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고 싶은 기억들
예전에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 오늘부터 일기 쓴다. 일기장 샀음.”
그 말을 들은 나는 코웃음 치며 말했다.
“일주일도 못 간다에 손목 건다.”
“손목 날아갈 준비 해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에게 아직 일기를 쓰고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친구 말로는 일주일은커녕 3일도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의 손목을 지켜준 친구는 일기를 쓰기 위해 산 다이어리를 집구석에 처박아두고 아마 이제는 어디 있는지조차 까먹지 않았을까?
우리는 모두 일기를 쓴 경험이 있다. 초등학생 때 누구나 일기 숙제를 한다. 방학 숙제이든, 매일매일 하던 숙제이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숙제를 위한 일기는 정말 나의 이야기를 담아내기가 쉽지 않다. 나의 내면,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과 조금은 삐뚤어진 감정들까지 일기에는 포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렸을 때 방학 숙제랍시고 한 달치 날씨를 확인해 가며 몰아서 쓴 일기는 정말 나의 안쪽을 써 놓은 일기가 아니다.
당신은 당신의 일기를 쓴 적이 있는가? 그런 귀찮은 걸 싫어하는 나이지만, 나도 일기를 쓴 적이 딱 한 번 있다.
그건 바로 나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 허구한 날 나오는 군생활 시절이다.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익숙하지 않은 것들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있을 때 하루하루를 마치며 일기를 썼다.
그 일기를 다시 펼쳐보면 웃음이 나온다. 온갖 욕설, 당시 좋아했던 이성, 받았던 인터넷 편지에 대한 내용 등등 정말 여러 개의, 손을 대면 바스러질 것 같은 문장들이 줄줄이 쓰여 있다. 내가 만약 내일 죽는다고 하면 가장 먼저 찢어서 버리고 싶은 것이 그때 쓰던 일기이다.
군생활에 조금 적응된 후에는 쓰지 않았지만, 그때 쓰던 일기는 당시 내가 느낀 감정들을 정말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그 일기를 최근 다시 살펴보며 든 생각이 있다.
우리의 기억력은 완전하지 않다. 망각이라는 존재가 우리의 기억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기는 우리가 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다.
아무리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들까지도, 그 당시에 쓴 일기를 살펴보면 그때의 기억이 마치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살아난다.
만약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일기를 써 왔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일기장이라는 외장 메모리에 저장된 나의 기억들을 잃어버릴 일은 없지 않았을까?
우리는 기억과 추억을 소중히 생각한다. 기억은 사실상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나를 이루고 있는 조각들을 시간이 지나며 하나씩 떨어뜨리고 가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다.
먼 미래에 가서 숭숭 뚫려버린 자신을 보고 이렇게 말할 뿐이다.
“언제 이렇게 되었지?”
이를 우리는 ‘늙어간다’라고 표현한다.
늙는다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억들을 하나씩 잊는 것, 몸의 노화보다 정신적인 노화가 존재를 유지하는 데 훨씬 치명적이다.
사람들 중에는 노화를 막기 위해 매일 썬크림을 바르는 사람도 있고, 피부과를 다니며 관리를 받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외적인 것, 표면이 늙지 않는다고 해서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올 망각으로부터 비롯된 노화는 그런 것으로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기, 또는 그에 준하는 것으로 기억의 조각들을 붙잡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유지된 나 자신은, 조금 멀다고 할 수 있는 미래에도 본인의 존재를 지킬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새로운 세상의 파도에도 휩쓸리지 않고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2024. 10.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