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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Oct 02. 2024

27.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1분 남았다!”


확성기의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경덕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 화염병 준비됐죠? 작전대로, 경계조가 돌파해서 길을 열면 모두 흩어져 뛰세요.”


“그런데… 문제가 좀 있는데?”


경계조 중 한 명이 화염병을 들고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뭡니까?”


“이게 냄새가 안 나서 보니까… 기름이 아니라 물이야. 봐.”


그가 라이터를 아무리 켜도 화염병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경덕이는 입술을 깨물며 병을 땅바닥에 내리쳤다.


“장명훈 이 개자식!”


“경덕아 이제 어떡하냐? 이대로 끝이야?”


인석이는 두려움과 분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경덕이를 보고 있었다. 경덕이는 서로 꼭 끌어안고 있는 송희, 연주의 얼굴을 돌아봤다. 그리고 시위에 참여해 준 고마운 학우들이 눈에 들어왔다. 야구 방망이와 몽둥이 몇 개로 백골단을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맞서 싸우면 무자비한 진압으로 아비규환이 벌어질 것이다. 순순히 항복하면 아무도 크게 다치지는 않겠지만… 인석이와 현역 학우들이 체포되면 성민이가 갔던 그 끔찍한 길을 가야 한다. 이렇게 끝나버리면 이제 누가 성민이를 위해, 누가 우리를 위해 싸워줄 것인가? 경덕이 가슴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고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그는 분노의 고함을 토해냈다. 백골단의 방패 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려 퍼졌다. 마지막 경고였다. 경덕이는 자신의 화염병과 라이터를 들고 장명훈이 뛰어간 진압대 쪽으로 혼자 걸어 나갔다. 인석이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경덕아 뭐 하는 거야?”


경덕이는 뒤돌아보지 않고 한 손에는 화염병과 다른 한 손에는 불을 켠 라이터를 높이 든 채로 계속 걸었다. 그가 시위대와 진압대의 중간까지 걸어갔을 때 백골단이 그를 향해 전진했다. 경덕이는 라이터를 흔들며 고함을 쳤다.



“오지 마라! 다가오면 분신한다!”


백골단이 주춤했다. 확성기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이, 그건 화염병이 아니라 물병이야. 몰랐나?”


“아니 이건 화염병이야! 내가 만든 화염병이야! 불을 확 싸질러 볼까!”


경덕이는 병을 자신의 머리 위에 내리쳤다. 병은 산산이 깨지고 그의 머리부터 피와 물이 범벅이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경덕이는 꼿꼿한 자세로 라이터를 얼굴에 가까이 댔다. 휘발유 냄새가 진동하고 백골단이 대장에게 수신호를 한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다시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생명은 고귀한 것이다. 섣부른 짓 하지 마라.”


“원하는 것이 있다.”


“뭔가?”


“장명훈과 얘기하고 싶다.”


“이유는?”


“그는 우리 지도자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마무리를 짓겠다.”


“… 좋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장명훈이!”


장명훈이가 백골단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피범벅이 된 경덕이를 살피며 주춤주춤 다가왔다. 그는 딱하다는 표정으로 경덕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아? 피가 막 나네.”


“반말하지 말랬지, 이 프락치 새끼야.”


경덕은 입으로 타고 내리는 피를 닦으며 침을 뱉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날 믿으라고. 가만있으라고. 그럼 안 다친다고.”


“네 입으로 한 그 연설이 부끄럽지도 않냐?”


“그게 뭐? 그거랑 네가  생쑈하고 있는 거랑 뭐가 다른데? 야 이런 뻔한 얘기 하자고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거야? 왜? 시간이라도 좀 끌어보려고?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다 끝났어. 포기해라.”


“그 소리, 성민이한테도 했냐?”


“뭘?”


“널 믿으라고, 그럼 안 다친다고. 그리고 팔아넘긴 거야? 널 그렇게 따랐던 동생을?”


“네가 뭘 알아?”


“아니라고 못하네? 네가 팔아넘겨 놓고 밤새 통곡을 해? 미쳤냐?”


“아 이 새끼 정말! 잘 들어. 팔아넘긴 게 아니라 구해준 거야 내가! 걘 주동자로 분류돼서 구속 대상이었다고. 그럼, 넌 걔가 안기부 끌려가서 대학생 간첩단 명단에 올라가야 속이 시원하겠냐? 그냥 남들 가는 군대 가서 3년 잘 지내고 오면 되는 거였다고. 왜 거기서 자살을 하고 지랄이냐고!”


“자살? 성민이를 죽인 건 니들이야!”


“까고 있네. 니들 누구?”


“너 같은 프락치들, 교수 새끼들, 안기부, 보안사, 이 지옥을 만든 쿠데타 군사정권! 너네가 다 살인자야!”


“군사정권? 그게 뭐 어때서 씨발! 1961년에 시작해서 22년 째야. 그래서 나라 망했어? 잘 살고 있잖아. 수출 100만 불 달성! 한강의 기적! 야 단군조선부터 이 나라를 버텨온 게 쿠데타야. 연개소문, 이성계, 박정희 그 사람들 없었음 우리나라가 어떻게 됐을 건데? 그들이 흘린 피를 받아먹고 자란 게 이 나라 백성이야. 그게 우리 유전자라고. 군사독재를 타도해? 그들 없이 빨갱이들이랑 어떻게 싸울 건데? 나라가 빨갱이들한테 통째로 먹히는 거보다 독재가 더 나은 거 아냐? 아니 아니 강력한 독재가 공산주의로부터 조국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 아냐?”


“굳이 하나 더 알려줘서 고맙다.”


“그게 뭔데?”


“널 죽여야 할 이유!”


경덕은 순식간에 명훈에게 달려들어 팔을 꺾고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손에는 길쭉하게 칼처럼 날카로운 병 조각이 들려있었다. 확성기 소리가 울렸다.


“흉기 버려! 경고한다.”


“오지 마! 이 새끼 목 딴다!”


경덕은 다가오려는 백골단에게 병조각을 휘두르고 명훈의 종아리를 걷어차서 무릎을 꿇렸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경덕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현기증을 느낀 그는 명훈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눈을 찡그리며 날카로운 유리 끝을 그의 목에 댔다.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명훈이 비명을 지르며 경덕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경덕은 흠칫 놀랐다. 돌아선 그의 얼굴은 명훈이 아니라 지뢰로 죽은 장병훈 병장이었다. 경덕은 고개를 흔들며 눈을 감았다 떴다. 여전히 눈앞에 보이는 장병장, 지뢰에 아래턱이 날아간 그 얼굴은 길게 늘어진 혀를 마구 놀리며 경덕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경덕은 이것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실제 목소리인지 환청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김일병, 네 후임 말이야. 살도 뽀얗고 보들보들한 게 아주….


“닥쳐, 장병장 이 개새끼야!”


“에이 왜 그래? 걔도 은근히 즐기던데?”


경덕이는 고함을 지르며 그의 얼굴을 거세게 걷어찼다. 명훈은 땅에 얼굴을 갈며 엎어졌고 경덕은 그의 몸에 올라타서 다시 그의 목을 눌렀다. 장병장의 윗 턱을 타고 피가 떨어져 그의 혓바닥을 적셨다. 그는 그 긴 혀는 꿀쩍 꿀쩍 자신의 피를 삼키며 경덕에게 다시 뱀처럼 날름거렸다.


“아 너무 좋아! 김일병 뭘 망설여? 너도 즐겨야지? 자, 이 부드러운 살을 푹 찔러봐. 어서~”


“죽어라!”


이제 경덕에게 뱀 같은 혀를 놀리는 이 놈이 장병훈이건 장명훈이건 상관없었다. 환상인지 환청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억울하게 죽은 성민이와 후임을 위해서도 이 흉측한 놈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라 심판이고, 자신이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정의라는 외침이 그의 귀를 울렸다. 그가 고함과 함께 긴 유리칼을 그의 목에 꽂으려는 순간 노랫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들려왔다.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주여 내 기도 들으소서.


민주의 목소리였다. 경덕은 동작을 멈추고 소리 나는 곳을 돌아봤다. 경찰과 시위대 모두의 시선이 대학본부를 향했다. 건물 옥상에 횃불이 보였다. 그 횃불을 위아래로 흔들며 민주가 힘차게 노래하고 있었다. 이 노래는 성민이 휴가 모임 때 민주가 부른 후로 성자단이 애창하는 곡이었다. 송희, 연주, 인석은 서로를 돌아봤다.



“세상 어디 가나 실망뿐이요 먹고 자고 애써 일할 뿐,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주여 나는 무엇하리까.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주여 내 기도 들으소서.


멍하니 노래를 듣고 있던 진압대장은 짜증 난 목소리로 확성기를 통해 짧게 지시했다.


“야, 저거 치워.”


백골단 십여 명이 우르르 대학본부 건물로 달려갔다. 민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계속했다. 송희가 발을 동동 굴렀다.


“어머, 민주 잡히겠어. 어떡해.”


“우리도 같이 부르자.”


연주의 제안으로 세 사람은 노래를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시위대의 다른 학생들도 뭐라도 해보자는 절박함으로 가세해 노래는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미칠 것 같은 이 세상,

주여 내 기도 들으소서.


어둠 속에 손 펴 도움 바랄 때 밝은 빛이 돌연 비치네.

예수님이 서서 눈물 흘리며 지체 말고 오라 하시네…”


노래를 듣던 경덕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일렁이는 그의 눈앞에 장병장은 사라지고 다시 입술이 터진 명훈의 일그러진 표정이 보였다. 그의 목을 겨눈 손끝이 떨렸다. 그의 머리와 가슴이 서로 싸우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이 놈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들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을 받았고 이놈의 숨통을 내 손으로 끊는 것이다. 경덕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경덕의 광기와 살기에 압도된 명훈은 울먹이며 애원했다.


“살려줘 제발…. 나도 너무 무서웠어. 프락치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딨어. 너무 무서워서, 너무 살고 싶어서 그랬어….


그는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모아 빌었다. 경덕의 손에 힘이 빠졌다. 그의 앞에는 그저 나약하고 가련한 한 인간이 빌고 있다. 어쩌면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린 성민이와 후임의 모습도 이랬을 것이다. 그 기로에서 누구는 살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누구는 죽기까지 자신을 지키고, 누구는 절망하며 자신을 포기한다. 각각의 선택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다. 경덕은 그를 겨눴던 손끝의 힘을 풀고 일어섰다.


“가라.”


명훈이는 네 발로 기다가 몸을 일으켜 달아나며 소리 질렀다.


“미친놈아. 너넨 이제 다 죽었어!”


경덕이는 병조각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담담하게 백골단을 바라봤다. 경찰 쪽 확성기가 울렸다.


“시위대 제군, 그리고 이 앞에 인질극한 깡패 새끼 잘 들어라. 아까 한 말 취소한다. 지켜줄 가치가 없는 생명은 전혀 고귀하지 않다. 니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 국가 세력이며….”


“신성한 캠퍼스에 폭력 경찰 웬 말이냐! 백골단이 웬 말이냐!”


민주의 앙칼진 목소리가 끼어들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백양대 삼천 학우 여러분! 지금 우리와 여러분 사이에 인의 장막을 치고 있는 저들은 누구입니까? 짐승을 사냥하듯 몽둥이와 최루탄으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저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누가 저들에게 그럴 권리를 줬습니까? 자유와 진리의 상아탑에 군홧발로 들어와 우리를 밤낮으로 감시하고, 검문하고, 구타하고 체포할 권력을 그 누가 허락했습니까? 국민이 허락하지 않은 그 권력을 국민을 향해 휘두르고 있는 저들에게 묻습니다. 누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 국가 세력입니까?”


“야 조용히 안 해? 저거 목소리가 왜 저렇게 커? 진압조는 뭐 하는 거야!?”


경찰 확성기는 민주의 앙칼지고 빠른 연설에 다시 묻혔다.


“학우 여러분! 오늘을 기억해 주십시오. 저들은 또다시 우리를 짓밟고 잡아갈 것입니다. 우리를 불순분자요 용공세력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우리를 얼굴 없는 유령처럼 공포와 혐오의 대상으로 몰아 또 한 번 우리와 여러분을 갈라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우리의 얼굴을 기억해 주세요! 윤성민 학우도, 우리도 미래를 꿈꾸고, 사랑을 꿈꾸고, 행복을 꿈꾸는, 여러분의 얼굴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경찰 확성기의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민주의 목소리가 잠시 끊긴 사이 진압 명령이 다급하게 떨어졌다.


“진압 개시! 다 쓸어버려!”


백골단과 사복들은 경덕이로 인해 짜증이 났는지, 그에게 먼저 달려가 다짜고짜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를 둘러싸고 있던 병력들도 공중을 날며 난입해 들어갔다. 경계조는 몽둥이 한 번 휘두르기도 전에 백골단의 곤봉과 발차기에 얻어맞고 땅에 뒹굴었고 도망가던 여학생들은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인의 장벽 너머에서 지켜보던 학생 몇이 흥분하여 고함을 지르며 나섰지만 똥색 제복들에게 따귀를 맞고 멱살을 잡혔다. 연주는 친구들에게 소리쳤다.


경덕이를 구하자!”


그들이 체포조를 피해 경덕이를 향해 몇 걸음을 떼자마자, 백골단 세 명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인석이는 연주와 송희 앞으로 나서 그들을 막아섰다. 곤봉이 하늘로 치켜 올라가고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지진이 난 듯 우르릉 쾅 하는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광장의 모든 사람들이 동작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정경대 건물 입구가 무너져 내렸고 부연 오렌지 빛 흙먼지 사이로 거대한 물체가 서 있었었다. 그것은 나교수를 집어삼킨 키쿠의 우두머리 '파멸'이었고 그의 머리는 4층 건물 위로 솟아올랐다. 찢어진 양복 조각을 걸친 거대한 몸 여기저기 갈라진 상처들에서는 피처럼 분출된 촉수들이 화가 난 듯 몸부림치며 꿈틀댔다. 그는 수천 마리의 곤충이 우는 것 같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밤하늘에 토해내며 광장을 향해 쿵쿵 걸어오기 시작했다.



인석이가 넋이 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간신히 토해냈다.


“저게 뭐냐?”


“근데 누구 닮았는데…”


연주가 무심결에 한 마디 하다가 백골단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 역시 놀라 곤봉을 치켜든 채 넋을 잃고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연주를 내리치려 했다. 그 순간 어떤 물체가 후드득 굴러와 그를 볼링 핀처럼 쓰러뜨렸다. 옆으로 마구 공중제비를 넘는 사복 경찰 차림의 아크로뱃 키쿠는 어느 틈에 옆구리에 난 아가리를 쩍 벌려 쓰러진 백골단원을 절반쯤 밀어 넣고 있다. 세 사람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댔다. 다른 두 명의 백골단원은 말뚝 박는 자세로 우스꽝스럽게 돌진해 오는 십여 명의 학생들과 똥색 제복들을 향해 곤봉을 마구 휘둘렀지만 이 편자형 키쿠들은 엉덩이에 떨어지는 몽둥이 세례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들이받고 깔아뭉갰다.


곳곳에서 엄청난 소란이 벌어졌다. 인의 장막은 무너지고 학생들과 똥색 제복들이 뒤엉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소란을 틈타 체포되었던 학생들은 달아났고 백골단원은 그 뒤를 쫓았고 또 그 뒤를 아크로뱃들이 공중제비를 넘으며 따라가는 묘한 술래잡기가 벌어졌다. 진압대장이 있는 본대 쪽도 키쿠들이 밀고 들어와 고립되어 있었다.


“이것들 뭐야! 대열 유지! 막아!”


다급한 목소리가 확성기에서 흘러나왔다. 백골단은 방패로 방어진을 치고 밀려드는 키쿠들을 향해 열심히 몽둥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키쿠들은 이곳저곳에서 삼킨 사람들을 다시 토해놓기 시작했다. 눈과 입에 구멍이 뚫린 사람들은 갓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처럼 편자형으로 구부러진 몸으로 우물쭈물하다가 곧 목표를 정하고 뒤뚱뒤뚱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키쿠들과 복제된 키쿠들로 인해 이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세 사람은 도망치는 학생들과 백골단, 그리고 키쿠들을 간신히 피해 경덕이가 있던 곳에 도착했다. 주변을 둘러봤으나 경덕이는 보이지 않았다.


“없잖아. 얘 어디 갔냐? 경덕아!”


인석이가 다급하게 경덕이의 이름을 부를 때 다시 민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주는 횃불을 미친 듯이 흔들고 있었다.


“저것들은… 키쿠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싸우지 말고 도망치세요! 사방이 포위됐습니다! 여러분, 대학본부로 피하세요! 송희야! 연주야! 경덕아! 인석아! 이쪽으로 도망쳐!”


“민주야 우리 여깄어! 민주야!”


송희가 민주를 향해 외쳤지만 비명과 소음에 묻혀 들릴 리가 없었다. 민주는 사람들에게 건물 안으로 피하라고 계속 외치고 있다. 송희는 다급하게 친구들을 돌아보며 재촉했다.


“얘들아 일단 민주에게 가자.”


송희의 말문이 막혔다. 인석과 연주가 얼어붙은 채로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장명훈이 서 있었다. 그의 눈과 입에는 까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송희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명훈의 구멍 뚫린 입에서 어눌한 말이 새 나왔다.


… 민주… 가… 가… 키키키…”


그는 입구멍을 크게 벌리고 팔을 뻗으며 세 사람을 향해 돌진했다. 연주가 눈을 질끈 감으며 ‘장명훈 이 개새끼’를 외쳤다. 그의 뭉툭한 손이 연주에게 닿기 직전에 명훈의 도플갱어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뒤로 몽둥이를 들고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경덕이가 보였다.


“반말하지 말랬지.”


“경덕아!”


세 사람이 반가움에 동시에 소리쳤다. 연주는 다리가 꺾인 채 꿈틀거리고 있는 도플갱어의 엉덩이를 잽싸게 걷어차고 세 사람은 대학본부를 향해 달렸다. 확성기 소리를 들은 일단의 학생들과 백골단원들이 급하게 그 뒤를 따랐다.


쿠웅~!!!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어느새 광장에 도착한 키쿠킹이 그 거대하고 뭉툭한 발을 굴렀다. 그 진동으로 본부 건물로 뛰던 사람들이 넘어지고 뒹굴었다. 광장 분수의 갈라진 틈으로는 검은 촉수들이 역류하는 폭포처럼 일제히 하늘로 치솟아 올라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킹의 양 옆으로 밀려 나온 아크로뱃들이 공중제비를 넘으며 순식간에 굴러와 이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학본부로 가는 길을 가로막은 키쿠들은 다리와 팔 사이, 혹은 겨드랑이 등에 비정상적으로 붙어있는 머리통을 돌려 포위된 사람들을 향해 시커먼 아가리를 쫙 벌렸다.


“틀렸다.”


인석이가 탄식했다. 친구들은 절망적인 눈빛으로 서로를 꼭 붙들었다.


촉수들이 먹물처럼 뿌려진 하늘은 별빛마저 모두 사라지고, 안개에 반사된 오렌지 불빛은 언제라도 꺼질 것처럼 깜박거리고 있었다. 민주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옥상 위의 횃불도 이제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도플갱어들이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돌진해 왔다.


순간 공중에서 내리 꽂힌 눈부신 오렌지빛 불꽃이 전열의 도플갱어들을 둘로 갈랐고, 이들은 푸른 불꽃이 되어 밤하늘로 사라졌다. 파멸은 새로 등장한 적에 분노의 괴성을 지르며 발을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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