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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Sep 07. 2024

1화. 탄생과 유아기 발달 과정

복도 저쪽 끝에서 성큼성큼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가 싶은데 벌써 

“다녀왔습니다.”라고 온 동네가 시끄럽도록 인사하면서 아이는 들어온다. 목에 힘을 주고서 식탁에 앉자마자 가방을 던지며 

“오늘 존나 힘들었어. 오늘 도장 몇 개 찍은 줄 알아?”라고 으스대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서, 할머니께 전화를 하며 시시콜콜 일일보고를 한다. 할머니는 연신 “아고! 그랬구나. 대단하구나. 대단하구나!” 하며 맞장구를 치는 게 전화기 너머 소리로 다 들린다. 

아이는 4년째 일자리 사업으로 우체국에서 주민복지센터에 출근하고 있다. 자기 힘으로 일을 하고 월급을 통장으로 받고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서 매일 출퇴근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아이에게는 자존감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정말로 감사하다.     


<탄생과 진단 과정>

막이 열리면 무대 위에 하얀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한 아이가 중앙으로 걸어오고 있다.      

그 아이는 34세 아가씨로 반짝이는 검은 긴 머리와 쌍꺼풀진 커다란 눈, 빨간 입술을 지닌 예쁜 공주 같다. 그런데 그 소녀는 어느 사이 4.1Kg의 갓난 아기에서,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4살 아기로, 어린이집 예술제에서 꼭두각시 춤추는 7살 어린이로, 운동회 때 달리기하는 11살 초등학생으로, 수학여행 떠난다고 가슴 설레는 15살 중학생으로, 통합 교육하며 꽃바구니 만들며 수줍어하는 18살 여고생으로, 유아교육과를 다니는 풋풋한 22살 대학생으로, 장애인 체육대회에 출전하는 29살 탁구선수로, 34살 주민복지센터에 다니는 직장인으로 파노라마처럼 필름이 자꾸만 한순간에 바뀌어져 간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겪어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참 가슴 떨리고 성스런 일이다. 

내가 장애인이라든지 특수교육 방면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어릴 때 집안의 종교적인 환경도 있지만 큰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기억의 실타래를 생각나는 대로 풀어보면, 대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 85년 3월 대단위 J 중학교에 영어교사로 발령을 받아서 정신없이 3년을 보냈다. 서울대 출신 교장이 부임하면서 정규 수업 외에 아침 방송수업과 보충수업, 야간 자율학습까지 맡게 되었다. 

88년 1월 결혼을 하고 두 번이나 연달아 계류유산이 되었다. 남편과 나는 대가족에서 자라서 가족의 행복을 잘 알기에 아기를 간절히 원했고, 백일기도 해서 만 3년만에 낳은 아이가 우리 큰 아이다. 혹시 아기에게 안 좋을까 카페인 음료 한 번 안 먹고 조심하였지만 출산 시 뇌 장애가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출생 시 몸무게 4.1kg의 우량아였으며 두위가 너무 커 출산 시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으며 첫돌 이전에 폐렴으로 세 번 종합병원에 입원하였을 정도로 잘 안 먹고, 잠을 깊게 안 자고 열이 자주 났다. 낮 시간에 아이를 키워주시는 시부모님께서는 원래 늦되는 아이가 있다며 괜찮다고 했으나, 육아 경험이 많으신 친정아버님의 권유로 12개월 무렵 세브란스에서 MRI 촬영 검사 결과 뇌장애가 발견되었다. 

신경외과에서 션트 수술을 받으며 지금까지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재활의학과 등을 거치며 큰 수술을 네 번 받았다. 퇴원 후 갑자기 지혈이 안 되어 침대 가득 피를 토해서 한밤중에 119 구급차에 실려 간 적도 있고, 크고 작은 고비들을 넘긴 것을 모두 글로 표현할 수 없다. 특히 그때 세브란스 병원에서 한 달 동안 엄마들끼리 정이 들며 같은 뇌장애로 수술받고 한 병실을 썼던 세 아이들은 오래도록 기억난다. 

모두 같은 나이였는데 그중에 한 아이는 하늘나라로 갔고 또 한 아이는 자라서 휠체어를 타며 삼육재활학교에 다녔는데 지금은 성인이 되었을 텐데... 우리 아이는 정말로 운이 좋게 감사하게 신체적으로 잘 자라 주었다.      

처음에 아이의 장애를 알고 찾아 본 옛날 의학 자료에는 ‘9살을 넘기기 힘들 만큼 단명한다.’라는 문장에 충격을 받고 눈물로 밤을 지샌 적도 많았다. 원인을 알아내려고 닥터 쇼핑과 전국의 유명한 교수님을 찾아 상담하러 다녔다. 그러나 대부분 결국 원인불명이란 답과 함께 장애아를 지닌 부모라면 누구나 겪는 담담히 수용하는 과정을 마지막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신은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큼 주신다.’고 하시니까, 부모라면 누구나 자녀를 위해 책임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글렌도만 부모교육 프로그램>

세브란스 병원에서 중증의 발달 장애라는 진단을 받고서, 오로지 아이의 발달을 위해 노력을 하게 되었다. 

아이의 신체 발달과 인지 능력 향상을 위해 여러 자료를 찾던 중 우연히 글렌도만 박사의 ‘부모야말로 가장 훌륭한 의사다’라는 책을 읽고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 분이 쓴 일련의 책들을 독파하고 그대로 실행해 보기로 결심했다. 원래 미국 필라델피아의 글렌도만 연구소는 뇌장애아를 위한 연구소인데, 그 뛰어난 성과 때문에 지금은 영재교육 기관과 함께 연구소가 운영되고 있다. 뇌장애아에게도 읽기를 가르쳐 효과를 보았는데, 일반 아이들은 얼마나 더 효과가 있을까 하여 연구 실험해 보니 더 놀라운 발전을 보였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글렌도만 영재 교육법’이라 해서 KBS에서 한 동안 소개한 적이 있었고 지금도 인터넷에서 영재교육자료로 돌고 있다.     


아이가 몸이 약해 비록 결석이 잦았지만 네 살부터 일반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고, 복지관에 등록하여 언어 치료 조기 교육을 받았다. 출근 시간 동안 시어머님께서 아이가 거의 초등학교 2학년 봄까지는 등교를 같이 하다시피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셨고, 퇴근해서는 내가 아이를 돌보았다. 

글렌도만 부모 교육 프로그램 자체가 전적으로 부모가 거의 훈련에 매달리다시피 집중해서 하고 훈련의 빈도, 강도, 자극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효과가 좋은데, 아쉽게도 퇴근 후와 방학 때만 집중해서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지금은 읽기 교재 자료가 많이 나와 있지만, 그 당시에는 별로 없어서 마분지에 빨간 매직으로 단어 카드를 수 백 장을 만들어서 진행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우리 집 환경에 맞게 나름대로 적용한 프로그램을 간단히 표로 만들어 진행하였다.  (석사학위 논문에 자료와 내가 만든 표가 제시되어 있음)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아이는 모든 면에서 느리지만 매일 조금씩 발전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시어머님의 인내와 격려가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청결에도 유난히 신경을 쓰셔서 천 기저귀 끝 부분이 말리면 아이가 아플까봐 다림질 하셨고, 목욕 후 바르는 분첩을 가슴에 한 개, 엉덩이에 한 개 따로 둘 만큼 깔끔하셨다. 어머님께서는 지금도 항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애미야! 우리 아이는 이 세상에 못 하는 것이 없다. 너가 그렇게 못 걷는다고 해도 걸었고, 말 못 한다고 하더니 이제 말도 얼마나 유창하게 하니?           

요리나 청소도 깨끗하게 하고 저렇게 공부 하려고 하니 남보다 좀 늦을 뿐이지 언젠가 다 하게 된다. 걱정 마라!” 아이가 한밤중에 김밥 먹고 싶다고 하면 당장 만드실 만큼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아 주시고 아직도 34살 손녀를 매일 통화하며 얼굴 보며 다정하게 대해 주신다. 

“애미야! 아직 멀었데이. 옛말에 손자 셋을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했데이.”라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무언으로 행동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믿고 기다려주고 사랑해 주는 일이다.’라고 가르쳐 주셨다. 


돌이켜 보면 물론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과 주위 친척과 친구들 인연 복이 많은 아이, 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 우리 부부도 함께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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