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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Oct 05. 2024

29. 파멸의 끝

수호령의 주박에서 풀려난 파멸은 기지개를 켜듯 두 팔을 쭉 위로 뻗었고 섬뜩한 웃음소리와 함께 배꼽이 활짝 열렸다. 남아있던 광장의 키쿠들이 그 배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배는 점점 부풀어 올랐고 나처장의 남은 옷조각들은 산산조각이 나 사라졌다. 


수호령은 칼을 다시 고쳐 잡고 겨눔 자세로 파멸과 맞섰다. 바다 쪽에서 검은 안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수호령은 그의 모든 기를 끌어모았고 칼끝의 불꽃은 눈이 부실 정도의 기세로 활활 타올랐다. 그 빛과 대비되어 파멸의 몸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어느덧 모든 키쿠를 흡수한 파멸은 거대하고 완벽한 검은 구체가 되어 서서히 공중으로 부양했다. 그것은 모든 빛을 흡수한 듯 밤하늘보다 더 깊었고 이제 웬만한 건물 두세 개를 합쳐 놓은 것만큼 커졌다. 블랙홀 같은 검은 구체가 된 파멸이 내는 불길한 웃음소리가 캠퍼스에 울려 퍼졌다.


“키키키키!!”


피교수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 검은 구체 속에서 얼핏 나처장사악한 눈이 보였다. 그 눈은 안개에 싸인 캠퍼스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마침내 자신을 향했다. 그 뱀 같은 눈이 분명히 피교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얘들아, 저쪽으로 뛰어 어서!”


그는 야외극장 쪽을 가리키고 자신은 반대 방향인 대학본부 쪽으로 뛰었다. 구체는 소리 없이 피교수의 머리 위로 솟구쳤고 몇 번 빙글빙글 회전하더니 피교수를 향해 급강하했다. 피교수는 몸을 날려 굴렸지만 그 공격을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킹의 분노한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수호령이 자신의 앞에서 그 구체를 칼로 막아서고 있었다. 그러나 수호령에 비해 킹은 이제 너무나 커졌고 구체에 박힌 칼날의 불꽃은 언제라도 꺼질 것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수호령의 발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수호령은 피교수를 돌아봤다. 서두르라는 눈짓.


피교수는 몸을 일으켜 대학본부 건물을 향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파멸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고 검은 구체는 맹렬하게 회전했다. 구체에 박힌 칼날은 푸른 불꽃이 춤을 추며 진동했고 마침내 칼이 부러졌다. 파멸은 뱀처럼 수호령을 통째로 삼키기 시작했다. 본부 건물 입구에 도착한 피교수가 돌아봤을 때엔 수호령은 이미 구체에 반쯤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피교수는 건물 안으로 몸을 던졌다. 수호령은 이제 구체 안으로 사라졌고 격렬하게 깜빡이던 오렌지 불빛도 꺼졌다. 장애물을 제거한 구체는 지체 없이 고공으로 떠올라 검은 유성처럼 대학본부에 내리 꽂혔다. 건물 대부분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구체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다시 고공으로 떠올랐고 키키키 승리의 메아리가 울렸다. 그때 구체 안에서 오렌지빛 섬광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놈의 뱃속에서 수호이 가한 회심의 일격이었을까? 짙은 검은 안개가 캠퍼스를 뒤덮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거운 정적이 한동안 흘렀다.


야외극장까지 정신없이 달려온 민주 일행은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봤다. 수호령의 불꽃이 사라지는 것을 봤고, 구체가 본부 건물을 공격하다 폭발했고, 그 후론 짙은 안개에 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민주는 피교수가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이 되었다. 수호령은 힘을 잃었고, 망자들도 보이지 않고, 키쿠는 최종 목표인 피교수를 끝까지 노리고 있을 것이다. 저 마지막 폭발의 의미는?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시야가 트였다. 저만치 안갯속에서 칼을 들고 우뚝 서 있는 수호령의 윤곽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키쿠의 시체 같은 검은 무더기들이 쌓여있다. 아 수호령이 마침내 이겼구나!


그러나 안개가 더 걷히면서 민주는 몸이 차갑게 식는 공포를 느꼈다. 거대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은 수호령이 아니라 파멸이었다. 수호령을 삼키고 자폭의 에너지마저 흡수한 그가 수호령의 도플갱어 변한 것이다. 그는 검은 촉수들이 꿈틀거리는 날개를 달고 검은 불꽃이 일렁이는 거대한 칼을 들고 있었다. 그 앞에 무더기로 도열한 키쿠의 군대들은 이쪽을 향해 웃음의 함성을 질러대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대학본부 건물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건물의 남은 토막이었다. 대부분은 검은 구체였던 키쿠의 공격을 받아 없어졌는데, 건물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마치 칼로 자른 것처럼 깨끗하게 잘려나갔고 그 사라진 곳에는 거대한 원형의 어둠만이 보였다. 즉 없어진 건물 뒤쪽의 언덕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검은 캔버스에 그렸던 그림을 지운 것처럼 그 자리엔 칠흑 같은 공허만 남아있는 것이다. 피교수가 저 없어진 건물 쪽에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민주는 경악했다. 암흑의 칼을 든 파멸이 공격 신호를 보내자. 키쿠의 군대가 곤충 떼 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진격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야외극장 아래쪽으로 뛰어내려 갔다. 연주가 발을 못 떼고 있는 민주의 손목을 고 친구들과 함께 야외극장 무대 쪽으로 달렸다.




그해, 어느 봄날의 캠퍼스…. 피교수는 언제나처럼 혜린이와 야외극장 객석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책은 제목이 뭐니?”


“글쎄요? 뭘까요? 하나 지어주실래요?”


“음… 무제(無題)? 빈 캔버스? No Book? 아 모르겠다. 말해줘.”


“이 책엔 제목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살바치오(salvation).”


“구원? 오 생각보다 심오한 책이구나.”


“다른 하나는 엑시티움(exitium).”


“파멸? 오호 심각한 내용인데? 구원과 파멸이라….


“살바치오는 이쪽이에요. 오른쪽으로 넘기는 이야기의 제목이 살바치오. 책을 뒤집어서 왼쪽으로 넘기면 엑시티움.”


“서로 다른 얘기야?”


“음… 같고도 다른 얘기죠.”


“그럼 어떻게 읽어야 해?”


“읽는 사람 마음이겠죠?”


“보자. 그럼 구원에서 파멸로 가는 순서면 우울한 비극이 나오겠고, 파멸에서 구원으로 가면 음… 기껏해야 희비극인가? 그런데 파멸 후에 얻는 구원이 무슨 소용이지?”


“모든 시작은 끝이 있고, 모든 끝은 새로운 시작이니까요. 선택은 당신의 몫!”


피교수는 토막만 남은 대학본부 건물 옥상에 서 있다. 그의 오른팔은 킹의 공격으로 인해 절단되어 있었다. 피도 흐르지 않고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그의 팔은 깨끗이 사라졌고 검은 공허의 기운이 그 자리에 감돌고 있다. 그의 왼손에는 수호령의 날개였던 타다 만 페이지 한 장이 놓여있다. 그는 그 마지막 기억의 조각을 응시한다.


“살바치오… 엑시티움…. 나의 시작에는 나의 끝이 있고, 나의 끝에는 나의 시작이 있다. 구원 속에 파멸이, 파멸 속에 구원이….


그는 야외극장을 향해 진군하고 있는 파멸과 키쿠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민주와 친구들을 비롯한 약 오십 명의 생존자들은 야외극장의 무대에 몰려있다. 소라 모양의 덮개가 씌워진 무대 뒤쪽은 바다를 면한 낭떠러지여서 이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어두운 공기를 타고 키쿠들의 웃음소리가 가까워졌다. 쿵쿵 땅이 진동하며 파멸의 발소리도 다가오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손전등을 켰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 목소리는 확성기 방송을 하던 진압대장이었다. 그는 손전등을 비추며 짤막하게 지시했다.


“민간인들은 뒤로 빠집니다. 대원들 앞으로.”


살아남은 십여 명의 사복 경찰과 백골단원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중 하나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무기가 없지 말입니다.”


“화이바, 짱돌 뭐든지 집어 들어. 없으면 맨손 격파한다. 나를 기준으로 좌우 간격 맞춰 10보 앞으로.”


이들이 자리를 잡자, 드디어 키쿠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이 무대를 바라보듯이 이들은 야외극장 가두리를 에워싸고 무대를 주시하고 있었다. 파멸의 거대한 몸통이 그 뒤로 나타났다. 진압대장은 적들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며 단호하게 외쳤다.


“부대 전투 준비….


그러나 그의 구령은 끝에 힘이 빠졌다. 손전등에 비친 자신의 도플갱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 그는 진압대장의 말을 따라 했다. “준비, 준비… 키키키…”. 진압대장은 흔들리는 손전등으로 키쿠의 대열을 훑었다. 학생들의 모습에서 직원과 경찰들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키쿠들은 무대 위에 남아있는 생존자들의 도플갱어들이었다. 자신의 도플갱어를 발견한 뒤쪽의 학생들로부터 비명 소리가 들렸다. 진압대장 좌우로 포진한 대원들도 이 기이한 광경에 몸을 떨고 있었다. 진압대장은 팔목에 난 검은 자국을 주먹으로 때리며 있는 힘을 짜내어 외쳤다.


“한 발도 물러서지 말라!”


그는 방패를 땅에 내리쳐 진압 개시 신호를 보냈고, 대원들도 화답하여 헬멧과 방패와 막대기를 두드리며 기세를 올렸다. 키쿠들이 자리를 잡으려는 매진 공연의 관객들처럼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민주, 경덕, 송희, 인석, 연주, 그리고 무대 위 사람들의 구멍 난 얼굴들이 춤을 추며 내려오고 있었다. 민주와 친구들은 서로를 꼭 붙들며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악에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피교수는 찰나의 순간 동안 그 간의 여정을 돌아봤다. 십 수년간 얼굴이 겹치는 학생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망자로 찾아온 동성이를 다시 만나게 됐고, 없어진 혜린이를 찾아 헤매다가 그가 딸이라는 사실과 이 세계의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었다. 민주의 첫 번째 죽음은 막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그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나처장의 권력과 협박에 늘 휘둘리던 그는 처음으로 그와 대등하게 맞섰다. 이 모두는 구원을 향한 달음박질이었다. 그러나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그 문들 뒤에는 모두의 파멸이 기다리고 있었고, 피교수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자신을 포함한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파멸로부터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냉혹한 우주의 질서는 온갖 도플갱어처럼 그 모양과 방법을 바꾸어 자신의 목을 더 조여 오는 것이다.


결국 죽어야 끝날 것이다. 완전한 의식의 용해, 기억의 소멸만이 유일한 출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두려웠다. 혜린에게 던졌던 질문처럼, 파멸 이후의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무엇을 기억하고 느꼈는지 확인해 줄 자신의 의식마저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 눈을 감은 이후에는 영겁의 공허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절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손에 놓인 종이 조각이 날아갈 듯 떨렸다. 피교수는 옆을 돌아봤다. 동성이가 함께 서있다. 그의 소멸은 계속 진행되어 허리와 손목 아래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둘의 시선이 만났다.




키쿠들은 진압대장과 대원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인간들은 절망에 가까운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돌격했다. 두 명의 대원이 자신들의 도플갱어에게 순식간에 잡아먹혔다. 진압대장은 자기 앞에 선 구멍 뚫린 눈과 쫙 벌린 아가리를 향하여 비명인지 함성인지 모를 마지막 고함을 지르며 방패를 치켜들었다. 순간 푸른 불꽃과 함께 도플갱어가 사라졌다. 이곳저곳에서 푸른 불꽃이 일었다. 키쿠들은 진격을 멈췄다. 민주가 외쳤다.


“망자들이야!


마법진이 힘을 잃으면서 땅으로 떨어져 내렸던 망자들이 다시 모여들어 사람들과 키쿠 사이에 영의 장벽을 다. 키쿠들은 쿠쿠쿠 위협적인 웃음소리를 내며 망자들과 팽팽하게 대치했다.


진압대장의 도플갱어에게 몸을 던져 함께 산화한 망자는 ‘대일굴욕 결사반대’의 머리띠를 두른 62학번 대학생이었다. 그는 어부의 아들로서 어장을 일본에게 양보하겠다는 한일회담에 분개하여 백양대의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시위 후에 밤늦게까지 학우들과 술을 마신 후에 노래를 부르며 홀로 기숙사로 돌아오다가 트럭에 치여 바닷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즉사했다. 가로등도 없는 외길에 검은 교복을 입어 잘 보이지 않는 그를 친 트럭 운전사는 뺑소니를 쳤고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아 실종 처리되었다. 그는 지금도 이 근처 바닷가 모래 속 깊이 묻혀있다. 외아들을 잃은 그의 어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아들을 찾는다며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경덕이의 도플갱어에게 몸을 던진 수영복 차림의 망자는 백양대 일 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첫 학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기 전 마지막 수영을 하다가 저체온증이 와서 익사했다. 함께 물놀이를 하던 친구들은 그가 장난치는 줄 알고 내버려 두고 자기들끼리 물에서 나왔고 그는 그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바닷속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인석이의 도플갱어가 틈을 노려 망자들 사이로 빠져나와 에게 달려들다가 푸른 불꽃으로 사라졌다. 인석이 앞을 막아 선 땡땡이 무늬의 원피스 차림에 빨간 립스틱을 바른 망자는 학교 근처 술집 점원이었다. 백양대 사범대 학생과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주었고 두 사람은 미래를 약속했으나, 어느 날 그 남학생은 사라져 버렸다.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서 알게 된 사실은 그 남학생은 서울의 대학으로 편입했고 곧  부잣집 애인과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느 날 밤늦게 진하게 립스틱을 바르고 둘이 데이트할 때 즐겨 입던 땡땡이 원피스를 입고 캠퍼스를 찾았다. 다음 날 새벽 열람실에 가기 위해 사범대로 향하는 좁은 숲길을 따라 걷던 어떤 학생은 왠지 한기가 느껴져 숲 쪽을 봤다가 기절했다. 땡땡이 원피스를 입은 어떤 여자가 나무에 목을 맨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임신 중이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길은 한 때 귀신이 나온다고 하여 아무도 가지 않았다. 이렇게 모두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었고 각자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파멸이 포효했다. 그는 앞에서 주저하는 키쿠들을 짓밟고 앞으로 나서 거대한 암흑의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푸른 불꽃들이 연이어 마지막으로 번쩍이다 사라졌고, 그렇게 구천을 떠돌던 혼들의 마지막 흔적들이 스러져갔다. 진압대장이 쳐놓은 빈약한 방어선은 삽시간에 무너졌지만 키쿠들과 파멸은 아직도 산자들을 삼킬 수 없었다. 푸른 불꽃의 띠는 버티고 있었고, 그 띠는 백양대망자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키쿠들과 파멸의 칼날에 자신들을 던져 넣는 희생의 불꽃이었다. 그러나 수백의 망자들이 소멸되는 시간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민주의 눈앞에 금동이의 어머니가 보였다. 눈물이 그렁한 채 주먹밥을 내미는 엄마…. 손을 뻗는  순간 개머리판에 머리를 얻어맞고 트럭으로 끌려 올라간다. 흙 묻은 주먹밥. 그 밥을 주워 들고 쫓아오던 엄마. 점점 멀어져 하얀 점이 되어버린 엄마의 마지막 목소리, 우리 아들 금동아….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간 그날은 금동이의 열여섯 살 생일날이었다. 그는 한두 달이면 집에 곧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되었고, 그의 부대는 포항에서부터 밀려 올라와 백양대 근처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금동이는 옆 전우가 지뢰를 밟아 중상을 입고 고향에서 멀지 않은 이곳 야전 병원에 실려왔다. 그가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 본 것은 엄마가 만들어준 주먹밥, 그리고 아들 생일상을 차려놓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민주는 금동이가 자신에게 잠시 빙의해 있음을 깨달았고 영화 장면처럼 순식간에 흘러간 그의 인생에 눈물이 흘렀다.


“금동아, 가지 마!”


금동이는 민주의 몸에서 빠져나와 빙그르 한 바퀴 돌며 민주에게 경례를 보냈다. 마치 자신의 사연을 기억해 달라는 듯이. 그리고 민주 일행에게 돌진해 오는 두 명의 키쿠를 향해 몸을 날렸다. 푸른 불꽃이 일었고, 윙크를 하듯이 한 번 깜빡인 후에 사라졌다.




“엑시티움…!”


피교수는 조용히 속삭이며 일기장의 조각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조각은 깃털처럼 가볍게 위로, 위로 날아올라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피교수는 떨리는 입술로  옆에 선 동성이에게 억지 미소를 보낸다.


파멸은 이상을 감지하고 피교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하늘에서 엄청난 숫자의 책장들과 글자들이 소나기처럼 땅으로 퍼붓기 시작했다. 책장과 글씨를 맞은 키쿠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파멸은 등에 칼을 맞은 듯 포효하며 급히 피교수 쪽으로 몸을 돌려 발을 굴렀고 키쿠들은 그를 앞서 달려 나갔다.


글씨와 책장들은 땅에 닿자마자 다시 하늘 위로 솟구쳤다. 이 광경은 마치 화가가 큰 붓으로 검은 배경의 캔버스를 지우고 새로운 밑그림을 그려 넣는 과정을 빠른 속도로 보는 것 같았다. 책장과 글씨들이 하늘과 땅을 엄청난 속도로 오가면서 검은 하늘이 벗겨지고 캠퍼스는 점차 밝아졌다. 그와 함께 모든 색채는 사라지고 하늘은 하얀 빈 공간으로, 건물들도 단순한 흑백 질감의 윤곽선들로 비워져 갔다. 아크로뱃으로 변신한 키쿠들은 빠른 속도로 건물의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동성이가 축구 경기에 나가는 선수처럼 손인사를 건넸다. 피교수는 한쪽 안경알 속에 보이는 동성이를 바라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안경을 통해 보이는 그가 서 있는 공간을 끌어안았다.


우리의 울음이 서로에게 꼭 닿을 수 있기를!”


동성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피교수를 향해 한 팔을 번쩍 들고 빙글 돌았다. 마치 그 옛날 함께 축구를 하면서 피교수에게 패스를 받은 것처럼 적의 골문을 향해 무섭게 드리블을 하듯이 옥상 벽을 타고 아래로 내리꽂았다. 건물 옥상에서 땅까지 푸른 불꽃이 탄환의 궤적처럼 뻗어나갔고, 기어올라오던 아크로뱃들이 동성이와 함께 모두 연기처럼 사라졌다.


민주는 하늘을 가득 덮은 책장들과 글씨들을 보며 피교수가 마지막 선택을 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눈앞에서 백양대가 변해가는 광경을 지켜봤다. 하얀 하늘, 흑백의 캠퍼스, 골격만 남아있는 건물들, 그것은 혜린 언니를 만났던 목탄화 속의 캠퍼스였다. 파멸과 키쿠들은 피교수 쪽으로 몰려갔고, 남아있던 키쿠들은 모두 하늘에서 화살처럼 내려 꽂힌 책장들과 글씨들에 소멸되었다. 흑과 백의 선과 면들은 이제 무대를 향해 쏟아져 내리며 그들이 알던 세상의 마지막을 지우기 시작했다. 무대 앞 쪽에 있던 몇 사람이 책장과 글자들에 닿자마자 가루로 흩어졌고 그 자리엔 무대의 경계를 그린 거친 목탄 선과 하얀 여백만 남았다. 남은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무대 안쪽으로 물러났다. 인석이가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연주야, 우리 할 만큼 한 거 맞지?”


연주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석이가 씩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우리 너무 열심히 했나 봐.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뀐다. 무섭다….


경덕이가 인석이의 어깨를 꼭 감싸며 충혈된 눈으로 민주를 돌아봤다.


“고마웠다. 아까 그 노래.”


“성민이 만나면 같이 또 부르자.”


“근데… 나 살고 싶어….”


연주가 흐느꼈다. 송희가 연주의 어깨를 보듬고 조용히 기도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눈시울이 뜨거워진 민주는 친구들의 손을 꼭 잡았다.


“얼굴없는성자단. 우리는 천주님의 품 안에서 해처럼 빛나는 우리의 얼굴을 찾을 것입니다.”


“성자 송희….”


“성자 민주….”


“성자 연주….”


“성자 인석…”


“성자 경덕…”


“성자 성민….”


이들은 그 비 오던 날 우산을 내려놓고 서로를 바라보던 그 눈길로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을 마지막으로 하나씩 불렀다. 민주는 어느덧 눈을 꼭 감았다. 양손을 꼭 잡은 친구들의 체온이 느껴졌다. 순간 환영인지 현실인지 눈을 감은 민주의 앞에 서 있는 망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평온하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더 이상 한을 품은 어둠의 그림자가 아니라 가장 찬란했던 인생의 순간으로 돌아가 빛나고 있다. 그들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단지 모두가 떠나야 할 길을 조금 먼저 떠났던 우리와 똑같은 외로운 여행객들이었다. 그들 한가운데 서있는 아이린 언니가 보였다. 언니는 꽃무늬 원피스 차림으로 이쪽을 보며 환히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 환해서 눈이 부셨다. 민주가 본 마지막 세상은 그렇게 하얀빛 속에서 사라져 갔다.




피교수는 하늘 가득 흩날리는 하얀 종이들을 보며 그날 새벽의 기억이 마지막으로 떠올랐. 그는 차를 몰고 백양대를 나와 첫눈이 몰아치는 눈길을 달리고 있었다. 피교수는 양 갈래 길에서 고속도로를 빨리 타기 위해 가파르게 굴곡진 지름길을 선택했다. 마음이 급했다. 드디어 딸이 돌아온다. 오랫동안 눈처럼 가슴에 쌓인 많은 사연과 못다 한 이야기들… 공항에서 꼭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와이퍼는 삐걱거리며 달려드는 눈을 밀어내기에 바빴고, 히터 때문인지 창 안쪽에 김이 서렸다. 창문을 열자 눈과 강풍이 들이쳤고 살짝 둘렀던 주황색 머플러가 펄럭여 시야를 가렸다. 머플러를 제대로 매려는데, 맞은편에서 거대한 트럭의 하이빔이 쏟아져 들어왔다. 피교수는 반사적으로 오른편으로 핸들을 꺾었고 눈에 미끄러진 자동차는 비명을 지르며 빙글 돌다가 가드레일을 치고 나가 바닷가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그 짧은 비상의 순간, 머플러는 창밖으로 빠져나가 갈매기처럼 날아가고  잿빛 바다를 배경으로 공중에 어지럽게 날리는 눈송이들이 마치 허우적대며 멀어져 간 아내의 하얀 손가락들처럼 보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귓가에 무등을 타고 깔깔거리던 어린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이제 피교수의 차례였다. 그의 팔부터 책장들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의 모든 기억이 담긴 무수한 책장들은 하늘로 날아올라 시간과 공간을 지우는 무채색의 비가 되어 쏟아져내렸다. 파멸은 촉수의 검은 날개를 방패 삼아 피교수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사라져 가는 그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며 거대한 파멸의 칼을 높이 들었다. 몸통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피교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멀리 야외극장이 보였다. 그리고 늘 앉아있던 그 자리에 그의 딸이 보였다. 등을 지고 앉아 바다를 응시하던 평소와는 달랐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피교수를 마주 보고 있었다.


마지막 숨이 빠져나가는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파멸의 칼이 피교수를 향해 떨어질 때, 딸은 피교수를 향해 달려오며 활짝 웃었다. 온 세상을 밝힐 만큼 눈부신 미소. 피교수의 온 세상이 거기 있었다. 피교수는 딸을 향해 힘차게 그 이름을 불렀다. 칼이 피교수를 반으로 갈랐고, 동시에 모든 글자들이 합쳐진 단단한 중심선이 하얀 하늘에서 내리 꽂혀 킹을 반으로 갈랐다.


두 토막이 난 킹은 온갖 도형으로 미친 듯 변신하며 몸부림을 치다가, 쿡쿡 구토하는 웃음과 함께 수호령과 나처장 같아 보이는 굵은 덩어리들을 토해냈다. 이 모두는 곧 검은 선과 점들로 분해되어 꿈틀거리다가 먼지처럼 사라졌다. 피교수도, 민주 일행도, 산자와 망자들도, 키쿠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백양대의 골격을 이루고 있던 검은 선과 점들은 우르르 진동과 함께 소용돌이처럼 일제히 감돌며 하늘로 흩어졌다. 산 자와 죽은 자, 그들이 어울려 살던 온 세계가 사라진 공간에 남은 것은 하얀 침묵, 아무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은 빈 캔버스뿐…. 


파멸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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