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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Oct 06. 2024

30. 등불이 꺼지면 아침이 온다

아담한 일인용 병실.


아직 차갑게 느껴지는 3월의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들어와 하얀 벽에 빛과 그림자를 나누고 있다. 벽에는 두 개의 그림이 걸려있다. 하나는 렘브란트의 그림인데 색이 많이 바래 있고 아귀가 맞지 않는 낡은 액자는 흰 벽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또 하나의 그림은 목탄과 연필로 그린 커다란 캠퍼스 풍경화. 미완성인 채로 액자 없이 벽에 붙어있다. 군데군데 선이 뭉개졌고 끝 부분은 말려있다. 병상 옆 작은 협탁에는 성경과 묵주, 그리고 빨대가 달린 물병이 놓여있고 그 밑에는 먼지가 내려앉은 노트들이 가득 쌓여있다. 창가에는 작은 수선화 화분이 놓여있다. 병실은 매우 고요하고 인공호흡기의 작은 기계음과 뽀그륵 거리는 물소리만 반복된다.  


간호사 둘이 들어온다. 환자의 산소포화도와 바이탈을 체크하고 차트에 적는다. 젊은 간호사가 수간호사에게 보고한다.


“수치 모두 정상입니다. 큰 고비 넘겼네요. 보호자 깨워볼까요?”


“아니야. 모처럼 좋은 꿈을 꾸고 있나 보네. 어디… 먼저 602호로 이동하세요.”


수간호사는 수액 속도를 조절하고 차트를 마무리한다. 젊은 간호사는 인사를 하고 나가다가 벽에 붙은 풍경화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한다. 손가락으로 그림을 살짝 만지려는데 병실 문이 열린다. 간호사는 화들짝 놀란다. 복도가 보이고  아무도 없다. 젊은 간호사는 다시 고개를 갸웃하고 걸어 나가다 뭔가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다. 수간호사는 아침부터 왜 이리 덤벙대냐며 핀잔을 주고 앞서 나간다. 젊은 간호사는 억울한 듯 입술을 내밀며 따라나간다. 병실 문이 닫힌다.


닫힌 문 앞에 회색 중절모를 깊게 눌러쓰고 회색 레인코트를 입은 누군가가 서있다. 그는 쉬익 숨소리를 내며 방 안을 둘러본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백양대를 그린 그림 앞에 선다. 잠시 그림을 살피던 그는 무엇을 발견한 듯 주머니에서 손을 빼서 그림의 한 곳을 가리킨다. 뭉툭한 두 개의 살덩이로 이루어진 손 끝은 그림 속에 찍힌 점들을 따라간다. 쿠쿠~ 신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그는 기우뚱 환자 쪽으로 돌아선다. 중절모 밑으로 그의 검은 눈구멍이 얼핏 보인다. 화분에 핀 수선화 꽃잎들은 어느새 누렇게 말라 고개를 숙였다 ….


침대 옆 작은 탁자에 엎어져 보호자가 잠들어 있다. 그의 손 밑에는 낡은 일기장의 빈 페이지가 펼쳐져 있다. 회색 방문자는 빈 노트를 노려보다가 튜브를 꽂고 있는 환자의 얼굴로 몸을 기울인다. 되새김질을 하듯 그의 비대한 뒤통수가 꿈틀대기 시작하는데, 조금 열린 창틈으로 찬 바람이 들어온다. 바람결에 빛바랜 작은 종이 조각이 나풀 들어와 방문자의 시선을 끈다. 종이 조각은 깃털처럼 가볍게 빈 노트 위에 내려앉는다.


쿠쿠쿠. 방문자가 그르렁 대며 노트 쪽으로 몸을 돌린다. 종이조각은 노트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진다. 동시에 빈노트에 글자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하고, 엎드려 자고 있는 보호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방문자가 급하게 뻗은 뭉툭한 살덩이가 그 글자들에 닿자 푸른 연기가 피어오른다. 키이이~ 바람 빠지는 소리. 렘브란트 그림이 끼익 기울고 문이 살짝 떤다.


종이 위에 쓰인 글이 보인다.


등불이 꺼지면 아침이 온 것이다.

1971


잠시 후, 병실 밖 복도 어딘가에서 부르르 진동이 울리고, 삐이~ 날카로운 심정지 경고음이 울린다. 602호에서 젊은 간호사가 뛰어나오며 외친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로 달려간다. 그들을 투과하여 602호에서 복도로 뒤뚱거리며 나오는 회색 방문자. 한 꼬마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1971년 어느 날 저녁, 백양대.


그는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벤치에 앉아있다. 아직 야외극장이 들어서기 전인 이곳은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황무지였다. 바닷바람을 이겨낸 들꽃과 억센 풀들이 드문드문 보이고, 밤이면 조명이 없는 언덕 아래의 움푹 파인 공터는 검은 바다 안개가 밀려와 땅과 물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의 무릎 위에는 빈 노트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두 손이 포개어져 있다. 시간이 멈춘 듯 이 순간은 적막했고 캠퍼스의 소음도, 파도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바다를 비추는 등댓불처럼 그의 시선은 땅거미와 함께 밤안개가 파도 위로 몰려오기 시작하는 검붉은 바닷가를 훑으며 누군가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는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는 듯이 눈을 감는다.


망자는 죽음의 뱃사공 카론의 배를 타고 다섯 개의 강을 건너 저승으로 떠나간다고 그리스 신화는 전한다. 슬픔의 강 아케론, 한(恨)의 강 코키투스, 불의 강 플레게톤, 망각의 강 레테, 그리고 전율의 강 스틱스. 이생에 남아 떠도는 망자들은 어쩌면 슬픔과 한의 강을 떠나기 거부한 자들 인지도 모른다. 망각의 불길이 결국 서서히 그들을 잠식해서 강제로 천국과 지옥의 전율 앞에 세우기 전까지, 그들은 자신을 기억해 줄 단 한 사람을 찾아 저승의 강을 건너지 않고 서성이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간혹… 강 저편에 이르기 전에 긴 망각의 잠에서 불현듯 깨어난 자들이 있다. 이생의 모든 것을 소멸하는 불의 강마저 지우지 못한 기억의 마지막 한 조각을 나침반 삼아 이들은 번민과 고통의 칠흑 같은 강을 역류하여 돌아온다고 한다. 그렇게 다시 도달한 이생의 강변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버거운 인생을 또다시 감내할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한번 스쳐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는 가혹한 인생. 제대로 닿기도 전에 손 안의 안개처럼 사라진 사람들…. 그 서툴렀던 시간들로 다시 한번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사람을 더 깊게 보듬으며, 서로 회한의 실수와 상처들을 고백하고 용서 수 있다면, 설사 순리의 질서를 기망한다 해그것은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꿈이 아닐까? 그들은 그 꿈을 계속 꾸기 위해 망각을 거부하고 돌아온 것이 아닐까?


그는 뭔가를 찾은 듯 눈을 다. 안개 기둥들이 거센 파도와 뒤엉킨 곳에 용오름바람이 일었고, 파도와 안개가 일시적으로 물러난 그 잿빛 공간 속에서 얼핏 바위인지 사람인지 모를 그림자 같은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둘, 셋, 넷…. 하나하나를 눈에 담던 중에 안개가 다시 모든 것을 덮었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이 있던 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안 추워?”


몸이 가늘게 떨렸다. 눈에서 왈칵 눈물이 흘렀다. 그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붙들고 살아온 단 하나의 기억. 아주 어렸을 때, 이불을 덮어주며 이름을 불러주던 그 음성. 잠결에 눈을 뜬 작은 몸을 따뜻하게 안아주던 그 사람. 전구불이 일렁여서 그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행복했던 그 찰나의 기억. 단 하나 남은 아빠의 조각. 그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또다시 나를 찾아왔.



눈물을 훔치고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일어나 천천히 돌아선다. 삼십 대 중반의 젊은 피교수가 눈앞에 서 있다. 캠퍼스의 가스등이 켜지고 몰려오는 안개는 오렌지 빛으로 물든다. 멈추었던 모든 것이 영롱한 색채와 음향으로 다시 살아난다.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들려오고, 언덕에는 반딧불의 유희와 벌레 우는 소리가 가득하다. 캠퍼스의 스피커에서는 존 덴버의 신곡 “Take Me Home Country Road”가 흘러나온다. 연일 계속되고 있던 교련 반대 시위의 함성도 아득하게 들린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간은 고요했다.


민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공연 무대에 선 배우처럼, 첫 대사를 시작하면 모든 것이 너무 빨리 흘러갈 것만 같았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의 여백 속에 숨어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그도 같은 생각일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냥 서있다.  


한 폭의 그림처럼….


그렇게 영원한 그림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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