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 4기 엄마의 주치의 교수님은 항암 치료를 중단하고 일주일 정도 후인, 24년 1월 8일 월요일에 입원을 하라고 했어요. 항암 치료도 중단하는 마당에 무슨 입원인가 어리둥절해 하는 엄마와 아빠에게 주치의는 담담히 이야기했다고 해요.
"획기적인 치료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몸이 많이 지치고 힘드실 테니 한번 체크해 보려는 겁니다."
사실 이 때는 주치의 교수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몰랐어요. 엄마의 항암 치료를 중단하고 하루 이틀이 지났어요. 가족들 모두 많이 슬프지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더 많은 시간을 엄마와 보내자 마음먹으며 서로를 다독였죠. 항암 중단 선언 외래를 다녀온 이후 엄마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더 나빠졌어요. 한 달 가까이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고 누워서 지내기만 했으니.. 기력이 좋을 리 없겠죠.
아빠는 항암 치료 중단 D+3일차에 가까운 동네 병원으로 엄마를 모시고 갔어요. 엄마는 서울 A 병원에 항암 치료를 하러 다니며 기력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힘들 때면, 가까운 동네 병원에서 수액을 맞기도 했거든요. 동네 병원 원장님은 우리 가족과 아주 가까운 지인이세요. 엄마의 항암 치료를 진행하는 중요한 순간마다 정말 귀중한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신 감사한 분이에요. 엄마가 수액을 맞고 아빠와 집에 돌아가신 후, 원장님이 저에게 전화를 주셨어요.
"엄마가 수액 맞고 방금 가셨어.
음... 그런데 이번에는...
엄마가 이겨내시기 어려울 것 같다.
얼굴이 너무 안 좋으시다.
주말에 가족들 모두 엄마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동안 치료받으시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마지막은 가족들 품에서
따뜻하게 편안하게 가셔야지."
원장님과 통화를 하고 나니 눈물이 쏟아졌어요. 주치의 교수가 항암 치료 중단이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얼마간의 시간(몇달)이 더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거든요. 원장님은 오랜 시간 가족들과 함께 해 온 지인이셨기 때문에 엄마를 잘 아시는 분이었고 그래서 이제 엄마와의 이별을 준비하라는 이야기가 더욱 현실로 느껴져 슬픔도 크게 다가왔어요.
24년 1월 5일 금요일 밤, 온 가족이 엄마 곁으로 모였어요. 사실 그 때 딸아이가 12월 말부터 1월 초까지 심한 열감기에 걸려 그 당시 해열제와 감기약(항생제)을 오래도록 먹고 있었어요. 12월 31일과 1월 1일을 부모님과 함께 보내려던 계획도 아이의 고열로 포기했었죠.
그렇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어요. 남편이 퇴근하자마자 엄마 집으로 달려가는데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요. 마치 이게 마지막일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1시간여를 달려서 엄마 집에 도착했고, 엄마는 거실 소파에 누워계셨어요. 함께 있던 이모들은 엄마가 손녀가 온다는 소식에 거의 2주 만에 거실로 나오신 거라 했어요. 그러더니 희미하게 눈을 뜨시고는 머리맡에 있는 지갑에서 5만 원권을 꺼내 딸아이에게 주셨어요.
"휴대폰 샀다며~ 엄마한테 예쁜 폰 케이스 사달라고 해~"
분명 2주 전에 엄마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는데... 그때는 엄마가 식탁에 앉아서 식사도 하시고 케이크도 드셨는데... 2주 만에 엄마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시는 상태가 되었어요. 그림처럼 누워만 계시더라고요. 원장님이 주말에 가족 모두 모여 있으라는 전화를 괜히 하신 게 아니구나... 엄마와 인사를 하고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멍하니 밤이 늦도록 우두커니 앉아 있었어요.
그 때 엄마의 얼굴을 보러 왔던 이모들이 저와 남편을 불렀어요.
믿을 수 없었지만, 엄마는 혼자서 화장실도 갈 수 없는 상태였어요. 고개만 흔들려도 너무 어지러워하셨고, 늘 왼쪽으로 돌아누운 자세를 제일 선호하셨어요. 그 덕분에 왼쪽 다리가 많이 부었죠. 엄마가 화장실을 갈 때마다 아빠와 힘겹게 오가시는 모습을 보며 이모들이 잠깐이더라도 편하게 지내실 수 있게 해드리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바로 남편과 검색해서 이동식 변기와 빨대컵을 주문했고, 휠체어를 대여해 주는 곳도 알아보았어요.
다음날 아침, 휠체어를 찾아왔고 이동식 변기와 빨대컵이 도착했어요. 정신없이 주문하고 예약해둔 물품들을 받고, 찾으러 가느라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났어요. 휠체어와 이동식 변기는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엄마가 입원하는 날까지 너무도 유용하게 사용했답니다. 휠체어는 한 달 단위로 대여할 수 있어서, 반납 날짜를 아빠에게 알려드리며, 연장도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어요.
"연장하면 너무 좋지!"
그래, 연장하면 너무 좋겠다. 하며 아빠랑 웃으며 울었어요. 그런데 빨대컵이 말썽이었어요. 신경 써서 좋은 것으로 주문했는데요. 세상에... 엄마가 너무 힘이 없으시더라고요. 빨대를 빨아들일 힘도 없으실 정도로... 결국은 숟가락으로 물을 떠서 드렸어요. 빨대컵이 왜 이 모냥이냐며 짜증도 났지만, 엄마에게 그만큼의 힘이 없다는 것도 속상했어요.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신선한 딸기와 구십이 넘은 할머니가 쌀가루를 곱게 빻아서 만들어주신 미음으로 엄마의 식사를 챙겨드렸어요. 오롯에 아빠에게 맡겨두었던 엄마의 간병을 저와 동생이 도맡은 날들이었던 것 같아요. 엄마는 딸인 저의 손길을 제일 편해하셨고, 딸이 제일 안 아프게 잘한다며 칭찬도 해주셨어요. 엄마를 원 없이 만져보고 안아볼 수 있었던 날이었어요. 움직일 때마다 도움을 필요로 하셨고, 누워 계실 때면 주물러드려야 했으니까요.
엄마가 돌아가신 지금 돌아보니, 정말 좋은 시간이었네요. 엄마의 침대 바로 옆 의자에 앉아 엄마 손을 꼭 잡고 엄마와 실컷 이야기하던 저와 엄마의 등 뒤에 앉아 "할머니 할머니" 하며, 고사리 손으로 엄마의 등을 쓸어드리고 주물러 드리던 딸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