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어떤 절대적인 존재의 파편이다. (feat. 모노노케 히메)
2024년 1학기가 시작하기 직전, 20학점을 채우기 위해서 교양 하나를 들어야 했던 나는 학교에 어떤 교양 과목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솔직히 정말 아무것도 듣기 싫었지만 졸업을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딱히 듣고 싶은 과목도 없었기에 나름 합리적인 시간에 강의를 진행하는 과목을 선택했던 것 같다.
그 과목의 이름은 ‘종교와 문화’로, 아무거나 신청한 강의지만 생각보다 흥미로운 내용을 다루어서 나름 재미있게 들었던 것 같다. 정확히는 듣는 중이다.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 과목의 중간고사 대체 과제가 ‘종교 관련 영화 시청 후 감상문 작성하기’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리스트에 있는 영화는 4개였다. 파묘, 곡성,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그리고 내가 선택한 모노노케 히메였다.
모두 유명한 영화라고는 하지만 애초에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 나이기에 모두 모르는 영화들이었다. 그래서 인터넷에 적당히 서치를 한 후, 모노노케 히메가 재미있을 것 같아서 선택했다.
그리고 모노노케 히메를 선택한 것은 나의 2024년 선택 중에 단연코 최고의 선택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영화 ‘모노노케 히메’의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한다. 영화를 곧 볼 예정이거나 스포일러를 싫어하시는 분들은 넘겨주었으면 한다.
참고로 모노노케 히메는 1997년 개봉한 영화이다.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모노노케 히메의 작중 시기는 1300년~1500년대의 일본, 즉 무로마치 막부 시대이다. 처음 영화를 시작하고 나면 이런 자막이 나온다.
“먼 옛날, 이 나라는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곳에는 태고의 신들이 살고 있었다.”
즉, 모노노케 히메는 신과 인간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아시타카는 초반에 나온 ‘재앙신’을 막으려다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되고, 그로 인해서 오른팔에 죽음의 저주가 새겨지게 되었다. 재앙신은 본래 신이었던 존재가 큰 충격을 받아 화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시타카는 오른팔의 저주를 풀기 위해 신이 재앙신으로 변하게 된 이유를 찾고 싶었고 재앙신의 시체에 있던 탄환의 출처인 서쪽 끝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 여정에서 나오는 몇 가지의 이야기이다.
이야기에서 나오는 여러 인물과 많은 사건을 이야기하려면 아마 내용이 너무 길어질 것 같기 때문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꼭 필요한 인물들만 언급하겠다. 그들은 바로 인간에게 버려져 신에게 길러진 ‘산’, 그리고 죽음과 삶을 지배한다고 알려져 있는 초월적인 신 ‘시시가미’이다.
작중 ‘신’이라고 표현되는 여러 존재는 멧돼지, 들개를 비롯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신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싫어한다. 싫어하는 수준이 아니라 매우 적대적이다. 그 이유는 인간과 신이 큰 갈등을 빚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신이 재앙신으로 변한 이유가 탄환, 즉 사람이 쏜 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은 인간과 신의 갈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이다.
그렇다면, 아시타카가 재앙신에게 받은 ‘죽음의 저주’는 어떤 것일까?
많고 많은 해석이 있을 것이고, 작가의 의도도 있겠지만 나는 이 ‘죽음의 저주’를 ‘운명’이라고 해석했다. ‘저주에 걸리면 죽는다.’와 같이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 하겠다.
여러 가지의 사건, 그리고 그를 해결하는 과정이 있고 난 후 영화의 후반부는 이렇게 된다.
시시가미는 영화의 후반에 어떤 악역이 쏜 총에 맞아 머리가 잘리게 되는데, 시시가미는 머리가 떨어져도 죽기는커녕 잘린 단면에서 나온 검은색 액체가 주변 모든 것을 죽이고 파괴했다. 또한, 목이 없는 시시가미는 엄청나게 거대한 존재로 변화해 본인의 목을 찾아서 폭주했다. (참고로 공포영화가 아니다.)
하지만 시시가미는 머리를 잘렸음에도 보복이나 복수를 하지 않고 잘린 머리를 다시 돌려받은 직후 주변의 파괴되고 생명을 잃어버린 것들을 수복하며 마치 시시가미 본래의 형태가 그것이었다는 듯이 자연 그 자체로 돌아가 버린다. 이 과정에서 아시타카의 저주도 사라진다.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나고 난 후, 아시타카와 산은 대화를 나눈다.
“난 아시타카 당신은 좋지만 인간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래도 괜찮아요. 산 당신은 숲에서, 난 타타라 마을에서 살 테니까요. 함께 살아가는 거예요. 만나러 갈게요.”
스토리를 많이 압축했고, 언급하지 않은 인물도 많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에 필요한 내용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일단, 작중 ‘신’은 현실에 무엇에 대입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인간을 제외한 자연계에 존재하는 구성 요소들일 것이다. 고양이, 새, 들개, 코끼리, 나무와 같은 생명체들 말이다.
그렇다면 ‘시시가미’란?
마치 그리스 신화의 ‘가이아’처럼, 아마도 자연, 어쩌면 지구 그 자체를 지칭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아닐까?
인간이 쏜 탄환에 맞아 생긴 ‘재앙신’은?
아마도 인간이 한 여러 가지 일들에 의해 피해를 본 동물들을 뜻하는 게 아닐까? 지금도 아프리카의 초원에서는 코끼리의 밀렵과 같은 일이 매우 많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작중 ‘재앙신’은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공격성을 보인 게 아닐까?
그렇다면, 신의 공격성에 의해 죽는 인간들은?
아마도 인간이 저지른 짓들에 대한 대가일 것이다. 화석 연료를 너무 많이 태워 발생한 지구 온난화와 같은 것들 말이다.
앞서 주인공인 아시타카의 오른팔에 새겨진 죽음의 저주는 ‘운명’이라고 말했다. 이는 어떤 것에 대한 운명일까?
내 생각엔, ‘신과 인간의 갈등을 해결해야만 하는 운명’인 것 같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영화 중반부에 아시타카는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산은 그런 아시타카를 시시가미에게 데려가고, 시시가미는 아시타카의 총상을 회복시켜 준다. 하지만 여기서 오른팔에 있는 죽음의 저주는 없애지 않는다. 마치 그것이 어떤 필요가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영화의 후반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을 때, 마침내 오른팔에 있던 저주를 거두어간다.
그렇다면 시시가미는 아시타카를 통해 신과 인간의 갈등을 끝내고 싶지 않았을까? 그게 시시가미의 의도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앞서 시시가미는 자연, 지구 그 자체에 해당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작중 인간도, 신도 모두 시시가미의 자식들이다. 그렇기에 인간과 신이 그토록 갈등을 빚어도, 인간이 시시가미의 머리를 잘라도, 보복하지 않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려놓고 원래의 형태로 돌아갔다. 이는 아마도 자연의 ‘자정 작용’을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영화 결말에 아시타카의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대사가 의미하는 바는 아마도 ‘자연과 인간은 본래 하나이다.’가 아닐까? 작가는 궁극적으로 이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닿고 난 후, 정말 이 영화는 명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무심코 사람과 그 외의 존재들을 구분해서 생각한다. 솔직히 이상한 사실은 아니다. 우리는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들을 정의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속성에 따라서 다른 존재보다 인간이 많은 면에서 우월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인간이 다른 존재들을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우리가 아무리 과학을 발전시키고, 문명이 발전되어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인간은 언젠가 자연재해로 인해 멸종할지도 모른다.
거대하게 변한 시시가미는 그런 불가항력의 자연재해를 보여준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영화에서 이미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또한 많은 것이 파괴된 이후에도 앞으로 살아나가기로, 그리고 언젠가 만나기로 약속한 두 자연의 조각들처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훗날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우리가 살아갔던 터전, 우리의 체온, 목소리가 모이고 모여서 나비 효과가 되어 그것을 살짝 비켜갈 수 있게 도와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