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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예술, 불쾌한 예술

불쾌함 속 피어난 디자인? - 정유진

비일상과 낯설음은 예술적 경험과 활동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속성[1]이다. 하지만 이러한 ‘익숙지 않음’은 항상 유쾌하게 수용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는 예술의 디자인은 그 의도와 효과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불쾌한 디자인과 불편한 디자인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 불편한 디자인은 대상(유저, user)이 체험 과정 중 ‘불편’을 느끼도록 설계하고, 이를 통해 설계자의 의도를 깨닫게끔 하는 것이 목표이다. 장기적으로 혹은 궁극적으로 도움을 주거나 더 나은 사회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경우가 많다. 소외·타락·트라우마 등의 개인 문제를 드러내거나 노숙자·빈부격차·지역차별 등의 사회 문제를 지적하기도 한다. 벤치의 경사를 조절하거나 바닥에 징을 설치하여 노숙자들이 눕지 못하게 만든다거나, 마약 중독자들이 화장실에서 정맥 주사를 놓지 못하도록 실내 조명으로 백색이 아닌 청색광을 설치하는 것 등이 이 예시에 해당한다.

영화 <기생충> 역시 이러한 불편함을 담고 있는 예술이다. 대부분의 대중 예술 및 매체에서는 ‘흥부와 놀부’처럼 주인공은 보통 가난하지만 착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와 반대로 주인공과 갈등을 빚는, 일명 빌런 역할은 부자이면서 인색한 사람이 맡는다. 이러한 클리셰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대중 예술을 볼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주인공에게 감정을 몰입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부자인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고, 나’와 비슷한 처지일수록 몰입도는 높아지므로 작가들은 평범하거나 가난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긍정적인 속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기생충>의 기택과 그 가족은 염치도 양심도 없는 사기꾼들이다. 관람객들은 기택 가족의 사기 행각이 들통날 까봐 불안하면서도, 반대 급부로 설정된 부자 등장인물-박사장과 그 가족-은 딱히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어서 찝찝하고 꺼림칙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예술의 불편함에 대한 이야기는 칸트의 철학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칸트는 예술의 가치를 숭고(sublime, 崇高)에서 찾았으며 이때 숭고는 압도적인 힘에서 나오기도 하면서 때로는 반성으로부터 비롯된 쾌와 연관이 있다. 사람은 예술적인 대상을 통해 숭고미를 느끼고 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반성적 판단력을 갖게 된다. 이를 통해 예술의 숭고함은 도덕적 역할까지 수행하며, 좀 더 고차원적인 쾌를 형성할 수 있다.

불편한 디자인은 의도적으로 불편함을 설계한다. 또한, 불편함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디자인이 전체적으로는 더 이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적대적이고 공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든, 각자가 속한 곳에서 만들어지는 결정에 대한 의식이 있는 것은 중요하다.[2] 이를 통해 사회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논의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불쾌한 예술

예술작품은 독창성을 기반으로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놀라움’을 선사하여야 한다.[3] 다만, 앞서 말했듯 놀라움이 항상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는 않는다. 대상이 몰형식적이거나 압도하는 힘을 보일 때, 이것은 감성을 넘어서는 불쾌함을 일으킨다.[4]

이전까지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기존 체제를 적극적으로 거스르는 디자인이 등장할 때, 그리고 이것이 불쾌를 넘어 충격적일 때 그 파장은 관련 집단 뿐 아니라 경계 밖의 사람들까지 이어진다. 이는 전문성이나 현실적인 문제 등에 기반한 집단·필드를 초월하여 새로운 예술 담론을 형성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현대 예술을 생각해보았을 때,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 (1917)이나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 Brillo Box> (1964) 가 있다. 특히 <브릴로 박스 Brillo Box>의 경우 마켓에서 실제로 팔고 있는 가루 세탁 세제인 브릴로의 포장지 박스를 실제 규격의 크기 그대로 제작하여 뉴욕의 스태이블 갤러리 여기저기에 배치하였다. 작품의 의도는 매스 미디어와 대량 생산 시스템에 의해 상실되어 가는 현대인의 자아와 성찰 없이 그저 반복되기만 하는 소비·생산 문화에 대한 비판이라고는 하지만, 처음 작품을 본 사람들에게는 작품의 의도보다도 기성제품을 그대로 예술작품으로 사용한 것에 대한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작품은 사회 전체에서 예술 자체에 대한 성찰을 불러 일으켰고, 이를 기반으로 한 여러 담론을 통해 예술의 외연 확장 및 새로운 예술에 대한 정의가 이루어졌다. 아서 단토 등에 의해 무엇이 예술인가는 눈에 보이는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작품의 본질은 의미 혹은 의미의 해석에 있을 수도,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담은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현대 예술 뿐 아니라 건축 디자인 역시 이러한 사례를 가지고 있다. 동대문디지털플라자 DDP 역시 주변의 컨텍스트와 이어지지 않는 완전히 낯선 디자인으로 설계되었다. 공모가 진행될 때까지만 해도 사이트가 동대문인데다가, 조선 유적지와 익선동이 근방에 위치한 만큼 공모에서 제출된 설계안은 모두 ‘한국적’인 디자인을 모티브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다르게 채택된 것은 자하 하디드의 비정형적인, UFO처럼 생긴 설계였다. 처음에는 국내 유명 건축가와 건축 평론가들에 의해 많은 비판이 쇄도했지만, 이를 통해 건축 디자인에 크게 관심 가지지 않았던 일반인(비전공자)과 관련 종사자, 정치를 아우르는 ‘장’이 형성되었으며 동대문은 이를 통해 기존과 다른 새로운 도시 맥락을 창조할 수 있었다.

예술적 체험에서 오는 감정을 쾌와 불쾌로 표현하면 +는 쾌, -는 불쾌에 해당할 것이다. +를 일으키는 여러 예술 디지인 요소에 익숙함이 포함될 수 있다. UI, UX, 제품 디자인, 건축 공간 역시 이러한 익숙함의 중요성이 반영되는 분야이다. 다만 예술 자체의 정체성·화제성·지속성의 발전을 위해서는 마트에서 브릴로 박스를 집어들어 그대로 전시장에 둔 앤디 워홀이나 동대문의 역사적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하 하디드의 디자인처럼 +10보다는 -100이 필요한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100의 디자인을 통해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그 의미와 해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전과 다른, 낯선 예술이 기억된다. 이야기된다는 것, 기억된다는 것은 해당 분야의 생명과 직결된다. 때로는 현실적인 여건/제약/필요를 초월한 디자인을 생각해야 한다. 디자인에 몸 담고 있다면, 전문가로서 수단으로서의 디자인이 아닌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1] 오양가 강벌드, 유희범, 성정환. (2017). 프레임 분석을 통한 불쾌한 게임 디자인(Abusive Game Design)과 반성적 게임플레이. 한국게임학회 논문지, 17(5), 51-59.

[2] 의도적으로-불쾌한-디자인과-적대적-도시-건축, <텀블러>, 2016.09.08., https://www.tumblr.com/readingalaska/150101771074/ , 2023.11.13.

[3]위의 논문

[4] 성정환, 모욕적 혹은 불쾌한 게임디자인, <송대사보>, 2019.05.20., http://www.ssu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7163 , 2023.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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