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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국 May 05. 2024

바꿀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심지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2024년 4월 15일, 3살 차이인 남동생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솔직히 슬프지는 않았다. 그냥 그 상황이 웃겼다. 형제를 가진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입대 당일 동생과 대화를 나눴다.

     

“진짜 가냐?”

“(대충 심한 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충 이런 대화 말이다. 지금쯤 아마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생활관에서 쭈뼛쭈뼛 앉아있지 않을까?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친동생이 군대를 가서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다. 최근 알게 된 후배들, 동생들이 군대를 갈 때에도 똑같이 그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이 글은 최근 느낀 알 수 없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 또한 그에 대한 고찰이다.    

  

최근에 지인들이 입대를 했을 때 느낀 불편한 감정은 조금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 이유는 정작 내가 입대를 할 때에는 그런 불편한 감정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솔직해지자면, 나는 군생활이 시작되기 직전에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뭔가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딛는 것 같고, 군복을 입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으며, 내가 멋있어지는 길 같았다. 결정적으로, 피할 수 없는 일이기에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경험했던 1년 6개월은, 내 인생 중 정말 최악의 경험이었다.

     

사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좋지 않은 기억보다 재밌었던 기억들, 보람을 느꼈던 기억들, 그 시절의 향수 등이 훨씬 더 많이 떠오르기는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군생활이 좋았냐고 물어보면 좋았다고 대답할 수는 없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내가 그런 불편한 감정을 느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곧 군대를 가는 지인이 무슨 일을 겪을지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다. 가는 부대도 다르고, 보직도 다르고, 같이 생활하는 선임, 동기, 후임도 모두 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기본적으로 공감을 한다. 그리고 공감의 과정은 나 자신을 어떤 대상에 이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내가 불편한 감정을 느낀 이유는 곧 군대로 가는 지인에게 나 자신을 이입하고, 상상 속에서 내가 되어버린 지인은 나의 머릿속에서 내가 1년 6개월간 경험했던 무수한 일들을 똑같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압축된 시간 속에서 말이다. 그에 대한 안타까움이 불편한 감정의 정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최근 내가 느낀 감정은 결국 상대방이 무슨 경험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에서 온다.     


그렇다면, 안다는 것은 항상 좋은 영향만 있을까?    

 

인간은 항상 본인이 모르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궁금해한다. 아마 이런 속성은 인류를 지구의 지배종으로 만들어낸 기전력이 아닐까?     


하지만 안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런 말도 존재한다.     


“모르는 게 약이다.”     


그리고 이 말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최고 등급의 기밀을 아는 것만으로 죽임을 당하는 조연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나는 군생활이 시작되기 전 생각보다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다시 가라고 하면 어떨까? 만약 당신이 군필자라면, 당신은 군생활을 한번 더 할 수 있는가?    

 

꼭 군생활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외로웠던 기억을 떠올려보자. 분명 어떤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다시 하라고 하면 할 수 있는가?     


아마도 힘들 것이다.   

  

19살, 수험생 때 다니던 수학 학원 선생님이 가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고3 때로 다시 돌아가면 그렇게 공부 못 해.”     


이 말은 정말 진심으로, 힘들게 수험생 시절을 보낸 선생님의 과거가 함축된 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에 있을 바꿀 수 없는 어떤 힘든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힘들었던 과거의 기억들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가 고통받는 것과 같지 않을까?    

 

이런 측면에서 때로는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많은 이야기, 신화와 같은 것들에서는 미래를, 정확히는 운명을 내다보는 것을 금기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바꿀 수 없는 미래를 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해진 미래를 바꾸려고 하다가 더 깊은 심연에 빠져버린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는 신탁을 통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 방랑자로 떠돌다가 우여곡절 끝에 테베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 눈을 찔렀다. 

    

이렇듯 바꿀 수 없는 미래의 구체적인 상황을 아는 것은 자신을 시간이라는 사슬로 결박하는 것과 같다.   

  

미래를 모르기에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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