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노벨상
어렸을 적 보았던 한 영화가 있다. 매우 어렸을 때 본 영화임에도 내용의 생소함에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그 영화는 바로 ‘거짓말의 발명’이다. 2009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거짓말이 없는 세상에 살던 주인공이 거짓말을 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를 보고 어린 마음에 이런 생각을 했다.
‘나도 저런 것을 생각해내고 싶다’
거짓말이 없는 세상에서의 거짓말이란 그야말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것을 생각해 낸다면 절대적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조금의 생각을 했고, 얼마 안 가 포기했다. 어린아이의 생각에서도 그런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새로운 생각을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명예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노벨상이다.
노벨상이 생기게 된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약간의 우연과 한 사람의 결심이 노벨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스웨덴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해 당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다이너마이트를 본래 목적인 건설, 토목 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군사용으로 정말 널리 사용되었고, 평소에도 이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한 신문사가 노벨이 사망한 것으로 착오하여 보도하였고, 그 신문에는 노벨이 ‘죽음의 상인’이라 지칭되었다. 이를 보고 충격을 받은 노벨이 자신의 전 재산을 노벨상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대한 원본 신문 기사나 다른 증거들을 찾으려고 노력해 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사실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노벨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든, 현재 노벨상은 뭔가를 처음 발명, 발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명예이자 부이다.
자기 자신의 분야를 깊이 연구하고,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분야에서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에 대한 최종적인 명예가 아마 노벨상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
노벨상은 1901년 처음 수상이 시작된 이후로 매년 수상자를 선정한다. 우리나라는 故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 최초이자 마지막이다. 노벨상이 어떤 분야에서 그 해 가장 높은 업적을 달성한 사람에게 주어진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가 단 한 번밖에 받지 못했을 정도로 힘든 상일까?
내 생각엔 그건 아닌 것 같다.
선진국의 기준이 무엇일까? 개인마다 기준이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선진국인가? 그렇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일반화된 정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를 선진국으로 지칭하겠다. 이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다. OECD 국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OECD 국가 중 노벨상 수상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국가는 거의 없다. 심지어 하나만 받은 곳도 많지 않다. 따라서 정확한 평균을 굳이 계산하지 않아도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최하위의 노벨상 수상 횟수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안다.
가장 노벨상 수상 경험이 많은 나라는 무엇일까? 작성일 기준 413회의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노벨상 수상 경험이 가장 많다. 그리고 미국의 인구는 3.3억 정도로, 우리나라의 약 6.5배 정도 되는 인구수를 가지고 있다.
어떤 한 분야에 특출 난 재능이나 실력을 갖출 확률이 같다고 가정했을 때 노벨상은 인구수에 비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구수 5천만의 우리나라는 미국과 비교해 약 70번의 노벨상 수상 경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유럽과 미국의 노벨상 수상이 많고,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노벨상 수상 횟수가 비교적 적은 것을 보고 상을 수여하는 주최 측의 인종차별적인 요소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증명할 방법도 없고 결정적으로 일단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옆 나라인 일본은 인구 1.2억이 넘는 우리 생각보다 조금 더 큰 나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일본의 노벨상 수상 횟수는 29번이다. 이 예시는 만약 인종차별적 이유가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이유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이다.
그렇다면 인종에 따라서 정말로 우월함과 열등함이 나뉘는 것일까?
모두가 알듯이 그것은 아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총, 균, 쇠’는 ‘왜 유럽에서 문명이 먼저 발달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책에서는 유럽의 문명이 가장 빠르게 발달하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리적, 환경적인 특성이 다른 곳보다 월등히 좋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유럽인의 인종이 우수해 가까운 과거 세계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머리가 좋다.’는 말도 있긴 있지만 절대적인 사실은 아니기에, 일반적으로 사람의 재능은 인종과는 절대적인 관계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여태까지 단 한 번의 노벨상만 수상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엔 그에 대해 여러 이유가 있다. 몇 가지를 말해보겠다.
먼저, 우리나라는 한 사람이 본인의 재능을 깨닫고, 그것을 꽃피우기에 너무 힘든 환경이다. 그럴 수 있는 확률 자체가 다른 선진국들보다 낮다는 이야기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이 본인의 재능을 깨닫고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서는 다방면으로 많이 해 봐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는 본인의 생각만으로 ‘아, 이거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행할 수 있지만 어렸을 때에는 현실적으로 그러기가 힘들다. 따라서 재능을 깨닫고 하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 부모님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편적으로 어렸을 때 오직 공부만 하며 살아간다. 물론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해 대학교에 들어가고 졸업해 취업하는 과정은 현재 조금은 당연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행하는 삶의 첫 단추이다.
조금 심한 가정은 아이에게 몇 개의 학원을 보내고 성적을 관리하며 공부를 시킨다. 요즘은 그런 게 조금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사교육은 수요가 많다.
나는 지금 수학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면 아이들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그중 고등학생 아이들의 하루 일과를 들어보면 정말 끔찍하다. 아이들은 아침 6시에 일어나 8시까지 학교를 가고, 5시쯤 나와서 학원을 가 10시까지 공부한다. 이런 삶에서 아이들이 새로운 것을 찾고, 재능을 찾고,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은 고사하고, 당신은 이런 삶을 버틸 수 있는가?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절대 버티지 못할 것 같다. 분명 내가 걸어온 길임에도 말이다.
이렇듯 아이들은 누구보다 본인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찾아야 할 시기에 정형화된 교육을 받고, 틀에 박힌 교육을 받는다. 심지어 배운 것들을 평가하고, 시험을 봐 줄을 세운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의미 없다고 여겨진다.
이런 문화와 이런 생각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을 닳아버리게 만든다. 틀에 맞춰진 사람들은 틀에 박힌 생각밖에 하지 못하고 결국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지 못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어떤 새로운 것의 부품이 되어 그 역할을 수행할 뿐 새로운 것을 개발해내지는 못하게 되어버린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가 일어나는 기관이 어디일까?
질적인 차원에서는 조금 떨어질지는 몰라도 각국의 대학교에서 연구가 많이 일어난다. 양적인 측면에서는 타 연구기관에 비해 아마 압도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대학교의 연구 실적이 없어서 노벨상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나라 대학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연구 실적이 좋은 곳도 다수 존재하고 해외에서 유학을 오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대학교는 타국과 비교해 높은 수준에 속한다. OECD 국가 기준에서도 말이다. 그렇다면 노벨상이나 그에 준하는 큰 명예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의 대학이 연구하는 분야는 대다수 응용된 것들이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연구는 많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연구 분야가 매우 지엽적인 것도 이유가 된다. 이 두 요소가 새로운 것의 연구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내가 학교에 있으면서 보고 들은 바는 그렇다.
사실 이렇게 연구 분야가 응용 분야에만 국한되고, 그마저도 좁은 범위인 것에 대한 이유도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대학이든, 기업의 연구소이든, 연구소에서는 항상 어느 정도의 실적이 있어야 한다. 실적에 비례해 국가, 혹은 지원사업에서 받는 것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방식을 택할 것인가? 조금 덜 새로운 것이더라도, 여러 연구를 진행해서 실적을 쌓는 것을 원하지 않을까? 그게 본인의, 연구실의 이득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연구로는 노벨상에 준하는 명예를 거머쥐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노벨상을 받을 정도의 연구를 하려면 고급 인력도 필요하고, 그에 대한 시간도, 시설도, 아이디어도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돈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돈은 기업이나 단체, 혹은 국가로부터 받는다. 어떤 곳에서 지원을 받든 돈을 지급하는 쪽은 연구하는 쪽을 재촉한다. 빠르게 성과를 보여 달라고 말이다.
이렇게 되면 연구하는 쪽은 실적을 내기 위해 연구 분야를 정하는 것부터 시간이 짧게 걸리는 연구를 정한다. 아니, 지원하는 쪽에서 시간이 적게 걸리는 연구를 선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연구 기간은 계속해서 짧아지고, 연구의 질은 낮아지고, 범위는 지엽적으로 변한다.
이런 악순환으로 인해서 우리나라에서 과학 분야의 노벨상이 나오기 힘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4년 우리나라의 연구, 개발 예산이 삭감되었다. 33년 만의 일이다. 이 소식을 들은 연구소들은 정말 난리가 났다. 특히 국가에서 예산을 지원받는 연구소는 특히 더 그랬다. 이유는 ‘예산 사용의 비효율을 개선하고 낡은 관행을 걷어내기 위함’이다. 이 말은 결국 투자 규모에 비해 논문이나 기술의 상용화, 즉 실적이 적기 때문이라고 업계 사람들은 말한다. 이는 앞서 말했던 악순환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결국 실적이 적어서 예산을 삭감한 것이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연구에 들어가는 비용은 낭비되는 것 같이 보인다. 몇 년을, 길게는 몇십 년을 연구해도 실적이 나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를 한다는 것은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고, 안되면 수정도 하고, 분석을 하는 데 시간과 비용이 필연적으로 쓰인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연구소는 연구에 대한 수익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연구를 성공시켜야 그에 대한 수익이나 기타 다른 것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 개발 예산 삭감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담보로 급한 비용을 당겨서 쓰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연구 강국이다. 새로운 길을 개척할만한 연구는 많이 없어도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우리나라가 강한 분야가 분명 있다. 하지만 이런 실적과 예산 문제가 반복된다면 계속해서 우리나라 연구의 질은 떨어질 것이고 결국 우리나라는 과학적인 측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연구와 개발에 힘써야 한다. 노벨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에 대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가까운 미래에 경쟁력을 가지려면 개선해야 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국 우리는 누구보다 여러 가지를 해봐야 할 시기에 틀에 박힌 공부만 하고, 그를 뚫고 나아가 새로운 것을 발명, 발견하기 위한 연구를 할 때는 자금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맞닥뜨린다.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만 있다면 마치 거짓말을 발명한 사람처럼 우리도 뭔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힘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미래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