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시딘도 못 바르는 임산부의 처지란

by 디어살랑

나는 친구들에게 소위 '명예 약사'로 불릴 정도로 약을 잘 찾아먹는 사람이었다. 두통이 나더라도 때에 따라선 이부프로펜을, 어떨 땐 아세트아미노펜을 먹어야 하는지도 구별해서 먹는 사람. 남편이 속이 불편하다고 중얼거리면 서랍 한 줄에 빼곡한 내 약통을 열어 이건 속이 쓰릴 때, 이건 속이 울렁거릴 때, 각 각 나눠서 약을 손에 쥐어주며 뿌듯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이런 내가 임신과 함께 '명예 약사' 직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택배 상자를 뜯다가 칼에 손이 살짝 베었다. 비눗물에 손을 씻어내고 습관처럼 약통을 열어 후시딘을 꺼냈다. 부욱 짜서 바르려던 그때, 임산부가 후시딘을 발라도 되나?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예전에 듣기로 먹는 약보다 바르는 약이 몸에 흡수가 더 잘돼서 태아한테 위험하다고 들은 적이 있다. 한 손은 휴지를 칭칭 감고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임산부 상처 후시딘'

'임산부 후시딘 발라도 되나요'


검색 결과는 정확히 반반. 임산부라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피부 관련 연고처방은 절대 안 내려준다는 몇몇 의사의 약사의 의견들. 또는, 어차피 외용성 연고는 피부 깊숙이 흡수되는 게 아니고 표피에만 작용하는 거라, 상처가 덧나는 것보다 항생제 연고를 살짝 발라서 가라앉히는 게 낫다는 여러 의견들. 하지만 대부분의 의견이 말하는 건 참을 수 있으면 참아라, 였다. 결국 이 해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로 머리를 쓰다 약통을 열고 후시딘을 다시 집어넣고 덧나지 않게 밴드만 붙여놓았다.


꽃이 피고 나무가 푸른 잎으로 무성해질수록 평소에 가지고 있던 알레르기도 심해졌다. 밖에 나가서 정신없이 재채기를 하다가 결국 내과를 방문했다. 늘 처방받던 알레르기약을 처방받으려는데 임산부라고 하니 의사가 머뭇거린다.


'임산부에게 비교적 안전한 B등급이라고 나와서 처방은 해줄 수 있는데, 그래도 다니시는 산부인과 가서 진료 보는 게 어때요?'


결국 그렇게 내과에서는 약 처방을 포기하고 다니던 산부인과에 방문했다.


'처방해 드릴게요. 근데 웬만하면 좀 참아보는 게 어때요..? 아주 증상이 심할 때만 한알 드시고요.'


아주 증상이 심할 때가 대체 언제이며, 웬만하면은 어느 정도가 웬만하면 일까. 약을 받아 들고 집에 와서 약봉지를 만지작만지작 거린다. 그러다 결국 휴지를 뽑고 코를 크응-하고 푼다. 그래, 내가 코 몇 번 더 풀면 되지.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발생할까. 임산부는 두통이 나도, 토를 해도, 설사를 해도 내 몸이 아니라 내 몸속 아기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임산부는 날 것 먹지 마라,라고 하는지 이제야 조금 와닿는다. 사실 신선한 날 음식을 먹는 거 자체는 문제가 안되지만, 혹여나 탈이 났을 때 적절한 약을 쓸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애초에 탈이 나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식중독 같은 극한 증상이 생겼는데 약도 못쓰고 쌩으로 버틴다? 정신이 아찔해지며 절로 날 것에 손이 거부하기 시작했다.


아기를 위해 똥기저귀를 치우고 잠 못 자면서 밤새 우는 아이를 달래고, 이런 것만이 엄마의 희생이 아니다.

임신기간 내 몸 아파도 아이를 위해 참는 것. 임신 9주 차, 벌써부터 엄마의 희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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