럼을 풀고 두 명의 학생들과 함께 대열을 이탈했다.


“조심해 민주야!”


“송희야 걱정 마. 전단만 뿌리고 금방 올게.”


“이상해. 마치 그날처럼… 이유는 모르겠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그럼 내가 같이 갔다 올게.”


경덕이가 스크럼을 풀며 송희에게 말했다. 뒤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장명훈이 앙칼진 소리로 나무랐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대열 유지해!”


“반말하지 마시죠.”


“너네 성자단 수준 이거밖에 안 돼? 여긴 군대야!”


“여기가 왜 군대입니까?! 여긴 학교입니다!”


연주가 경덕이를 말리며 뭐라 했지만 거센 ‘독재타도’의 구호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인석이도 참으라는 제스처를 보였고 경덕이는 마지못해 다시 스크럼의 대열에 합류했다. 본대는 어느덧 광장에 도착했고 주변에는 제법 학생들이 있었다. 시위대는 전단을 뿌리면서 더욱 힘을 내어 광장 분수대 쪽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전단지를 줍는 학생이 아무도 없었다.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이들은 말없이 스크럼 행렬을 방관할 뿐이었다. 인석이가 좌우를 둘러보며 한 마디 했다.


“이거 분위기 왜 이러냐?”


시위대는 더욱 목소리를 돋우며 광장 가두리를 따라 크게 돌기 시작했. 인석은 야외극장 앞을 지나면서 외롭게 끌려갔현장에 돌아와 이 많은 학우들과 함께 싸우고 있음에 코끝이 시큰했.  경덕이가 뭔가를 보고 인석에게 외쳤다.


“저기 봐라.”


학생들 뒤편으로 오렌지 빛 안개에 반쯤 묻힌 채로 도열해 있는 백골단과 사복 경찰들이 보였다. 인석이가 겁에 질려 말을 더듬었다.


“백-백골단이다!”


백골단은 청자켓과 청바지 차림에 흰색 헬멧을 쓴 시위 진압 특공대였다. 전원이 무술 유단자였고 이름표나 부대 소속 마크가 없어 유사시에도 어떠한 책임도 질 필요 없는 익명의 진압 특공대다. 이들은 전투경찰 같은 보호 장구는 일절 착용하지 않고 가벼운 복장으로 시위 현장을 빠르게 누비며 시위 주동자들을 색출해 무자비하게 긴 곤봉으로 구타해서 끌고 가는 전문 체포조였기 때문에 시위대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오월대나 녹두대 같은 무장 대학생 시위대도 생겨났지만 말로만 듣던 백골단을 처음 보는 백양대 학생들에게 그에 대한 대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어느새 똥색 당원복을 맞춰 입은 사복들이 쭉 도열해서 시위대와 일반 학생들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시위대의 앞에도 사범대가 있는 뒤쪽에도 백골단과 사복들이 학생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독재타도’의 구호는 계속되었으나 이미 그 기세가 꺾였다. 시위대는 점점 더 작은 원을 그리며 돌다가 어느새 멈춰 서서 힘 없이 구호만 외치고 있다. 하얀 헬멧들의 숫자에 기가 질린 경계조의 몇몇 학생들은 손이 하얘지도록 야구 방망이와 몽둥이를 꼭 쥔 채 부들부들 떨며 서로 눈치를 본다. 경계조 조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명훈아, 어떡하냐? 돌파할까?”


“아냐, 가만있어봐.”


이때, 이들을 에워싼 백골단이 일제히 곤봉으로 원형 방패를 두드렸다. 쾅쾅 울리는 금속성 소리에 구호가 뚝 멎었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백골단 앞으로 똥색 옷을 입은 40대 남자가 확성기를 들고 나섰다. 삐익하는 소리가 나고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전 학생회장 장명훈이, 장명훈이 거기 있나?”


모두의 시선이 장명훈을 향했다. 백골단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배 중인 장명훈을 잡으러 온 것일까? 이제 그를 지켜야 하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것인가? 희망과 불안이 교차했다. 시위대의 시선을 의식한 장명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긴장한 듯 입술에 침을 바르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 저를 믿으십시오. 가만 계십시오. 그러면 오늘은 아무도 안 다칩니다.”


모두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카랑카랑한 확성기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야, 장명훈이! 퍼뜩 뛰어 온나!”


“네! 대장님!”


장명훈이 힘차게 외치고 대열에서 나와 백골단 쪽을 향해 발걸음을 디뎠다. 경덕의 눈에는 지뢰밭을 향해 걸어가던 장병훈 병장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장명훈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병훈!”


그가 고개를 돌렸다.


“장병훈, 너 이 개새끼!”


그 이름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어색하게 씽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대장이라는 사람에게로 냅다 뛰어갔다. 그의 모습이 똥색 옷과 함께 백골단 뒤로 사라졌다. 이 충격적인 장면에 학생들은 크게 동요했고 스크럼이 풀렸다.


“명훈이 형이 지금 뭐 한 거야? 우릴 배신한 거야? 경덕아 저 사람, 저 사람이 진짜 장병훈이야!?”


연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경덕을 잡고 흔들었다. 순간 다시 방패를 두들기는 금속성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고, 백골단과 사복 경찰들은 마치 사냥감에 접근하듯 겁에 질린 시위대를 포위해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에서 확성기 소리가 또 들려왔다.


“도주로는 모두 차단됐다. 폭력 행위는 엄단한다. 순순히 투항하면 선처를 약속한다. 5분 주겠다.”




한편, 본대에서 이탈한 민주와 두 학생은 도서관 쪽으로 신속히 이동했다. 도서관은 사범대의 대각선에 위치하고 있다. 광장으로 내려가는 내리막 길에서 오른쪽으로 쭉 따라가면 대학본부 뒤쪽에 위치한 도서관 앞길이 나온다. 도서관 조를 따로 둔 이유는 그쪽이 학생들의 출입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고, 광장을 끼고 있는 대학본부와 기숙사 등 1선의 건물들과 가장 뒤쪽에 위치한 가정대, 간호대 등 3선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 전체에 시위의 효과를 전달하는데 이상적인 위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부지런히 뛰어 정경대 앞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건물 전체가 우르릉 거리며 흔들렸다. 또 지진인가 하여 세 사람은 놀라 급히 몸을 낮췄다. 유리창이 깨져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이후 별다른 미동은 없었다. 이들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민주는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아까부터 느껴지는 기시감과 명훈에 대한 경덕의 반응, 그리고 어쩌면 경덕의 예감이 맞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자꾸 솟아났다. 민주는 가슴에 품은 성민이의 메모와 손목에 찬 묵주를 꼭 쥐었다. 성민이가 하늘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응원해 주기를 기도했다. 나지막한 오르막 길이 나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노래와 구호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직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가는 모양이다. 경사길을 올라가면서 도서관이 보였다. 건물 아래쪽이 점점 보이고 마침내 입구가 보였을 때 세 사람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도서관 앞에는 십여 명의 백골단원들과 눈이 딱 마주쳤던 것이다. 일행 중 하나가 숨 막히는 소리로 내뱉었다.


“배-백골단!”


“야 동작 그만!”


백골단 중 하나가 곤봉을 뻗으며 소리를 질렀다.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방향을 돌려 줄행랑을 쳤다. 달리기가 빠른 민주는 남학생 둘 보다 앞서서 달렸다. '아악'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뒤에서 욕설과 둔탁한 몽둥이질 소리가 들렸다. 민주는 정경대 앞에서 길을 벗어나 뛰다가 관목을 뛰어넘어 이끼가 잔뜩 낀 커다란 바위 뒤로 숨었다. 잠시 후 발소리가 다가왔다.


“계집애가 웬 발이 그렇게 빨라? 이쪽 맞아?”


백골단 하나가 남학생에게서 뺏은 확성기를 켜자 삐익 소리가 났다.


“아아~ 잘 들리나요? 이거 왜 자꾸 삑삑 거리냐. 네 이 년, 빨리 안 튀어나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두 백골단원은 킬킬거리며 확성기를 번갈아 들고 별로 창의력 없는 엇비슷한 희롱과 협박을 반복하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애꿎은 나무들만 곤봉으로 후려치다가 맥이 빠졌는지 ‘못 찾겠다 꾀꼬리. 이제 나오면 죽는다’는 확성기 방송을 끝으로 둘은 민주가 숨어있는 바위 앞으로 와서 곤봉으로 바위를 툭툭 치며 한담을 나눴다.


“야 근데 우리가 광장 쪽 뛰었어야 되는 거 아냐? 주동자급 두 당 포상이 얼만데, 중대장 개새끼.”


“그러게. 이쪽에도 많이 올 거라더니 꼴랑 세 놈이 뭐냐.”


“2소대 새끼들은 좋겠다. 앉아서 중국집 배달받는 거네.”


“근데 시위한 새끼들은 존나 불쌍하다. 지부작족(知斧斫足)이 따로 없구나.”


“오 가방끈 긴 놈은 역시 수준이 다르네. 지부작이 뭔 말이냐?”


뭐긴 답답아. 믿는 도끼에 발등…. 잠깐… 야 거기!!”


민주는 확성기로 지르는 고함 소리에 눈을 꼭 감고 움찔했다. 자신이 발견된 줄 알고 일어서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백골단의 고함은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확성기가 다시 울리다.


“아아~ 동작 그만. 동작 그만, 새끼들아!”


“뭐야 쟤들은?”


“몰라. 걷는 거 존나 수상한데. 이리 와 새끼들아! 빨랑 안 와?!”


“존나 뛰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킥킥 거리는 소리와 ‘존나… 존나…’ 하는 흐느낌도 들렸다. 백골단 중 한 명이 곤봉을 바위에 주욱 긋더니 그들에게 다가갔다.


“공부 존나 하다가 허리가 존나 굽었냐, 새끼들아? 처맞기 전에 고개 안 쳐들어!?”


“존나… 존나… …”


순간, '흐억'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마구 곤봉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곤봉 하나가 하늘로 날아갔다. 다른 하나는 나무에 뎅그렁 소리를 내며 부딪혀 구르는 소리가 났다.


흐악사람…  살려….”


“김 상경! 김 상경! 아악, 저리 가! 오지 마!”


바위로 몰려 등을 지고 있는 백골단의 흰 헬멧이 민주의 눈에 들어왔다.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헬멧이 앞 뒤로 마구 흔들리더니 사람은 사라지고 빈 헬멧만 민주 옆으로 떼구르 굴러 떨어졌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킥킥 소리가 나며 바위 저편에서 팔이 쑤욱 넘어왔다. 그 모습을 본 민주는 비명을 참기 위해 입을 막으며 필사적으로 바위틈에 바짝 붙었다. 청자켓 소매 끝에 붙어있는 손은 손가락이 없는 뭉툭한 살덩이였다. 그 살덩이는 헬멧을 주워 올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민주는 열까지 세고 조심스럽게 바위 옆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멀어지고 있는 백골단원 둘이 보였다. 헬멧은 삐딱하게 걸치고 팔은 목 뒤에 하나 그리고 옆구리에 하나가 붙어있었다. 다리는 연체동물처럼 흐물흐물 갈지자로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 민주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키쿠!’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왜 자신이 저 괴물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의아했지만, 그 보다 더 큰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도서관의 백골단들은 자신들을 체포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고, 광장 쪽에서도 더 많은 백골단이 본대를 잡기 위해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위는 저들의 허를 찌르는 기습 시위가 아니라 함정이었다. 그렇다면 장명훈은?... 민주는 머리가 싸늘해지며 친구들이 걱정되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광장 쪽에서는 들려야 할 함성과 구호가 들리지 않았다. 민주는 바닥에 떨어진 확성기를 집어 들고, 몸을 최대한 낮춘 자세로 관목들을 따라 광장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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