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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Sep 28. 2024

24. 함정

나처장의 연구실.


방에 들어선 피교수는 굳은 얼굴로 노란 서류 봉투를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는다.


“오~ 밥값을 하긴 한 거야?”


나교수는 피교수가 책상 위에 놓인 봉투를 힐끗 보며 말했다.


“어디, 뭘 물어왔는지 볼까?”


꺼낸 서류를 몇 장 훑어보던 나교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 이 새끼가.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거 어디서 났어?”


“우리 맹조교가 아주 꼼꼼하거든요. 사본을 아주 잘 정리했더군요.”


“아주 열일하셨구먼. 일주일 동안 이 짓거리하고 다녔던 거야?”


“그만하시지요.”


“뭘 그만해? 너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아니까 이제 그만 하자는 겁니다.”


“아니지. 네가 뭘 믿고 태도가 돌변했는지 모르겠지만, 등 뒤에서 이렇게 칼을 꽂았으면 제대로 숨통을 끊어야지. 아니면 네가 뒤지는 거야.”


“그러니까 사과하세요. 여기 증거가 다 있잖습니까. 대자보에 적힌 윤성민 학생 건과 성희롱에 대해서 제대로 공개 사과하시고… 성자단 색출도 당장 중단하시고, 그만 물러나세요.”


, 같잖아서. 싫다면 어쩔 건데?”


“제보할 겁니다.”


“어디에? 뭐 경찰? 안기부? 보안사? 기무사? 아 언론? 누가 실어준대?”


“아 그때랑 똑같네. 제발 그다음 말은 하지 마라.”


, 마누라 살인 혐의로 조사까지 받은 범죄자 말을 누가 믿어줄 거 같애?”


“했네. 범죄자 아니고요. 가슴 아픈 제 개인사입니다. 이런 걸로 협박을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죠.”


“내가 왜 부끄러워? 지 마누라도 못 지킨 놈이 부끄러워해야지. 그리고 말야, 대자보 쓴 놈들 커버치는 거 보니까 뒤에서 사주한 게 너지? 얼굴 없는~ 어쩌구 그거 네가 수업 시간에 가르친 영시에서 나온 거 맞지?”


“이카보드.”


“너 나한테 욕했냐 지금?”


“안 바뀌는구나.”


“뭐가?”


“이 상황.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 아 맹조교야 제발 들어오지 마라.”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맹조교가 서류봉투를 들고 뛰어들어온다. 맹조교는 피교수와 나교수를 번갈아 보고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발견한다.


맹조교, 안돼!


지난번처럼 맹조교는 피교수의 제지를 우악스럽게 뿌리친다.


“처장님, 이겁니다. 그거 아니고요, 우리 피교수님이 서류를 잘 못 들고 가셔서 제가 이렇게…”


맹조교는 책상 앞으로 가서 90도 각도로 절을 하며 나교수에게 서류를 건네고 피교수의 서류 파일을 급히 치우려는데 나교수가 서류 봉투로 맹조교의 머리를 후려친다.


돈 받아 처먹었음 일 좀 똑바로 해라. 제발! 맹정환이. 내가 경고했지. 너네 교수 수상하니까 잘 감시하라고.”


아입니더. 피교수님은 오직 학교를 위해서 여기 운동 조직 명단을…”


“야 이 멍청아! 네가 그렇게 감싸고도는 피교수가 뭘 들고 왔는지 알아? 등에 칼 맞았다는 게 이런 거야!”


나교수는 봉투를 가리켰다. 맹조교는 그제야 서류들을 꺼내 살펴보고 얼굴이 구겨졌다. 전화벨이 울린다. 나교수는 혀를 차며 회전의자에 앉아 등을 돌리고 나지막한 소리로 통화를 했다. 피교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전과 달라져있었다.


지난번 맹조교는 바로 여기에서 자신을 필사적으로 끌고 나갔고 저항은 거기서 끝났다. 민주와 성자단의 명단은 전달되었고 나교수의 비리 서류는 묻혔다. 사표는 그의 주머니에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가 못 이기는 척 맹조교에게 끌려 나온 것은 할 만큼 했다는 자기 합리화가 표면적 이유였고, 그 이면에는 벌거벗겨진 채 조직에서 쫓겨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구차하게라도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는 소금쟁이의 생존욕구는 양심을 저버린 수치심보다 더 강했고, 그것은 그간 맹조교의 행동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피교수는 얼마 후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고, 피교수의 자리를 노린 맹조교는 또 한 번 팔색조처럼 변신을 해서 피교수에게 불리한 결정적인 증언을 했다. 피교수는 그 해 겨울 백양대에서 파면당했다.


그런데 지금 맹조교는 번개처럼 자기를 끌고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말을 계속하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새로운 분기가  시작되고 있다.


“아니 교수님, 허락 없이 내 책상을 뒤진겁니꺼?”


내 학생을 지키는 일에 허락이 필요한가 ?”


“그 서랍은 잠겨있었을 텐데….


“그 책상은 내가 준 거 아닌가. 세게 치면 열리네.”


“아니, 저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언제부터였나?”


 오래됐습니다.”


“대체 왜?”


“저 같은 가난뱅이가 어찌 대학을 다녔겠습니꺼. 중정 시절부터 국가 장학금 받았십니더, 나처장님 추천으로….”


“그래서 날 그렇게 말린 건가? 동성이 문제 때도?…”


“교수님 안 다치게 하려고 그런 겁니다. 믿어주이소.”


“그럼 성민이는? 우리 제자고 자네 후배야!”


“성민이는 억울합니더. 걘 지도 어떻게든 빼보려고 했는데….


피교수는 책상 위에 놓인 고발 명단을 가리킨다.


저 명단에 대해서도 억울할 예정인가?


네, 억쑤로 억울합니더. 제 맘을 왜 몰라주십니꺼! 쟈들 아님 교수님이 죽는깁니다.


“됐네 그만! 그 서류나 이리 줘.


뭐 하시게요?”


끝까지 싸울 거야! 그래야 바꿀 수 있어.


어림없는 소리 마이소!”


어서 내놔!


“이건 원래 내 낍니다. 교수님이 내 껄 훔치신 기고.


아이들 목숨이 자네 거야? 이번엔 절대 안 돼!”


피교수는 맹조교에게 달려들어 봉투를 뺏으려 한다. 둘 사이에 필사적인,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씨름이 벌어진다. 어색한 몸싸움 끝에 둘의 벌건 얼굴이 만두처럼 맞붙은 채 씨근거린다.


“누구 모가지 날아가는 꼴 보실랍니꺼! 놓으소!”


“내 모가지…라도  테니 그건 제발….


“놀고들 있네. 만담 하냐? 내가 우스워!?


회전의자에 앉아 등을 지고 있는 나교수가 버럭 쉰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그가 앉은 의자가 덜덜 흔들리고 있다. 조교가 피교수를 밀쳐내고 부동자세를 취한다.


“야 피교수, 눈 내리깔고 우리를 비난하니까 뭐나 된 거 같냐? 얌전한 개새낀줄 알았더니 이거 미친 개새끼네. 큭큭… 야 네 맘대로 손을 씻는다고 그 손에 묻은 피가 지워질 거 같아?”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그는 피교수의 질문이 같잖다는 듯이 의자가 삐걱댈 정도로 쿡쿡  쉰 웃음을 뱉더니 말을 이었다.


하~ 때는 1971년 10월. 불길처럼 일어나는 학생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위수령이 떨어진 엄중한 때였다 이 말씀이야. 학교는 휴교령 내리고 위에서 대학별로 제적 대상자 쿼터가 떨어졌단 말이지. 각하가 엄청 열받으셨거든. 근데 어떡하나? 빨갱이를 잡아내라고 난린데 우린 없으니 만들어라도 내야지. 어랏 불온서적 소지에 아무 연고도 없는 놈이 하나 있네? 마침 그 할애비는 공비에게 죽었으니 걔는 어쨌든 북쪽이랑 관련이 있는 거지. 그때 갓 입사한 풋내기 피교수는 나랑 학생 징계위원회 위원이었고, 우리는 국민총화의 정신으로 똘똘 뭉쳐 그 작업을 한 거지.”


“무슨 작업? 난 당신과 달라.”


쿡쿡~. 같아. 같은 종이에, 같은 펜으로, 나란히 사인했거든.”


그럴 리 없어.”


기억이 안 나? 뇌구조가 참 편리하네. 그러니 그 제적된 불쌍한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도 통째로 날려먹었겠지? 크크큭…”


“그만해!


“그래. 그놈의 기억이 문제야. 잊어야 할 건 안 잊고, 잊지 말이야 할 건 잊어버리고 그치? 쿡쿡쿡… 관 속에서 처자야 할 놈이 눈을 뜨고 다른 사람들까지 깨워 온갖 기억을 들쑤시지만, 정작 저는 이 모든 사단의 시작을 기억조차 못 하는 주제에, 그치? 네가 걔를 기억하지 못했던 이유가 뭘까? 네 알량한 양심, 그게 깨어있으면 견딜 수가 없으니까 어두운 방에 걜 처넣고 꽁꽁 잠가버린 거잖아. 그러니까 제발… 씨발… 주제 파악하고 이제 망각 좀 하자 우리… 다시 관짝으로 들어가서 다 잊고 처자라고, 이 망할 피교수야 캬캬캬!!!”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그의 호흡 섞인 소리는 점점 커져서 온 방안이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기가 질린 맹조교가 나교수에게 물었다.


“처장님, 괜찮으십니까? 물 좀 갖다 드릴까요?”


넌 누구야!


피교수가 힘껏 외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뼛속부터 느껴지는 한기로 그의 몸이 떨렸다.


이거 섭섭한데. 키키키쿠쿠쿠…. 우리의 장가를 들으면 기억이 나려나? 키키키키쿠쿠쿠쿠….


처장님, 어디 아프십니꺼?


피교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처장에게 가보려는 맹조교를 붙드는데 불쑥 의자 위로 나교수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의자 양쪽으로 그의 어깨와 몸통이 부풀어 삐져나왔다. 거대한 몸무게가 힘겨운 듯이 의자가 삐걱댔다. 놀랍게도 그는 요가를 하듯 두꺼운 팔을  의자 뒤로 꺾어 평소의 나처장처럼 휘젓기 시작한다.

어이,  시건방진 후배님, 재미난 이야기  하나 들려줄까? 방금 그 전화… 무슨 전화였는지 알아? 쿡쿡~ 프락치는 널렸어. 내가 부리는 촉수는 저 꺼벙한 맹정환이 하나가 아니란 말씀이야. , 조금 있다가 저기 광장으로 데모하는 놈들이 쏟아져 나올 거고, 굴비 엮듯이 아주 한 놈도 안 남기고 싹 쓸어버릴 거야. 물론 네가 싸고도 성자단 놈들까지. 이제 니들은 끝났어.


“그게 무슨 말이요? 시위는 아직… 3일이 남았어. 오늘은 아니야!”


“오이오이, 우리가 그 3일을 기다려줄 줄 알았어? 이런 허접 쓰레기 정보에 목매고 있을 줄 알았어? 우리 꼼수쟁이 피교수가 영웅행세 하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을 줄 알았어? 우욱~.”


그는 갑자기 격하게 토하기 시작했다. 몸의 중심을 잃고 책상 뒤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둔하게 울렸고 의자는 옆으로 나뒹굴었다. 맹조교가 나교수를 부축하러 가려고 하자 피교수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가지 마.”


“저러다 죽는 거 아입니꺼?”


“기다려.”


순간 책상 뒤에서 온방을 울리는 목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쿠쿠쿡~ 뭐?… '오늘'은 아니야?…. 이게 너의 '오늘'로 보여? 책 속에서 놓친 널 잡기 위해 이 '오늘'은 우리가 짜놓은 덫이고, 미끼는 잘난 네 이야기였고, 너라는 허영심 쩔은 쥐새끼는 제 발로 걸어 들어와 그 미끼를 덥석 문 거야. 키키키쿠쿠쿠쿠….


정적.


교만한 영혼이여, 네게 나를 선고하노라….


“파멸!!!”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엄청난 소리에 유리창이 박살 나고 책상이 나뒹굴었다. 벽들은 부르르 떨었고 형광등은 마구 흔들리다가 깨졌다. 피교수와 맹조교는 장풍을 맞은 듯이 공중에 붕 떴다가 바닥에 팽개쳐졌다. 폭탄이 옆에서 터진 것처럼 피교수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사방이 빙빙 돌았다. 억지로 몸을 가누려고 버둥거리고 있는데 맹조교가 그를 부축하고 어깨를 흔들었다. 그에게 괜찮다고 손을 내젓는데, 맹조교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뭔가를 외치며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마구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가던 시선은 책상이 있던 자리에 우뚝 서있는 거대한 존재에 멎었다.

어둠 속 그의 실루엣이 바깥 불빛에 서서히 드러났다. 나처장윤곽에 그의 찢어진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는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의 거대한 몸집이었고 두 눈과 입은 뻥 뚫린 암흑의 구멍이었다. 나처장이 평소에 즐겨 긁던 배꼽은 커다란 수박처럼 부풀어 올랐는데, 그것이 검은 고름 덩어리처럼 툭 바닥에 떨어지며 검은 촉수들로 변해 사방으로 튀었다. 그중 하나가 날아와 맹조교의 팔뚝에 들러붙었다.


“흐억!”


맹조교는 미친 듯이 그것을 떨어내려 했지만 그 촉수는 그의 옷을 뚫고 팔 속으로 사라졌다. 나처장의 배꼽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검은 구멍이 뚫렸고 그것은 거대한 입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나처장을 덮어쓴 이 괴물은 키쿠들의 우두머리, 파멸의 본체였다. 피교수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카보드.


그 괴물은 코끼리 다리 같은 두 팔을 뻗어 뒤뚱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발을 쿵 디딜 때마다 지진이 난 듯 바닥이 우르릉 울렸다. 키키키키쿠쿠쿠가까이서 들리는 키쿠의 자장가는 두 사람의 몸과 의식을 마비시켰다.


맹조교는 피교수 뒤에 숨어 팔뚝을 부여잡고 ‘도플갱어’를 주문 외우듯 반복하며 덜덜 떨고 있었다. 피교수는 달아나려 했지만 진동과 혼미함으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손가락이 촉수들처럼 춤을 추는 파멸의 팔은 그들에게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고 배꼽에서 생겨난 검은 아가리는 이들을 삼키려는 듯 입을 쫙 벌렸다. 그 입으로부터 몸이 시릴 정도의 한기가 불어왔다. 아 이렇게 끝나는 거구나…. 피교수는 맹조교를 끌어안고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갑자기 진동이 멎고 키쿠의 괴성과 개 짖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피교수가 눈을 떠보니 자신들과 파멸 사이에 동동이가 버티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많은 팔들이 뻗어 나와  방의 사면 모서리로 뻗어 방어막처럼 파멸을 가로막고 있었고 그의 머리는 천장에 거의 붙어서 거대한 검은 얼굴에 거의 닿을 듯 서로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양쪽의 푸른 안광이 맞부딪혀 불을 뿜는 동안, 피교수의 한쪽 알이 깨진 안경 너머로 금동이가 나타났다. 그는 성한 안경알 속에서 마구 손을 내저으며 문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맹조교, 일어나. 어서!”


피교수는 눈앞의 광경에 거의 실신할 지경인 맹조교를 끌고 복도로 나섰다. 정문 쪽 계단으로 구르듯이 달리며 맹조교가 겁에 질린 소리로 물었다.


“교수님, 저게 대체 뭡니꺼 예?!”


파멸.”


“에?”


놈의 함정에 빠져버렸어.


광장 쪽으로 난 정문 쪽 창문을 본 피교수는 탄식했다. 저 멀리 사범대 쪽에서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내려오고 있었고 반대편 대학본부 뒤편에는 하얀 헬멧을 쓴 백골단과 사복 경찰들, 그리고 똥색 당원복 같은 것을 입은 어용 직원들이 매복 진형을 갖추고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피교수는 맹조교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고함을 지르고는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교수님, 안 됩니더! 가지 마이소!”


잠시 주저하던 맹조교가 부르르 떨리는 건물의 굉음에 몸을 뒤뚱거리며 피교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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