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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 제대로 알고 제대로 쓰자

디자인 학부생이 말하는 레퍼런스 똑똑하게 활용하는 법 - 박준상

디자인 과제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면 종종 시간이 없는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습관적으로 핀터레스트(pinterest)나 비핸스(behance)를 켜 형태나 색감이 마음에 드는 레퍼런스를 찾아보고 급하게 참고해 절박한 손놀림으로 어떻게든 결과물을 급히 만들어 내곤 하는데 그런 식으로 만든 디자인은 아무 의미 없이 형태적 특징만 베낀, 심지어 원본보다 더 조악한 형태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와 관련하여 전공 교수님께서 수업 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좋은 디자인의 형태가 아닌 그 디자이너의 사고를 모방해야 한다.” 그때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당연한 거 아닌가?” 생각하고 그냥 넘겼다. (참으로 건방진 태도가 아닐 수 없다)그때는 내가 저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레퍼런스의 형태만 모방하는 일차원적인 참고는 당연히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레퍼런스의 시각적인 요소만 급히 모방해 디자인이라고 하기도 민망하고 심지어 예쁘지도 않은, 챗gpt나 미드저니의 배설물같은 형태를 생산해 내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교수님의 말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성찰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디자인을 할 때 종종 레퍼런스에 갇혀 나의 디자인을 생각해내지 못할 때가 있다. 뭘 만들어도 참고한 자료와 비슷하게 나오고 카피캣같은 이미지를 지울 수가 없는 그런 느낌을 디자인 전공 학부생이라면 다들 한번씩은 받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참고하지 않고 디자인을 하기엔 레퍼런스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트렌드나 다양한 디자인들을 보고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레퍼런스를 아예 안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레퍼런스를 참고는 하되,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레퍼런스를 잘 활용한다는, 디자이너의 사고를 모방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당장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는 없지만 평소 레퍼런스의 좋은 참고가 어떤 느낌인지 조금이나마 와닿는다고 생각한 사례들이 있기에 그 사례들을 뜯어보며 찾아나가보려고 한다.

레퍼런스를 잘 활용한 사례로는 애플을 들 수 있다. 애플의 디자인은 세계적인 디자이너 디터 람스의 디자인에 많은 영감을 받았고, 이미 많이들 알고 있겠지만 실제로 출시된 제품 중 그의 디자인과 비슷한 형태를 띤 제품들도 있다. 하지만 조악한 형태를 띠고 있다거나 차라리 원본이 낫다!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디터 람스의 제품과 비슷해서가 아니라 애플 제품 그 자체로 아름답다.(근데 진짜 예쁘다…ㅎㅎ)


애플의 제품 중 디터 람스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들. 출처: 보그


디터 람스는 애플의 디자인이 그의 디자인이 유사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인터뷰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맞습니다만 제게는 칭찬입니다. 아이폰의 경우 서투른 베끼기와는 완전히 다르거든요. 애플은 브라운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지만 그런 회사가 애플만은 아닙니다. 애플의 경우는 근본적인 이해가 있습니다. 디자인이란 뭔가를 명백히 드러내주는 것에서 결정이 나지, 기나긴 매뉴얼을 읽어서 나오는 경우가 없습니다.브라운에서도 항상 우리의 목표는 제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자였습니다. 단, 그냥 천박하게 매끈한 기기는 안 됩니다. 필요성을 염두에 둬야 해요. 그런 기기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디자인을 심각하게 여기는 회사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에요. 애플도 그 중 하나입니다.”

애플은 레퍼런스의 형태만 베낀 카피캣이 아니라 그의 철학을 모방해 스스로 디자인을 했기 때문에 원본과 같은 단순함의 미학을 담을 수 있었고, 디터 람스도 그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애플의 디자인을 존중했던 것이다. 형태는 그 사고의 결과물일 뿐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디자인 철학과 사고라는 이야기다.

반면, 쿠팡에서 가습기나 공기청정기, 보조배터리 등 소형 가전제품을 검색해 보면 ‘심플한’ ,‘세련된’ 등의 워딩을 사용해 미니멀리즘을 표방한 수많은 디자인이 쏟아져나온다. 하지만 이런 제품들 중 상당수는 애플이나 디터 람스의 디자인처럼 간결한 형태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 그저 여백이 거슬리는 밋밋한 흰색 덩어리의 형태를 띠고 있을 뿐이다. 미니멀리즘의 정의가 ‘단색의 매끈한 표면을 가진 기본도형 형태의 물체’ 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물론 좋은 디자인도 많다!) 이는 애플이나 디터 람스의 미니멀리즘 디자인이 멋져 보여서, 혹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잘 팔린다는 이유로 미니멀리즘을 표방하며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형태의 단순함을 위해 시각적 요소들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제품을 지목해 예시를 들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런 제품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굳이 없어도 되는, 넣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조형 요소(불필요한 조명이나 곡선, 재질 등)들이 있는 것 같다. 미니멀리즘을 표방하면서 왜 이런 조형 요소를 넣었나요? 하고 물었을 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음…깔끔하고 예뻐서?” 밖에 없는 디자인이라고 하면 조금 더 직관적일 수 있겠다. 사용자 편의성을 철저하게 고려한다는 철학에 따라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한 결과물로서의 미니멀리즘과, 그렇게 디자인된 결과물이 심플하고 예쁘다는 이유로 별다른 논리 없이 외형의 스타일을 모방한 디자인은 다를 수밖에 없다. 전자에 해당하는 애플 제품은 레퍼런스인 디터 람스의 철학을, 후자의 디자인들은 단순히 레퍼런스의 형태만 모방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비슷한 예시로 노출 콘크리트 등 투박한 재질과 소품으로 색다른 분위기의 공간을 만드는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 를 마구잡이로 모방하는 ‘감성 카페’ 들이 있다. 노출 콘크리트와 오래되어 녹슨 철근 등의 재료를 이용해 구성한 공간은 그만의 독특한 투박함으로 사람들이 ‘감성’ 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스타일을 레퍼런스로 모방할 때 카페들은 왜 사람들이 노출 콘크리트를 감성있다고 느끼는지부터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단순히 그 외형적 특징만을 모방해 사용성은 뒷전으로 한 채 공간을 구성했고, 현대의 기형적인 인스타 문화 덕에 처음에는 인기를 끄는 듯 했으나 점점 인테리어가 과해지고(심한 곳들은 다 쓰러져가는 폐가에서 커피마시는 수준이다) 그 불편한 사용성이 드러나자 곧 여기저기서 조롱거리가 되었다.

한동안 인터넷에 돌아다녔던 과도한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의 인스타 감성 카페를 비판하는 짤이다.

사실 나도 위에서 말한 레퍼런스를 잘못 활용한 사례들에 대해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고 비판적인 관점과 함께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디자인하는 꼴을 보니 스스로 그렇게 싫어하던 사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단순한 일차원적 모방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밖에 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레퍼런스를 참고할 때 디자인적 사고를 거쳐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정말 머리아프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무지성 레퍼런스 베끼기는 누구나 조금만 연습하면 할 수 있지만 좋은 디자인을 하는 것은 정말 큰 노력과 연구와 감각이 필요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너라는 일이 가치있을 수 있는 것이다. 가치 있는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당장은 쉽지 않겠지만 레퍼런스를 참고할 때 겉에 드러나는 형태 자체보다는 디자인의 과정에 집중하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근데 이게 진짜 어렵다…) 교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글을 마치겠다.

“좋은 디자인의 형태가 아닌 그 디자이너의 사고를 모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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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디자인 연합(SNUSDY) 인스타그램 | @snu_sdy.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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