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어떤 가치를 담고 살아갈 것인지
처음 시작한 회사 생활 수습 딱지를 겨우 떼고, 모 유통회사에서 점포관리 업무를 할 때였다. 2016년 가을의 초입. 지겨운 여름 더위라는 불청객이 차츰 멀어질 때쯤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손님이 불쑥 찾아왔다. 매장 백룸에서 업무를 보던 중 밖이 부산스러워 나가 보니 한 남자가 매장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저기 회색봉지 하나 줘! 줄 때까지 여기서 안 비킬 거야! “
매장 입구에 주저앉은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팝콘이 진열되어 있었다. 팝콘의 패키지는 회색 바탕 가운데 팝콘 사진이 도드라져 있었는데, 간식거리에 회색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 매치다. 그런데 저 패키지가 이렇게 매혹적으로 사람을 홀리는 것이었던가? 별 볼일 없는 과자 봉투 하나가 일흔 살은 족히 되어 보이는 어르신을 일곱 살 아이처럼 떼를 쓰게 만들었다. 어르신의 모습은 누가 봐도 이 도시에서 가장 자유롭게 사는 사람의 형색을 하고 있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베개 삼아 살아가는 분들과 같았다. 본인의 모습에 충실하며 이 30평 남짓한 매장 안에 있는 그 누구보다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팝콘 한 봉지를 쟁취하기 위하여.
“어르신 이건 상품이라 그냥 드릴 수 없고 사 드셔야 해요.”
나름 조리 있게 설명한다고 했지만 결국 나에게 돌아온 건 두 배의 이상의 징징 거림이었고, 매장 입구에 앉아 있던 분을 드러눕게 만들었다. 역시 사람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같은 의미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행동을 해본 게 한두 번이 아닌 듯 내공이 깊어 보였고, 대부분의 다른 곳에서는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듯이 과자를 쥐어 보냈을 것이다.
나도 그들과 같이 팝콘 한 봉지 쥐어서 보내면 쉽게 해결될 문제였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괘씸했다.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어르신과 저 억지를 받아주며 저 상태까지 이르게 만들었을 사람들 모두가.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고 소모적이기만 할 것 같았다. 회사 생활 이전에 다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얻은 깨달음이 하나 있는데,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에서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원리원칙대로 정도를 걷는 것이 최선이다. 바로 경찰서에 영업방해로 신고를 넣고 스스로 걸어서 귀가하실 건지, 경찰 동행하에 귀가하실 건지 선택지를 드려본다. 그는 망설임 없이 전자를 선택하였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난다.
“너 내가 얼굴 기억했어. 다음에 만나면 죽일 거야.”
그건 다음에 알아서 죽이시고 다른 고객들에게 방해되니 빨리 들어가시라고 배웅해 드린 뒤 어느덧 9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 이후로 물론 그를 마주친 적은 없다. 그 당시에는 흔히 있는 진상의 해프닝 정도로 생각했지만, 그때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세상에 시달려 조금은 더 삶에 경험치가 쌓인 지금 그를 다시 고찰해 본다.
팝콘 한 봉지에 인간으로 가질 수 있는 존엄성과 부끄러움을 버릴 수 있는 용기를.
팝콘 한 봉지에 살인 예고를 할 수 있는 패기를.
팝콘 한 봉지에 담긴 용기와 패기로도 넘지 못한 공권력에 대한 나약함을.
나름에 고찰에도 답은 모르겠다. 저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하여 선을 넘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그의 행동에 대한 답은 얻지 못하였지만 하나의 깨달음은 생겼다. 삶을 살아가며 어디에 지향점을 두고 살아가야 가하는지에 대한 고민이다. 사람은 자신이 목표로 삼은 일에 열정과 노력, 시간 등을 쏟는다. 그렇기에 언젠가 사라질 팝콘 봉지같이 세속적인 가치에 나를 담아 소비하고 싶지 않다.
계속된 고민에도 내가 추구하는 가치는 아직까지 딱 잘라 무엇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아직 내가 세상을 잘 모르는 탓인지, 지혜로움 보다 어리석음에 가까운 탓인지는 모르겠다. 단 언젠가 내가 바라는 지향점이 나타났을 때 무리 없이 따라갈 수 있게 나의 가치를 먼저 올려보려고 한다. 계속 낮은 자세로 배우고 반성하는 나날을 보내야겠다. 화려하게 눈에 띄지 않고 나를 배부르게 만들지 않아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일을 만들어가는 내가 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