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는 친구들이 함정에 빠진 사실을 어떻게든 알리려고 미친 듯이 대학본부 쪽으로 달려왔으나 그곳에는 매복 중인 경찰들의 본대가 자리하고 있어서 광장 쪽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그는 본부 건물의지하실 비상구를 통해 비상계단으로 4층 옥상까지 한달음에 달려 올라갔다. 다행히 경찰의 시선은 광장 쪽을 향하고 있었다. 옥상 문을 걸어 잠그고 광장 쪽 상황을 보기 위해 달려간 민주는 숨이 턱 막혔다. 너무 늦었다!
시위대는 이미 백골단에게 에워싸여 있었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어처구니없는 배신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성자단 친구들이 저 밑에 갇혀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민주는 가방에서 배급받았던 횃불 막대기와 기름병을 꺼내 불을 붙였다. 타오르는 불을 보니 이유를 알 수 없는 용기가 솟아올랐다. 확성기의 스위치를 켰다. 무얼 말해야 하나? 무얼 외쳐야 하나? 경찰들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려야 한다. 어떻게든 친구들이 도망칠 수 있는 빈틈을 만들어야 한다. 민주의 머리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벌떡 일어나 횃불을 높이 들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시작했다.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현재.
민주는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키쿠가 정경대 건물을 부수고 나왔고 사방에서 온갖 모양의 키쿠들이 파도처럼 광장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키쿠가 무엇인지, 그 이름이 왜 불길하게 느껴지는지, 자신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민주는 사람들에게 이 상황을 알리고 친구들을 찾아야 했다. 민주는 확성기를 꼭 부여잡고 외치기 시작했다.
“저것들은… 키쿠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이제 민주는 더 이상 확성기로 외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장은 이미 키쿠들의 웃음과 사람들의 비명이 뒤섞여 아수라장이었고 그들에게 민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내려가서 친구들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확성기를 내려놓고 문 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잠긴 옥상문을 무섭게 두드리던 쿵쿵 소리와 문 열라는 백골단의 고함이 들리지 않았다. 아마 모두 도망가거나 광장에 다시 투입된 모양이다.
그때 엄청난 굉음이 울리고 몸이 흔들렸다. 동시에 하늘이 캄캄해지고 쉬익 하는 소리들이 날아다니더니 민주의 왼쪽 팔에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놀라서 보니 그의 왼쪽 팔목 위에 검은 거머리 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분수에서 치솟아 오른 촉수의 조각이었다. 손으로 쳐내려는 순간 그것은 민주의 옷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뼈마디가 서늘해지는 기분 나쁜 통증을 느꼈다. 민주는 왼쪽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조심스럽게 옥상문에 귀를 대봤다. 문 너머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감아놓은 사슬을 풀고 문을 가만히 열었다.
횃불을 들고 계단을 중간쯤 내려가던 민주는 발을 멈췄다. 누군가 3층 복도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가 다시 발을 떼려고 할 때 지나갔던 사람이 다시 거꾸로 걸어와 그를 향해 엉덩이를 돌렸다. 백골단의 헬멧을 걸친 말편자형 키쿠였다. 민주는 횃불을 휘두르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섰다.
“저리 가!”
“저… 저리….”
거꾸로 달린 키쿠의 머리통이 꿀럭거리면서 민주의 머리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키쿠는 뒤뚱거리며 계단을 오른다. 그의 머리에 헐겁게 매달린 헬멧이 계단을 오를 때마다 덜거덕거렸다. 민주는 구멍 난 자신의 끔찍한 얼굴에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으로 간신히 한 계단씩 발을 옮겼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왔을 때 그는 횃불을 키쿠에게 집어던지고 잽싸게 몸을 돌려 옥상으로 나가 철문을 힘껏 닫았다. 문이 거의 닫혔을 때 덜컥 소리가 나서 내려다보니 헬멧을 쓴 키쿠의 머리가 문 사이에 끼어 있었다. 바닥에서 민주를 올려다보는 민주의 구멍 난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민주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키쿠는 닫히다 만 문을 비집고 옥상으로 올라섰다.
“리가… 가….”
광장 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오렌지색 불꽃들이 날아다니고 거대한 키쿠는 분노의 괴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민주는 정신없이 난간 쪽으로 달아났다. 민주의 도플갱어는 뒤뚱거리며 민주를 쫓아왔다. 민주는 확성기를 집어던졌지만 쩍 벌어진 입에 박힌 확성기는 그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민주는 왼쪽 팔을 움켜 잡았다. 도망가야 하는데 발에 힘이 풀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한이 찾아왔다. 민주는 난간에 기대어 버티다가 주저앉았다.
키키키 덜그럭 키키키….
키쿠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민주는 구멍 뚫린 시커먼 자신을 노려봤다. 그의 뻥 뚫린 입에서는 불쾌한 한기가 전해졌다.모든 감각이 둔해지며 눈앞이 흐려졌다. 민주는 난간을 붙들고 키쿠를 발로 걷어찼으나 힘이 실리지 않았다. 키쿠가 무력해진민주를 삼키기 위해서 엉덩이 위로 팔을 뻗었을 때 쿵 소리가 울렸다.
옥상으로 뛰어올라온 피교수가 다짜고짜 육탄돌격을 감행했고키쿠는 뒤집어진 풍뎅이처럼 난간 위에 걸쳐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온 힘을 다해 어깨로 키쿠와 충돌했고 키쿠가 피교수에게 입을 쫙벌려 촉수를 뻗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불꽃에 머리가 박살 났다.몸뚱이는 팔다리를 휘저으며 난간 너머로 사라졌다. 백골단 헬멧이 바닥에 떼구르 구른다.
“교수님!”
“민주야, 괜찮니? 어디 다친 데는?”
“괜찮아요. 저건 뭐죠? 제 모습인데 너무 끔찍해요.”
“그건 네가 아니야. 잊어버려라.”
“교수님은 괜찮으세요? 많이 떠시는데요?”
“하하 괜찮아. 내가 이래 봬도 군에서… 아야.”
피교수는 촉수가 박힌 팔목을 주무르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민주는 피교수를 보면서 가슴이 시렸다. 왠지 비슷한 상황을 겪은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고, 산전수전 함께 겪은 동지처럼 너무 반가워 매달리고 싶은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그런데 여긴 웬일이세요? 지금 저 아래는 난리도 아녜요. 맞다, 전 친구들을 구하러 가야 해요. 가만… 이 말도, 이 상황도 왜 이렇게 익숙한 거지?”
“민주야, 솜사탕 아직 기억 안 나니?”
“아뇨. 왜 자꾸 솜사탕 얘기를….”
민주는 몸을 일으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피교수도 동시에 털썩 주저앉으며 둘은 힘없이 웃었다.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동동이가 다리를 절며 나타나 꼬리를 반갑게 흔들었다. 피교수는 끙 신음을 내여 일어나 두 팔을 벌리고 동동이에게로 다가갔다.
“동동아 빠져나왔구나. 이런 다리를 다쳤네…. 미안하고 고맙다.근데 금동이는 어디 있어?”
동동이는 꼬리를 흔들며 멍멍 짖었고, 피교수는 조심스럽게 동동이의 발을 살폈다.
“교수님, 혹시 제가 기억 못 하는 일들이 있는 거예요? 저 개도 처음 보는데 낯설지가 않아요.”
“많은 일이 있었는데… 괜찮다. 이렇게 만났으니 이제 괜찮아.”
“에? 이 말도 들은 적이 있는데….”
갑자기 동동이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민주를 보던 피교수의 안색이 변했다. 난간에 기대어 팔을 주무르고 있는 민주 뒤로 검은 물체가 풍선처럼 솟아올랐다. 광장에서 불꽃놀이처럼 치솟는 불빛에 기어올라온 키쿠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그것은 피교수의 도플갱어였다. 그와 같은 꾸깃한 양복, 같은 머리 모양, 구멍 난 눈 위로 비뚤게 쓴 안경까지….그것은 난간 너머에서 민주 머리 바로 위로 솟아올라 구멍 뚫린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민주는 아직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피교수는 나직한 목소리로 민주에게 빠르게 말했다.
“민주야… 뒤돌아보지 말고 이쪽으로 뛰어...!”
“그러고 싶은데 다리에 힘이…. 근데 왜요? 뒤에 뭐…”
민주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다가, 피교수의 도플갱어와 눈이 마주쳤다. 섬뜩한 그의 분신을 마주 한 민주는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민주를 포획하려는 도플갱어의 두 팔을 반사적으로 피해 피교수 쪽으로 기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도플갱어가 팔을 뻗어 민주의 발목을 잡았다. 동동이가 앞으로 달려 나가 사납게 짖어대며 그의 아가리가 민주의 몸을 덮치는 것을 막았고, 피교수는‘미안해’를 외치며 백골단 헬멧으로 자신의 도플갱어를 마구 때렸다. 동동이와 피교수의 방해로 민주를 삼킬 수 없게 된 도플갱어는 민주를 난간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피교수가 헬멧을 팽개치고 민주의 두 팔을 잡고 버텼으나 역부족이었다. 검은 자국이 박힌 피교수의 왼쪽 팔은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민주의 다리는 질질 끌려 난간 위에 걸쳐고 민주와 도플갱어의 무게 중심이 난간 너머로 기울어 민주의 몸이 난간 너머로 훅 떨어졌다. 피교수는 난간에 가슴이 세게 부딪혔지만 민주의 손을 놓지 않았다. 도플갱어는 민주의 다리를, 피교수는 민주의 팔을 붙들고 있었고 민주는 그 사이에 끼어 공중에 매달려있다. 그는 피교수의 팔목을 필사적으로 붙든 채 도플갱어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그는 민주의 두 다리를 뭉툭한 손으로 끌어안고 시계추처럼 흔들기 시작했다. 요동치는 무게 때문에 피교수는 민주의 힘없는 왼손을 놓쳤다.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꼭 잡아. 민주야, 꼭 잡아!”
하늘을 날아다니는 섬광이 피교수의 얼굴을 비췄다. 불꽃의 비 속에서 민주는 난간 너머 자신의 손을 필사적으로 잡고 있는 피교수를 올려다보며 기억의 닫힌 문이 조금씩 열렸다. 그래… 비 오던 날… 베란다, 젊었던 그의 얼굴, 이렇게 꼭 붙든 손… 그리고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그날의 기숙사 침대, 아이린 언니의 음성, 책, 거울 복도와 안갯속 터널, 그림 속 캠퍼스, 혜린 언니, 키쿠의 공격….그리고 그 노랫소리….
“솜사탕 후우~…”
민주는 피교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민주의 손이 피교수에게서 점점 빠져나가고 있었다. 피교수는 몸을 더 기울였고 동동이는 뒤에서 피교수의 바지단을 물고 버텼다. 아래에서 요동을 치는 자신의 도플갱어 때문에 피교수의 몸까지 난간 너머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민주야!...”
“그만… 놓으세요….”
“아니야. 꼭 잡아!"
‘꼭 잡으라’는 그 말과 함께 피교수는 그 0.1초… 잊었던 그날의 0.1초가 기억났다. 그 찰나의 순간. 차라리 그냥 보내주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던 그 짧은 순간, 아내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졌고 다시 그 손에 힘을 줄 때 아내의 가는 손목은 빗물에 미끄러지며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피교수의 눈에 핏발이 섰다. 살릴 수 있었다. 놓쳐선 안 됐다. 아내의 죽음은 내 책임이었다! 민주의 발길질에 안경이 날아간 피교수의 도플갱어는 저 아래에서 뻥 뚫린 눈과 입으로 이것이 비열한 너의 실체라고 비웃으며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간호대 지하의 어둠 속에서 민주를 만났을 때 피교수는 잠시나마 민주를 아내로 착각했다. 성격은 다르지만 얼핏 얼핏 아내와 놀랍도록 닮았다고 생각한 이 아이가 불꽃의 비 속에서 그날 아내의 표정으로 다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교수님… 안 되겠어요….”
“아니야!”
민주의 손이 피교수의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는 순간, 피교수는 몸을 던져 민주의 몸을 끌어안았다. 동시에 동동이가 난간을 차고 함께 뛰어내려 키쿠의 팔을 물어뜯었다. 푸른 불꽃이 일며 팔이 소멸되고 키쿠는 동동이의 머리를 삼켰다. 그러나 동동이는 수많은 팔들을 뻗어 키쿠의 등을 뚫고 그를 두 동강이 내며 두 사람을 감싼 채로 바닥에 함께 떨어졌다. 피교수와 민주는 상처 없이 바닥에 가볍게 뒹굴었다. 피교수가 민주를 불렀다.
“민주야, 괜찮니?”
“교수님!….”
민주는 피교수를 보며 울먹거리더니 달려와 막무가내로 껴안았다.
“민주야….”
“교수님은…. 나의 영원한 할로우맨이에요!”
“응?”
“몰라요. 우린 솜사탕 전우예요! 여튼….”
“기억이… 돌아왔구나! 암 우린 솜사탕 전우… 가만…. 동동이는...?”
두 사람은 주변을 살폈다. 저만치 두 조각 나 떨어진 피교수의 도플갱어는 연기로 사라져 검은 자국만 남았고 그 옆에 동동이의 온몸은 푸른 불꽃으로 타고 있었다. 피교수는 급히 상의를 벗어 불꽃을 껐으나 이미 검게 그슬려 피투성이가 된 동동이는 마지막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동성이는 빙의에서 거의 빠져나온 채로 동동이를 안타깝게 쓰다듬고 있었다. 금동이는 동동이의 머리맡에서 눈물을 훔치며 울고 있었다. 동동이와 아직 이어져있는 동성이의 다리에서 푸른 불꽃이 다시 살아났고 그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피교수가 상의로 그 불꽃을 끄려 하자 동성이가 피교수를 보며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그의 빙의가 완전히 이탈되는 순간 동동이는 숨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민주는 동동이의 머리를 안타깝게 쓰다듬었다.
“어떻게, 나 때문에… 동동아!”
불꽃이 동성이의 무릎까지 번졌고 피교수는 결심을 한 듯 상의를 펼쳤다.
“미안하다 동동아!”
피교수는 상의를 내리쳐 살아난 푸른 불꽃을 단호하게 내리쳤다. 동동이의 눈이 감기고 숨이 멎었다. 민주와 두 망자는 충성을 다한 한 마리의 개를 위해 애달프게 울었다. 피교수는 비장하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우리의 울음이 너에게 닿기를!”
동동이를 빠져나온 동성이의 다리 일부는 사라졌고 남아있는 다리의 끝 부분에는 푸른 불꽃이 살아일렁인다. 그의 영은 소멸이 시작된 것이다. 동성이와 금동이는 작별의 인사로 동동이의 시신 위를 느리게 두세 번 오갔다.
“동성아!…”
“동성 오빠는 괜찮은 거예요?”
피교수는 민주에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의 사라진 다리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미안하다 동성아. 너에게 내가 몹쓸 짓만 하는구나.”
동성이는 공중에 떠서 한 바퀴 돌며 피교수를 잠시 보다가 금동이와 함께 무서운 속도로 광장 쪽으로 날아갔다. 비로소 피교수의 눈에 들어온 그곳에서는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간호대 꼭대기의 다락방 창문으로부터 뻗어 나온 날카로운 오렌지빛 광선들이 광장의 키쿠들을 가차 없이 베고 있다. 파멸은 격노하여 발을 구르고 키쿠들은 합체하여 거대한 촉수들의 떼로 다락방을 향해 날아간다. 접근하는 촉수들은산산조각 나고 푸른 불꽃과 연기가 짙은 안개로 하늘을 뒤덮는다. 그러나 어느 틈에 건물 뒤로 돌아들어간 촉수들은 반대편 복도로 난입해 다락방을 덮치고 일순간 다락방은 어둠에 휩싸인다.
정적이 흐른 후…
간호대에서 눈부신 오렌지빛 폭발이 일어난다. 파멸은 뒤로 주춤하며 신음한다. 그 많던 촉수들이 일순간에 증발하여 만들어진 짙은 잿빛 안개 사이로 누군가가 서서히 강하한다.
3미터에 달하는 키에 온몸에 감도는 오렌지빛 아우라. 글자들이 가득 써진 가죽 갑옷에 책 페이지들이뻗어 나온 날개, 불화살촉처럼 오렌지빛 불꽃이 일렁이는 긴 막대창.그리고 긴 은발에 노인과 여인이 함께 느껴지는전사의 얼굴.모습을 드러낸 백양대의 수호령은 무기 끝을 적에게 겨눈 채 지상에 결연하게 발을 딛는다.쿠웅. 주변의 검푸른 연기들이 일시에 증발한다.
“혜린이?”
분명 긴 머리와 얼굴의 일부는 혜린이었다. 게다가 책표지로 만든 듯한 갑옷과 책장들이 펼쳐진 날개는 분명 혜린의 책, 피교수의 일기였다. 반면에 손에 들고 있는 무기는 가스등을 켜는 긴 막대였고 짧은 은발 밑의 단호한 얼굴 역시 그 노인을 닮았다. 밤낮으로 갬퍼스에 밀려드는 바다의 회색 안개가 무의식과 망각의 파도였다면 이 노인이 관리해 온 오렌지빛 가스등은 아마도 그 허무의 안개를 밀어내고 기억과 의식을 지키는 백양대의 방파제였는지도 모른다. 같은 이유로 혜린은 기억의 책을 부여잡은 채 바다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은 것일까?키쿠가 아무리 그 수가 많고 강력하다 해도, 혜린과 노인의 정념이 담긴 수호령의 힘은 막강했다.
착지한 그에게 파도처럼 밀려드는 키쿠들은 쭉정이처럼 불의 창에 베여나갔다. 긴 막대 창은 이제 긴 칼처럼 막대 전체에 날이 선 채 오렌지 빛 영기로 일렁이고 있다. 그 칼 끝에서는 불꽃 화살이 계속 날아가 키쿠들을 관통하여 소멸시켰고, 또 그 칼은 길이가 한없이 길어지고 날이 자유롭게 구부러져 파도처럼 몰려오는 키쿠들을 그물로 뜨듯 단 한 칼에 날려버렸다. 그러나 키쿠들의 숫자는 줄지 않았다. 파멸의 배꼽에서 끝도 없이 흘러내린 촉수들은 분열과 합체를 반복하며 수호령에게 계속 돌진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싸움 속에서 수호령은 처음으로 피교수를 돌아봤다. 혜린과 노인의 눈은 그에게 뭔가를묻거나 부탁하는듯했다.
“아, 그렇게 절 보시면….”
피교수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인디아나 박사님, 저분이 내게 뭘 원하는 걸까?”
“음…영화에선 막판에 주인공이 눈을 꼭 감던데.”
“날 보고 있는데…그건 아니지 않을까?”
"그래도 해봐요."
둘은 눈을 꼭 감는다. 피교수가 살짝 샛눈을 떠보니 수호령은 계속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민주야, 이건 아닌 거 같은….”
민주는눈을 감으니 할로우맨 수업이 떠올라 갑자기 피교수의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자기도 모르게…
“서로 기억할 때 우리는 인간이다.”
수호령은 이 말을 들은 듯 갑자기 칼을 멈추고 카스미(霞), 즉 안개의 겨눔세를 취했다. 오렌지빛 아우라가 안개처럼 퍼져나간다. 키쿠들이 멈칫한다. 피교수가 손을 꾹 눌러 눈을 뜬 민주가 흥분한다.
“교수님, 이거 맞나 봐요! 키쿠는 망각, 우리는 기억!”
피교수는 민주의 말을 받아 크게 외친다.
“서로 기억할 때 우리는 인간이다.”
순식간에 동성이와 금동이가 옆에 나타났다. 수많은 망자들도 이 말을 들은 듯, 일순간 모여들어 거대한 원을 만들어 키구들을 에워쌌다. 느낌은 없었지만 동성이는 피교수의 손을, 금동이는 민주의 손을 잡고 있었고 망자들은 수업시간에서처럼 팔을 무한대로 늘여 서로를 연결했다. 피교수는 동성이의 잡을 수 없는 손을 꼭 잡았다. 키쿠들이 위협감을 느끼고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울리며 일제히 달려들 때, 수호령은 칼을 높이 쳐들었다가 땅에 힘 있게 박았다.
순간, 수호령의 갑옷과 날개에 새겨진 수많은 기억의 글자들이 날아올라 망자들에게 박혔다. 동시에 칼에서 뿜어져 나온 불꽃이 땅과 공중으로 춤을 추며 뻗어나가 캠퍼스 전체의 가스등과 연결되었다. 가스등들은 눈이 부시게 타오르기 시작했고 유리가 깨지며 뻗어 나온 불꽃들이 사방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을 완성했다. 마법진으로부터 오렌지 빛이 일렁이는 거대한 오로라가 솟아나 새카만 하늘을 오렌지빛 장막으로 밝게 물들였다. 축제를 위해 걸어 놓았던 만국기들이 무대 효과처럼 함께 공중으로 올라가 나부끼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토록 혼돈의 소음이 요란하던 광장엔 정적이 흘렀다.
파멸을 비롯한 모든 키쿠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마법진의 지박(止泊)과 하늘에 펼쳐진 오로라 장막이 누르는 주박술의 강력한 압력 때문에 키쿠들은 꼼짝도 못 하고 난감해하며 끙끙대고 있었다. 킹은 포박을 당한 채 분노의 포효를 내뱉었다. 순간, 나처장의 조그만 넥타이가 아직 매달린 파멸의 목을 무언가가 빠르게 꿰뚫었고 킹은 입으로 쿨럭 검은 연기를 토했다. 동성이었다. 오렌지빛 아우라가 그를 감싸고 있고 그 안에 보이는 것은 대학생 동성이었다. 백양대의 모든 망자들이 기억의 조각을 받아 일시적으로 생전의 모습과 기억을 되찾았다. 그것이 주박술의 핵심이었다. 마법진과 오로라로 인해 증폭각성된 기억의 힘은 키쿠를 혼란에 빠뜨렸고, 이생의 기억을 회복한 망자들의폭발적인영기에 눌려 키쿠들은 감전이 된 듯 얼어붙었다. 수호령의 아우라가 감싸여 망자들은 생전의 온전한 모습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수호령은 마법진을 유지하기 위해 꼼짝 않고 온 힘을 쏟아부었고, 망자들은 그의 칼과 화살이 되어 어지러운 궤적을 그리며 키쿠들을 여기저기에서 공격했다. 무서운 속도로 키쿠들을 베고, 꿰뚫으며 섬광처럼 번쩍였고 키쿠들은 곳곳에서 푸른 불꽃과 함께 잿빛 연기로 사라졌다.
한편,
송희, 연주, 인석, 경덕은 대학본부 앞에서 자신들 앞에 멈춰서 있는 아크로뱃 두 마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하나는 인석이의 도플갱어였고 다른 하나는 송희의 도플갱어였다. 인석이의 팔 하나는 목 앞에 달려 있었고 다른 하나는 엉덩이에서 솟아나 있다. 송희의 팔 하나는 정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옆구리에 달려있었다. 둘 다 사냥감을 공격하기 위해 아가리를 한 껏 벌리고 있었다. 그 벌어진 입 속은 아무것도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인석이는 그 입 속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다가 물러섰다. 이 둘은 마구 공중제비를 돌면서 돌진하다가 서로 부딪히면서 정지되어서 둘이 마치 기이한 탱고를 추는 한 쌍처럼 보였고, 마치 정담을 나누는 듯 키키쿠쿠 속삭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인석이가 갑자기 킬킬 웃었다. 연주가 한 마디 했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니?”
“아 미안. 되게 끔찍한데, 왜 웃기지? 그러니까 내 말은, 너와 나의 도플갱어가 저렇게 다정하게 탱고를 추면서 우호적으로 우릴 잡아먹으려는데! 이게 안 웃기냐고!? 저 코끼리 코 같은 내 팔이랑 엉덩이에 꼬리처럼 들러붙은 내 팔이 막 웃겨 죽겠다고! 이 괴물 같은 도플갱어 새끼!”
정신이 반쯤 나간 인석이가 자신의 도플갱어에게 발길질을 하려 할 때, 오렌지빛 불꽃이 두 도플갱어를 관통했고 이들은 푸른 불꽃이 일며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아우라에 둘러싸인 금동이가 인민군 복장으로 허리에 손을 하고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인석이는 넋이 나갔다. 금동이 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민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또… 북한군이 민주처럼 말하네.”
인석이는 킥킥 웃으며 뒤로 넘어갔다. 경덕이가 인석이를 받아 바닥에 뉘었다. 금동이 뒤쪽에서 민주와 피교수가 달려왔다.
“얘들아 괜찮아?”
“민주야!”
송희가 울음보를 터뜨리며 민주를 꼭 끌어안았다. 연주도 민주의 손을 꼭 잡았다. 인석이는 여전히 킥킥거리며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아 다행이다. 모두 무사하구나! 근데 인석이는 왜 저래?”
“얘가 좀 많이 놀랬다. 괜찮아.”
경덕이가 부은 얼굴로 민주를 안심시키려 억지로 웃다가 금동이와 소통하고 있는 피교수를 보고는 민주에게 눈짓을 했다.
“근데 저 교수님은?...”
“아… 우리 과 피교수님. 날 구해주셨어….”
금동이는 민주를 향해 인민군식 경례를 하고는 불꽃이 난무하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경덕이가 다시 물었다.
“저 북한군은 어떻게 알아?”
“쟨 금동인데 육이오 때 여기서 전사했대.”
“뭐? 그럼… 저 날아다니는 것들은 전부…”
“응, 맞아.”
송희와 연주도 번갈아 질문을 쏟아낸다.
“그럼 저 종이날개 달린 천사는?… 저 키쿠라는 것들의 정체는 뭐야?… 저 기획처장 닮은 괴물은?… 왜 귀신들이 우리를 도와주는 거야?…”
“얘들아, 뭘 물어봐 킥킥. 이건 다 꿈이야 꿈!”
인석이가 바닥에서 몸부림을 치며 소리 질렀다. 민주는 피교수에게 난감한 눈짓을 보냈다. 친구들에게 설명을 어디까지 해줘야 할지 묻는 눈치였다. 피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을 직접 겪고 들은 민주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이 캠퍼스가 피교수의 깨어난 의식이 빚어낸 세계라는 것, 자신들이 피교수의 일기장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라는 것, 그리고 키쿠는 이 모든 것을 지우려고 공격 중이라는 것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까? 피교수조차도 혼란스러웠다. 혜린이가 들려준 이야기는 자신도 아직 감당하기 어려웠고 오늘 벌어진 일과 그날 벌어진 일 중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새로운 분기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늘로부터 3일 후 축제 첫날, 눈앞에서 민주가 독서관 옥상에서 추락해서 죽었다. 옥상에서 전단을 뿌리며 스피커로 구호를 외치던 민주와 학생들을 진압 경찰들이 습격했고 민주는 이들을 피해 간신히 발 하나 놓을 공간이 있는 건물의 바깥 턱으로 내려가 횃불을 들고 외쳤다. 경찰들은 민주에게 소화기를 분사했고 민주의 몸은 하얀 누에고치처럼 되었다. 여기 있는 민주의 친구들이 경찰에게 그만하라고 고함을 지르고 돌을 던졌지만 민주는 결국 중심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민주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눈을 채 감지 못한 민주의 하얀 머리 뒤로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절규하며 민주에게 달려간 친구들은 결국 그의 시신을 지키지도 못한 채 백골단에게 모두 끌려갔다. 피교수는 민주를 보기 위해서 다가가려 했지만 경찰들이 그를 거칠게 밀어냈고 그의 시신은 들 것에 실려 신속히 치워졌다. 순식간에 진압이 완료되고 도서관 앞은 곧 한산해졌다. 그러나 피교수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어 웅크리고 앉아 자리에 남은 핏자국을 말없이 한참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두운 가정사를 끄집어내어 협박한 나처장에게 굴복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밥그릇도 지키고 아무도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맹조교가 자기를 위한답시고 대신 제출한 그 명단을 자신이 막았더라면 민주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우유부단함, 아니 비겁함이 죄 없는 생명을 대가로 치른 것이다. 아내의 손을 놓친 그날처럼, 죄책감과 수치심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때, 동동이의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금동이가 망자들을 동원해 드디어 혜린의 책이 있는 위치를 찾아낸 것이다. 피교수는 두 손으로 마치 민주가 그곳에 누워있는 것처럼 쓰다듬으며 미안하다를 몇 번이나 되뇌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그는 간호대 지하에서 무사한 민주를 다시 만났고, 함께 3일 전의 현실로 돌아왔다. 비록 민주는 기억을 잃었지만 옥상에서 자신의 손에 매달린 채 기억을 되찾았고 도서관의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순간 피교수, 민주, 그리고 모두의 실존이 곧 진실이었고 이것이 새로운 분기건 아니건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고약한 운명은 다른 날 다른 형태의 죽음을 보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피교수는 싸우고 싶었다. 무엇이 저 어둠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긴 터널을 함께 이겨낸 것처럼 끝까지 싸워서 혜린과 민주와 모두를 지키고 싶었다. 민주와 친구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송희가 불꽃이 이는 지상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시록에 나오는 아마겟돈 같아. 신과 악마의 마지막 싸움.”
송희는 자신과 친구들의 팔목에 새겨진 검은 표식을 보며 탄식했다.
“이게 그 짐승의 표인가?”
“무서워 송희야…”
늘 냉정했던 연주가 울먹였다. 민주가 이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격려했다.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야. 봐, 나도 여기 맞았는데 별 것 아니더라고.”
“근데 난 팔이 왜 이렇게 차갑냐. 꼭 동상 걸린 거 같은데…”
정신을 차린 인석이가 걱정스럽게 자신의 팔을 주물렀다. 민주는 옥상에서 만난 도플갱어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짐승의 표… 맞는지도 모른다. 아까 맞닥뜨린 도플갱어는 자신과 피교수인 동시에 끔찍한 짐승이었으니까… 친구들의 마음을 격려하던 민주의 마음조차 밑으로 꺼져갈 때, 갑자기 노랫소리가 들렸다.
“솜사탕 후우~ 솜사탕 후우~
몽실몽실~ 푸우 뭉게뭉게 푸우~.”
피교수가 노래를 하고 있다. 언어가 그 표현의 한계에 부딪힌 곳에서, 때론 노래가 그 진공을 채우기도 하는 것일까. 민주는 노래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가뜩이나 음치인 피교수는 마음의 부담 때문인지 이 동요를 큰 소리로 군가처럼 부르고 있었다. 섬광이 난무하는 싸움터 한가운데에서 과장된 몸짓까지 넣어서 부르니 묘한 비장미마저 느껴졌다.
“야 저분 왜 저러시냐?”
민주는 인석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노래를 함께 따라 불렀다. 민주의 소리도 피교수를 따라 점점 커졌다. 피교수가 망쳐버린 곡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워낙 힘이 들어간 데다가 손을 위아래로 흔드니 영락없는 데모가였다. 완벽한 실패였지만 눈치 없는 피교수는 노래를 두 번 더 반복하고 마쳤다. 네 사람은 멍하니 민주와 피교수를 쳐다봤다. 경덕이가 물었다.
“이게 무슨 노랩니까?”
“경덕아, 이 노래를 부르면 힘이 막 나고 기분이 막 좋아져!”
“아… 힘이 나고 기분이 막…?”
“민주야 근데 솜사탕이 왜 거기서 나와?”
인석이가 끼어들었다. 민주 대신 피교수가 활짝 웃으면서 답했다.
“그건 말야. 내가 이번 축제 때 너희들에게 이만~한 아니 산만~한 솜사탕을 사줄 거거든.”
“에이 밥도 사시고 술도 사주셔야죠.”
인석이가 엉겼다.
“그래, 솜사탕, 밥사탕, 술사탕 내가 다 쏜다!”
“오 예~ 술사탕 쭈욱~ 밥사탕 푸욱~ 후루룩 뚝딱 꺼억~”
인석이의 순발력 있는 패러디에 오랜만에 웃음이 흘렀다. 피교수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너희도 약속하자.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축제 때 나랑 만나자.”
“네, 교수님, 축제 때 꼭 만나요!”
송희가 울먹이며 웃었다. 인석이가 분위기를 띄웠다.
“야 너 울다가 웃으면 거기에…”
송희가 인석의 등짝을 갈겼다. 그렇게 아주 잠시 동안 일상의 순간이 돌아왔고 피교수의 노래가 어쨌든 한몫을 했다. 축제는 아마도 열리지 못할 것이다. 이 어두운 밤을 살아서 넘길 수 있는 지도 불확실했다. 그래도 축제를 꿈꾸고 솜사탕의 맛을 상상하면서 희망은 살아났다. 연주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저기 사람들이 더 있어!”
망자들의 공격으로 수많은 키쿠들이 연기로 사라지면서 이곳저곳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보였다. 학생들도 있었고 교직원도 있었고 경찰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구해준 할아버지 수호령과 망자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삼천 번을 불러야 한번 돌아볼까 말까 했던 무정한 산 자들이 이제 아우라로 빛나는 망자들의 생전 모습에 열광하며 응원을 하고 있다.
피교수는 이들을 보며 뭉클하여 속으로 외쳤다.
“그대들의 울음이 닿았구나!”
아우라의 망자들은 화살처럼 캠퍼스를 가르며 키쿠들을 수없이 관통했고 이제 키쿠들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었다. 킹도 이제는 웃음소리조차 포기하고 거대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피교수는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혜린이가 수호령으로돕고 있다. 아마 이것이 새로운 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키쿠들은 전멸하고, 학생들은 자유롭게 풀려나고, 힘을 잃은 경찰은 물러나고, 나처장은 사라지고, 이제 새 날이 밝을 것이다. 아마도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되리라는 희망이 솟아났다. 그때 연주가 하늘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오로라… 좀 이상하지 않아?”
확실히 그 찬란하던 빛은 많이 어두워졌고 군데군데 곰팡이가 슨 것처럼 보였다. 피교수는 오로라를 유심히 살폈다. 오렌지 빛을 배경으로 검은 연기들이 하늘로 올라가 빛의 장막에 들어붙는 것이 보였다. 푸른 불꽃을 내며 연기로 사라진 키쿠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매우 미세한 촉수들로 해체된 것이었고 그것들은 공중으로 스멀스멀 올라가 자신들을 압박하고 있는 오로라 장막에 끝없이 들러붙어 표면을 갉아먹고 있었다. 삭은 천처럼 오로라 조각들이 힘없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피교수는 앞으로 달려 나가 외쳤다.
“동성아! 그만! 키쿠들을 죽이면 안 돼!”
동성이가 날아와 피교수가 가리키는 곳을 봤다. 그는 무서운 속도로 공중으로 치솟아 오로라를 한 바퀴 돌고는 수호령이 있는 곳으로 급강하해 내려왔다. 망자들이 공격을 일시에 멈췄다. 정적이 잠시 흐르고…
“늦었다…!”
피교수의 탄식이 끝나기 무섭게 오로라의 장막은 잿빛으로 어두워지고 마지막으로 한번 깜빡이더니 신기루처럼 일순간에 땅으로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가스등들도 모두 터지며 불꽃의 선들로 캠퍼스 전체를 연결했던 마법진도 모두 사라졌다. 하늘을 날던 망자들도 아우라의 빛을 잃고 아래로 추락하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수호령의 칼 끝에서 일렁이고 있는 불꽃을 제외한 모든 오렌지 불빛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