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일렁이던 눈앞이 조금씩 선명해지자 민주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피교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볼은 쑥 들어가고, 입술은 말라서 갈라지고, 수염이 듬성듬성 난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아득한 위쪽 사람 몸이 통과할 만한 구멍을 통해 희미한 빛이 내려와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저곳이 혹시 자신이 정신을 잃었던 그 계단의 구멍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어디죠?”
“간호대학 건물이야. 정확히 말하면 그 지하 깊은 곳 어딘 가인데,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니?”
민주는 아픈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생각을 해내려 애썼다.”
“그러니까… 에 또… 제 방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그게… 몸이 밑으로 후욱 떨어지더니, 피용, 핑핑, 교수님을 막 찾으러 다녔는데… 이렇게 찾았네요. 헤~.”
피교수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민주를 찬찬히 뜯어보며 다시 물었다.
“너… 민주 맞지? 정말 괜찮은 거지?”
“이제 내 이름 기억하시네요? 어젯밤까진 모르셨으면서.”
“어젯밤?”
“네, 밤에 만나서 제가 인사했잖아요?”
동동이가 옆에서 낑낑거렸다. 피교수는 개를 돌아보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답했다.
“그래, 이렇게 내 앞에 있으면 된 거다.”
“네?... 앗 참, 이거…”
민주는 품에 꼭 안고 있던 것을 피교수에게 보여줬다.
“이 책. 혜린인가… 그 언니 것 맞죠? 이것도 제게 찾아달라고 했는데.”
“혜린이를 알아? 만났어?!”
“아 그건 아니에요…”
피교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책을 받아 들었다. 피교수는 책을 펼쳐 이곳저곳을 살핀 후에 민주에게 어둡지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민주야, 힘들겠지만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는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말해주지 않겠니?”
민주는 심호흡을 하고 기억을 하나씩 떠올리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피교수에게 털어놓았다. 성민이의 죽음과 얼굴없는성자단, 그리고 그날 새벽의 거사와 지진, 침대 밑으로 꺼져 내려간 후에 아이린 언니의 음성으로 들려온 혜린과의 대화, 그 후에 맞닥뜨린 온갖 뒤엉킨 과거와 현재의 장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봤던 젊은 날의 피교수 모습 등…. 피교수는 마지막 이야기를 들을 때 입술을 꼭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혜린이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예요? 교수님과는 무슨 사이예요? 그리고 아이린 언니를 어떻게 알고언니 목소리를 내는 거죠? 또 제가 본 것들은… 제가 미친 건가요?.”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그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
“민주야, 자세한 것은 나중에 다 내가 설명해 줄게. 지금은 시간이 없구나.”
“아 맞아요. 시간… 교수님, 저 이제 가볼게요. 친구들이 찾고 있을 거예요.”
“민주야…”
“네?”
“오늘은 지진이 났던 그날이 아니야.”
“네?”
“지진은 열흘 전에 있었어.”
“열흘 전…? 무슨 말씀이세요?”
“그리고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제 시계를 보세요. 이제 오후 4시예요.”
피교수는 자신의 시계를 보여주었다. 민주의 시계와 날짜가 열흘이 차이가 났다. 민주는 두 시계와 피교수를 번갈아 쳐다봤다. 피교수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거짓말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민주는 친구들이 필사적으로 달아나던 장면이 떠올랐다. 민주는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피교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렸다.
“민주야, 돌아가는 길은 없다.”
“가야 돼요. 내 친구들…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지금 돌아가면 안 돼! 내 말은… 지금은 돌아갈 방법이 없어.”
“친구들이 쫓기고 있었어요! 제가 구하러 가야 해요! 교수님, 어디로 들어오셨어요?”
민주는 어두운 사방을 더듬으며 소리 질렀다. 동동이가 피교수에게 꼬리를 마구 흔들며 멍멍 짖어댔다. 피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경을 벗어 들고 민주에게 말했다.
“네가 여기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나도 그렇다. 이 친구들이 길을 열어줬어.”
“친구들? 이 개요?”
“더 있다. 자…”
민주는 안경을 받아썼다. 처음에는 피교수와 개만 보였다. 그런데 피교수의 등 뒤에 삐죽 나온 머리가 보였다. 민주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피교수 옆에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인민군 복장의 소년이 서 있었다. 민주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안경을 벗었다. 소년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게 뭐예요?”
“얘 이름은 석금동인데, 인민군 소년병이야. 전쟁 때 여기 야전병원에서 전사했다는구나.”
민주는 다시 조심스럽게 안경을 썼다. 다시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민주는 얼른 안경을 다시 벗었다.
“절 보고… 손을 들었어요. 설마 귀신이 지금 저한테 인사한 거예요?”
동동이가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컹컹 짖어댔다. 피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낯 가리는 친구인데, 웬일이지?”
민주는 한쪽 손을 흔들면서 다시 안경을 썼다. 소년병이 메트로놈처럼 손을 흐느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희미하게 다른 그림자들도 보인다. 민주는 안경을 다시 벗었다.
“아 오늘 진짜 돌겠네. 그럼 이 개는?”
“아, 이 친구는 동동이라고 내가 이름을 붙여줬는데, 원래는 동성이라고 12년 전 우리 과 학생이었어.”
“이 개가 우리 과 선배라고요?”
“아니, 얘가 원래 사람인데, 아 이거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하나. 여하튼, 12년 전에 네 친구 성민이처럼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지. 그 안경도 동성이의 안경이야.”
“그럼 아까 괴물들과 싸운 것이… 이 개 아니 선배님인가요?”
“맞아. 같이 온 친구들이 더 있었는데, 이곳으로 통로를 열고 놈들과 싸우다가 울음을 멈췄다…”
동동이는 앉은 자세로 우우~ 늑대처럼 구슬픈 소리를 냈고, 안경 속 금동이는 거수경례를 했다. 그럼 그 푸른 불꽃들이….
“울음을… 멈춰요?”
“소멸했다는 뜻이야. 그들은 끊임없이 떠돌며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을 찾아 우는데, 삼천번을 울어야 누군가 한번 흘깃 돌아본다고 한다. 할로우맨에 나오는 '마른 풀밭의 바람처럼 혹은 마른 창고의 깨진 유리를 밟는 쥐의 발소리처럼' 우리가 흘려버리는 그 작고 우연한 소리들이 삼천 번을 통곡하며 우리를 부르는 그들의 울부짖음이라는 말이지.더 이상 울음이 나오지 않아 소멸의때가 되면….그들의 마지막 작별 인사가 뭔지 아니?”
“귀신도 서로 작별인사 해요? 뭔데요?”
“’우리가 널 위해 울어줄 것이다.’”
동동이가 또 한 번 머리를 들고 우우~ 짖어댔다. 안경 속 금동이는 더욱 엄숙하게 거수경례를 했다. 찢어진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간 듯 보였다.
“대박… 귀신들이 교수님을 위해 키쿠들과 싸우다가 죽었… 아니 울음을 멈췄고…”
“그리고 우리가 넘어온 후에 통로는 아까 그 괴물들에 의해 붕괴됐어.”
“슈퍼 대박. 교수님, 이게 다 뭐예요? 미군 방송에서 보던 환상특급인가요?”
“후~ 모르겠다. 이 책으로 어떻게든 혜린이를 찾으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뿐이다.”
“전 어떻게든 친구들에게 돌아가야 해요.”
“민주야,… 네 친구들은 괜찮다.”
“진짜요? 어떻게 아세요?”
“얼굴없는성자단. 내가 너희 다 만났어.”
“아 다행이다. 송희랑 애들이 제 걱정 많이 하죠?”
“…. 그럼, 걱정 많이 했지.”
“근데 교수님, 왜 아까 절 보고 그렇게 놀라셨어요?”
“그야… 널 여기서 볼 줄은 몰랐으니까.”
“근데 왜 저보고 민주 맞냐고 물으셨어요?
“그야,… 놀랬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아닌데, 반가운 게 아니라 꼭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내가?...”
“네, 얼굴없는성자단을 다 만나셨다면, 그 ‘너희’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요?”
“… 그래 맞아….”
“와우. 돌겠네. 그럼 열흘 동안 난 뭘 한 거지? 난 여기 있는데 또 다른 나는 밖에서 막 돌아다니고… 그래, 잘 있던가요 또 다른 민주는? 친구들도 막 만나고?”
“민주야, 바깥 얘기는 나중에…. 혜린이를 먼저 찾자. 이 일은 네게도 중요해. 그러니까 빨리…”
“그래도… 열흘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면서요? 그 많은 일에 저도 관련되어 있나요?”
“그렇긴 한데…”
“교수님, 혹시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모두에게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정말 큰 일들이 있었어. 그래서 시간이 없다는 거야.”
“제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그래서 지금 돌아가면 안 된다고 하신 거예요?”
피교수는 침묵했다. 그의 표정은 비 오는 날 베란다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 표정과 비슷했다. 그렇기에 민주는 즉답을 피하는 그의 모습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제가 잡혀갔어요?... 아님 다쳤어요?... 뭐 그것도 아님…”
피교수가 민주의 두 손을 잡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피교수의 눈은 충혈되었고 얼굴 근육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민주야,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다. 내 책임이야. 그래도… 지금은 날 믿어주면 안 되겠니? 혜린이를 만나서 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만 날 믿어주면 안 되겠니?”
민주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자기에게 벌어진 그 일이 피교수의 입을 통해 확인되면 그 이후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도 했고, 또 한 편으로는 한번 놓았던 피교수의 손을 또 놓아버리면 끝없는 어둠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민주는 고개를 흔들어 복잡한 생각들을 털어버리고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교수님…. 그럼 이제뭘 해야 하죠?”
“고맙다. 민주야! 우선 책을 좀 살펴볼까?…”
피교수와 민주는 위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서 책장을 하나하나 꼼꼼히 넘기며 살펴봤다. 책의 상태는 온전했고 안은 모두 텅 빈 페이지들이었다. 민주가 책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뭐야, 빈 책이네요.”
“아니, 페이지마다 이야기로 가득하다고 혜린이가 그랬다. 펜으로 쓴 게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에? 그럼 투명 잉크인가?”
“아니 손가락으로 이렇게 이렇게 하던데… 아 답답하네. 혹시 혜린이가 했던 말 중에 생각나는 것 더 없니?”
“음… 시간이 없다, 파멸이 온다… 교수님이랑 책을 꼭 찾아달라. 그래서 제가 언니는 어딨냐고 물었더니 책이라고 했어요.여기까진 맞게 온건 데…. 아 맞다. 열쇠라고 하면서 무슨 외국어였는데… 살… 살바 뭐라고 했던 것 같아요.”
“혹시 살바치오?”
“네, 맞아요! 그게 무슨 뜻이죠?”
“라틴어로 구원이란 뜻인데 이 책의 제목이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어.”
“아하 그게 열쇠로구나… 뭔지 알겠어요. 자 책을 빛 가운데 놓아보세요.
피교수는 저 위 구멍에서 내려오는 희미한 빛 가운데에 책을 조심스럽게 놓고 물러섰다. 아무 변화도 없다.
“응? 뭐가 반사되어야 하는데. 오케이, 그럼 한번 숨을 모아서 후~ 하고 불어 보세요.”
피교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겉장을 후~ 하고 분다. 아무 변화도 없다. 동동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낑 소리를 낸다. 민주의 눈짓에 피교수는 숨을 잔뜩 들이쉬고 힘껏 다시 분다. 역시 아무런 변화도 없다. 민주는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표지의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표면을 손가락으로 훑는다.
피교수는 미심쩍어하면서도 혜린과 같은 자세로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salvatio'를 손가락으로 적는다. 두 사람은 바짝 긴장하고 기다리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민주야, 이거 혜린이가 알려준 방법들이야?”
“아뇨. 이상하다. <인디아나 존스>에서는 됐는데?”
“뭐? 그럼 너 영화에서 본 걸로?...”
“그럼요. 보통 인디가 유물에 빛을 반사하거나 요래 요래 불고 털고 살살 만지면 비밀의 문이 열리… 와우 대박! 보세요 이거!”
민주의 손가락이 표지에 닿자. 표면에 파르르 진동이 일며 일렁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손을 대자 마치 물속처럼 책 속으로 손가락이 들어간다. 표지를 후 하고 부니까 연기 같기도 하고 물결 같기도 한 세미한 파동이 표지를 타고 흐르고 있다. 민주가 흥분해서 외쳤다.
“어머 어떡해, 제가 풀었어요. 역시 인디가 진리야!”
“자 인디 박사님, 그럼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문이 열렸으니까….”
민주는 책을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마치 뜨거운 욕탕에 들어가듯 한쪽 발끝을 조심스럽게 들이민다.
“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리가 그 책 속에… 들어가네!”
민주는 말릴 사이도 없이 한쪽 다리를 책 속에 완전히 넣은 후에 팔로 바닥을 짚고 다른 다리도 마저 책 속에 담갔다. 두 다리가 사라진 채 책 위에 바로 허리가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민주의 모습은 기괴했다. 동동이는 뒤로 물러서며 낑낑거렸다. 민주는 손을 들고 외쳤다.
“자 교수님, 가요!”
“어딜?”
“잃어버린 성궤, 아니 혜린 언니를 찾으러! 느낌 좋아요.제 방 침대에서 쑥 가라앉을 때에도 이랬어요. 저 밑 어둠 속으로 끝없이 내려가다가 둥실 멈추면 혜린 언니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빨리요!”
“민주야, 기다려 봐. 이쪽에서 널 보면 좀 위험해 보이거든.”
“괜찮아요. 근데 이게 늪처럼 아래로 끌어당겨서. 빨리요!”
손짓을 하는 민주의 몸은 이제 가슴까지 책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피교수는 마음이 급해졌다.
“알았다. 동동아 너도 가자. 얼른.”
동동이를 불렀지만 그는 다가오지 않고 오히려 뒤로 물러서며 꼬리를 말며 멍멍 짖었다.
“아 너랑 금동이는 못 간다고?”
동동이는 빛이 스며드는 저 위쪽 계단의 구멍을 보며 다시 짖었다.
“알았다. 그럼 저 위에서 꼭 만나자…”
“교수님, 빨리~ 뽀글…”
민주의 입이 잠겼다. 민주는 눈을 치뜨며 아직 책 위로 나와 있는 팔로 급하게 책에 손가락질을 해댔다. 피교수는 책 앞으로 다가가 주저하며 책에 한쪽 발을 조심스럽게 담갔다.
“아 느낌 이상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동-동동아, 금동아,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라. 응? 왜? 아냐. 날 위해 울어줄 필욘 없어. 울지 마!”
동동이가 꼿꼿이 차렷 자세로 앉아서 우우~ 노래하듯이 울었다. 아마 금동이도 피교수에게 경례를 하고 있을 것이다. 피교수가 어정쩡하게 한쪽 다리만 넣고 동동이에게 손을 내저을 때, 팔만 남은 민주가 피교수의 다리를 휙 잡아당겼다. 피교수의 몸은 균형을 잃고 순식간에 책 속으로 첨벙 빠지듯 사라졌다. 책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덩그러니 바닥에 놓여 있었다. 동동이가 다가와 낑낑대며 냄새를 맡고 책을 입에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