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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Sep 30. 2024

26. 파멸의 짐승

“교수님, 어디 가십니꺼?”


정경대를 빠져나온 피교수를 간신히 따라잡은 맹조교는 아이처럼 피교수를 꼭 붙들고 겁에 질려 물었다. 피교수는 걸음을 재촉하며 답했다.


“도서관. 근데 나 혼자 가도 되네.”


화장실에서 도망쳤던 날처럼 넋이 나간 맹조교는 피교수의 팔을 더 꼭 움켜쥐었다.


“아… 그럼 저도….”


“그 팔은 괜찮아?”


“느낌이 좀 이상한데… 근데 너무 놀래서 아픈지도 모르겠심더. 대체 이게 다 뭡니까?”


“글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예이츠의 <The Second Coming> 기억하나?”


“제가 예이츠로 박사 논문 쓰는 사람입니더. 근데 그 시가 와예?”


완전한 무질서가 세상에 풀려나고
피로 물든 조수가 밀려든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순수의 의식은 물속으로 사라진다…


맹조교가 그 뒤를 받아서 어둡게 읊조린다.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었고,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 있다.”


검은 흔적이 남은 팔뚝을 불안하게 감싸던 맹조교는 고개를 흔들며 대꾸했다.


“그람 뭐 재림의 날이 왔다. 세상이 끝났다 이 말인교? 뭐꼬, 그럼 나교수님이 그 짐승? 그럼 이게 그 짐승의 표?”


“아니야. 그건 그냥 나교수의 배꼽…. 그리고 나교수가 짐승이 아니라, 말하자면 짐승이 나교수를 삼켜버린 거지.”


“아 그게 그거 아닌교?!  더러븐 게 와 여기 튀어가지고… 아 빌어먹을 예이츠! 박사가 아니라 표를 줘버리네! 내가 예이츠 때문에 인생 조졌다 아임니꺼! 야단 났네 참말로.”


덜덜 떨며 미친 듯이 팔을 비비는 맹조교를 바라보는 피교수의 심정은 어느덧 배신의 분노에서 연민으로 바뀌었다. 그는 수년 전 찾아와 무릎을 꿇고 논문 지도교수를 맡아 달라고 간청을 했다. 아무도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울먹였다. 지금까지 그는 몇 번이나 살아남기 위해 강한 자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을까. 무릎이 닳아 반질반질한 그의 낡은 바지를 보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살가운 농담을 던졌다.


“학과장님 화내는 걸 보니, 그건 표가 아니라 그냥 배꼽의 때였던 거 같아. 아주 정상이야.”


지금이 농담할 때냐며 투덜거리는 맹조교를 또 다른 농담으로 달래며 두 사람이 도서관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십여 명의 백골단원들이 입구를 통제하고 학생들을 차단하고 있었다. 피교수는 말없이 교원증을 내밀었고, 이들은 두 사람을 째려보며 길을 열어줬다. 피교수는 걸음을 재촉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도서관은 시위 탓인지 학생이 별로 없었고, 몇몇 학생들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광장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초조해진 피교수는 갑자기 큰 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민주야! 어딨니? 민주야!”


“아니 갸를 왜 여기서 찾십니꺼?”


그날 분명히 여기 있었어. 오늘이 그날이라면 늦기 전에 찾아야 해.


“예?”


미안. 설명할 시간이 없네.”


두 사람은 3층의 텅 빈 열람실을 뒤진 후에 도서관의 옥상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달이 없는 그믐밤이었고 별마저 짙은 안개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피교수가 그렇게 좋아하던 오렌지 불빛의 캠퍼스도 오늘만큼은 불길하게만 보였다. 피교수는 민주의 이름을 부르며 옥상 곳곳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힘이 빠진 피교수는 한숨을 쉬며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맹조교는 우물쭈물 서 있다가 그 옆에 가서 앉아 팔뚝을 주무르며 말했다. 광장에 쪽에서는 시위대의 합창소리가 들려왔다.


'미칠 것 같은 이 세상'이라 하 말 되네. 교수님, 이제 우린 어찌 되는 깁니까? 나처장님은 왜…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맹정환 군, 미안하네.”


“뭐가예?”


“모든 게 다…. 내가 까망귀신이라고 했던 것도 용서하게.”


“아 지도 뭐…. 아니지. 암요, 용서 못합니더. 종말 핑계 대지 마시고요, 두고두고 사과받을 테니 그리 아이소….”


평소에 익숙한, 그러나 다소 풀이 죽은 그의 나무람에 피교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맹조교,… 만일 오늘 세상이 끝난다면 뭘 하고 싶은가?”


“글쎄요… 고향에서 사과나무는 지겹도록 심었고… 예이츠 때문에 박사학위 못 따고 죽는 게 한입니더. 교수님은요?”


나처장 말이 맞았네. 난 아무도 지키지 못했어. 내 아내, 제자들… 자네 말대로 그저 난 비겁한 소금쟁이였어.”


“그기 와 교수님 책임입니꺼? 쓸데없는 소리 마이소!”


“그래서 말야…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난 한 사람이라도 구하고 싶네.”


“마 절 구했으니 됐심더.”


“어쩌면… 이 날이 오지 않도록 내가 깨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그냥 영원히 잠들어 있어야 했어.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돌처럼 깊이 잠들었던 이천 년의 세월이
흔들리는 요람으로 인해 악몽에 시달렸다는 것을.’”


“아 교수님, 예이츠 타령은 그만하시고 이제 내려 가입시…”


“가만, 저 소리는…”


피교수는 고개를 들고 귀를 기울였다. 광장 쪽에서 확성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주의 목소리였다! 피교수와 맹조교는 몸을 일으켜 광장 쪽을 보니 대학본부 건물 옥상에 횃불이 보였다. 민주의 모습은 어두워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도서관 옥상이 아닌 대학본부 옥상에서 분명 그날처럼 횃불을 들고 확성기로 시위를 하고 있었도. 이제 잠시 후면 그날의 비극이 민주를 찾아올 것이다. 민주의 목소리는 갑자기 사라지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맹조교가 얼굴을 찡그렸다.


“진압이 시작됐나 봅니다.”


“안돼!”


피교수가 급히 옥상 출구를 향해 돌아설 때, 정경대 쪽에서 굉음이 울리며 건물의 출구 쪽 벽이 무너져 내렸다. 분진과 안개 위로 족히 10미터가 넘어 보이는 거대한 나처장, 아니 파멸의 모습이 오렌지 불빛 속에 드러났다. 그의 살갗은 군데군데 터져있었고 그 찢어진 틈으로 검은 촉수들이 삐져나와 꿈틀대고 있었다. 그는 성난 듯이 다시 돋아난 거대한 배꼽을 긁고 있었다. 피교수는 슬픈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예이츠의 시 마지막 두 줄을 읊었다.


그리고 어떤 사나운 짐승이 마침내 그의 때가 되자,
태어나기 위해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고 걷고 있는가?


파멸의 블랙홀 같은 입의 구멍에서 마치 수천 마리의 매미가 울어대는 듯한 키키키키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음은 캠퍼스 곳곳으로부터 메아리처럼 다른 키쿠들의 화답하는 날카로운 웃음소리로 울려 퍼졌다. 인근 간호대로부터 엄청난 숫자의 키쿠들이 쏟아져 나왔다. 말편자형, 아크로뱃형, 도플갱어형 모든 종류의 키쿠들이 학생들과 사복들의 모습으로 꿈틀대며 캠퍼스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학교 도처에서 비명 소리와 키쿠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들려왔고, 피교수는 창백한 얼굴로 주저앉은 맹조교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어서!”


맹조교는 팔을 부여잡은 채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먼저 가이소.”


“자 내 손을 잡아.”


“아입니더. 퍼뜩 가이소!”


멀리서 민주의 다급한 확성기 목소리가 비명 소리를 뚫고 다시 들려왔다. 피교수는 민주와 맹조교 쪽을 번갈아 보며 망설였다. 맹조교가 소리를 질렀다.  


“뭘 꾸물거립니꺼? 빨리 가이소! 지는 여기서 예이츠 욕이나 더 하고 있을라니까.”


“그럼 여기서 기다리게. 있다가 나랑 같이 욕하세.”


그는 어색하게 맹조교를 안아준 후에 옥상 문 뒤로 사라졌다. 맹조교는 피교수의 사라진 쪽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팔을 잡은 채 힘들게 몸을 일으켜 옥상 난간으로 가서 캠퍼스를 내려봤다. 나처장을 삼킨 괴물은 쿵쿵 무거운 발걸음으로 광장 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인간인지 귀신인지 모를 형체들은 떼를 지어 그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광장 쪽 하늘은 별빛마저 사라져 캄캄한 암흑이 지배하고 있었다. 대학본부 옥상에는 횃불이 가물가물 보이고 있었고 아비규환의 비명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마겟돈이 따로 없었다. 저 괴물이 다시 등장한 이후로 그의 팔은 동상에 걸린 것처럼 감각이 사라졌고, 이제는 그 팔이 불에 덴 듯 화끈거리면서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난간에 몸을 기대고 광장 쪽을 멍하니 응시했다.


문득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회한이 맹조교를 사로잡았다. 이렇게 끝날 것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것인데,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한 것인가? 윗사람에게 비위를 맞추고 학생들의 눈치를 보며 끝내지도 못할 논문을 붙들고 얼마나 많은 밤을 뜬 눈으로 새워왔던가? 학비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붙들기 위해 온갖 자기 합리화를 하며 팔아넘긴 동료와 후배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갑자기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꺽꺽 소리가 목구멍을 통해 넘어왔다. 그는 엄지두덩을 꼭 문 채 눈물을 훔쳐냈다. 그때 메아리처럼 옥상 난간 너머에서도 끅끅 소리가 들려왔다. 맹조교는 몸을 내밀어 난간 아래를 내려다봤다. 눈과 입에 구멍이 뚫린 또 하나의 맹조교가 거미처럼 벽에 붙어 자신을 보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봤던 자신의 도플갱어였다. 맹조교는 온몸이 얼어붙은 채 그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도플갱어는 천천히 그에게 기어 오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검게 변한 맹조교의 팔이 부르르 떨렸다. 뭉툭한 검은 팔이 뻗어온다.


니도 외로웠나?


그리고 자기를 덮쳐오는 검은 아가리의 심연을 맞으며 숨을 놓듯이 마지막 한 마디를 뱉었다.


“어이 까망귀신….”




30분 전. 나처장의 연구실.


피교수가 빠져나간 후에도 동동이는 자신의 팔들을 펼쳐 방 전면에 처 놓은 보호막을 거두지 않았다. 지금 물러나면 파멸은 피교수를 따라잡아 그를 삼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피교수와 연결되어 있는 자신 역시 소멸될 것이다.


키쿠와 망자들은 서로에 대한 적개심이 없다. 서로를 인지하지만 마치 바람과 기름이 다르듯이 영역이 다른 영의 존재들이다. 망자들은 울고 키쿠는 웃는다. 망자들은 흩어져 떠돌고 키쿠는 모여들어 삼킨다. 하나는 기억을 붙든 자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을 지우는 자다. 그들 사이의 경계에는 불꽃이 놓여있다. 망자들은 자신을 기억해 줄 인간을 찾아 헤매고, 키쿠는 인간의 기억을 말살하기 위해 왔다. 이들이 그 기억을 지키고 빼앗기 위해 서로의 경계를 넘을 때 불꽃은 불로 번져 바람을 삼키고 기름을 태운다. 승자가 없는 싸움이다.


키쿠의 숫자가 백양대의 망자들보다 몇십 배가 많지만 적어도 이 방안에서는 우두머리 하나뿐이다. 싸움의 결과를 알기에 파멸은 닿을 듯한 거리에서 동동이를 위협하면서도 그와 쉽사리 접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동동이는 피교수를 위한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순간 파멸의 배꼽 구멍으로부터 촉수들이 창처럼 튀어나와 동동이의 이곳저곳을 찌르기 시작했다. 동동이에게 닿은 촉수들은 푸른 불꽃을 내며 사라졌다. 그러나 파멸은 키쿠들의 힘을 무한히 끌어다 쓰는 것 같았다. 촉수들은 쉴 새 없이 날아들었고 동성이의 확장된 사지에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동성이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금동이는 어쩔 줄 몰라하며 동성이에게 도망가자는 손짓을 했다. 동성이의 몸은 고통으로 움츠러들고 벽으로 뻗어있던 팔들은 시들어 사라졌다. 이제 촉수들은 그의 몸을 꽁꽁 휘감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푸른 연기와 불꽃이 피어올랐다. 망자인 동성이에게는 육신의 고통은 없었다. 그러나 존재의 기억이 소실되는 아픔은 망자들에게 육신을 넘어서는 참혹한 고통이었다. 그 고통의 끝자락에서 동성이는 피교수에 대한 기억 하나를 붙들고 있었다.




12년 전, 어느 초여름 날. 일 학년인 동성이와 30대인 영문과 피교수는 학과 대항 축구시합을 하고 있었다. 피교수는 신임 교수로 참가해서 수비를 맡았지만 연신 뚫렸고 포워드였던 동성이가 한 골을 넣었지만 결국 영문과는 법학과에게 2:1로 져서 탈락했다.
동성이는 괜히 구멍 난 신발의 흙먼지를 털고 애꿎은 책들을 가방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동기와 선배들은 학교 밖 중국집으로 가자며 모두 자리를 떴고 동성이는 그제야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그때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피교수였다.


“어이, 밥 먹자.”


“아니, 전… 괜찮습니다. 점심을 늦게 먹어서요.”


“너 신입생이지? 공 잘 차던데? 이름이 뭐니?”


“서동성입니다.”


“나도 신입생이다. 나 모르지?”


“압니다. 새로 오신 교수님.”


“밥 먹자. 내가 도시락을 좀 거하게 싸왔거든.”


“네? 괜찮은데…”


“야 좀 같이 먹자. 혼자 먹기 창피해서 그래.”


“아, 네… 그럼.”


그때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났다. 피교수는 껄껄 웃으며 손짓하면서 앞장서서 걸었다.


두 사람은 ‘귀신의 절벽’ 나무 그늘에 앉아 축구 이야기를 하며 맛나게 밥을 먹고 있다. 처음에는 낯을 가리던 동성이는 이제 얼굴을 활짝 펴고 피교수의 말에 신나게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의 관심사는 9월로 다가온 뮌헨 올림픽 아시아 예선전이었다.


“야 일본만 꺾으면 확실히 올림픽 가는 거잖아, 우리가 이기겠지?”


“그럼요. 우리한텐 그라운드의 풍운아 이회택이 있지 않습니까?”


“수비의 중심엔 우리 김호곤 선수도 있지. 내가 김호곤 스타일이거든. 아까 너한테 패스 찔러주는 거 봤지?”


“음 그게 패스였나요? 그렇게 수비하시면 올림픽 힘들 거 같은데요?”


“뭬얏! 하하하!”


그 뒤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파도 소리와, 아름답게 물든 석양과… 하루 한 끼로 살던 자신에게 도시락을 나눠준 그 사람. 자신을 데리고 앞장서 걷던 그의 등, 그의 웃음, 자신의 머리를 헝클며 농담하던 그의 손길… 어렸을 때 부모님을 여의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자신이 처음으로 느껴본 그리운 모습이었다. 그날의  짧은 기억… 그 기억이 동성이의 깊은 곳에 박제되었다. 물론 그날 이후 피교수와의 살가운 만남은 다신 없었고, 그 해 가을 한국팀은 말레이시아에게 져서 예선 탈락했고, 같은 해에 동성이는 할아버지를 여위고 야학에 위장 침투한 학생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군대에 끌려갔다. 유일한 증거는 이북출신의 할아버지와 야학에서 읽어준 브레히트의 시였다.




동성이는 이제 울음을 멈출 순간이 다가왔다고 느꼈다. 검은 촉수들은 연기를 뿜으며 그를 두 동강이 내려하고 있었고 그는 자신의 영체가 무로 소멸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그때 섬광과 함께 치치직 전기가 합선된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렸고 동성이는 정신이 돌아왔다. 동성이를 휘감았던 촉수들이 조각 나서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다가 푸른 연기로 증발되었다. 파멸은 괴성을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동동이 앞에 온몸에 오렌지 빛이 안개처럼 감도는 누군가가 서있다. 그는 가스등을 켜는 데 사용하는 긴 막대를 양손 검을 겨누고 있는데, 막대 끝에는 단 한칼에 촉수들을 끊어낸 강렬한 오렌지빛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불시의 공격을 받고 물러났던 파멸은 다시 사납게 웃으며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그는 연속 베기로 킹의 몸 이곳저곳을 순식간에 내려쳤고 갈라진 나교수의 옷 사이로 검은 먹물과 같은 진한 액체가 연기와 함께 뚝뚝 떨어졌다. 파멸이 잠시 무릎을 꿇은 사이에 일격을 가한 불꽃의 존재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동동이와 금동이도 벽을 통과해 건물 밖으로 달아났다. 그들에게 수영복 망자가 공중에서 수영을 하며 다가왔고 대학생 교복 차림의 망자 도 나타났다. 그들은 피교수가 간 방향을 가리켰다. 동동이는 밤하늘을 향해 길고 애절하게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을 듣고 캠퍼스 곳곳에 흩어져 있던 망자들이 그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망자들은 소용돌이처럼 서로를 감돌고 움직이며 교감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정경대의 건물 앞쪽이 무너지고 더욱 거대해진 파멸이 걸어 나와 수천 개의 웃음으로 키쿠들들을 불러 모았다. 망자들은 소리 없는 울음소리를 높여 더 많은 망자들을 불러들였다. 이 두 개의 진영은 이제 대학본부 옥상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최후의 마침표를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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