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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찐프로 Nov 19. 2024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단 한번의 산책 2화

맨발로 산을 오르고 달리며 씁니다

거실 소파에 달라붙어 지내던 내가 새벽에 일어나 운동을 하겠다고 밖으로 나간다는 건 나에겐 굉장한 용기였다. 현관을 열고 나가자 시원한 공기가 가슴으로 훅 들어왔다.

집 밖으로 나왔을 뿐인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에는 물안개가 두껍게 깔려 있었고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건널목 신호등이 느리게 깜박이고 있었다.

풍경은 고요한데 풀벌레 소리는 요란하게 강변을 가득 채웠다. 나는 차갑고 습한 공기를 마시며 강을 따라 걸었다. 얼마 안 있어 짙은 안개가 살짝 걷히는 듯했다.

하지만 다시 물안개가 밀려들어 사방이 뿌옇게 변했다. 시야가 좁아지고 답답했다. 안개가 마치 내 앞을 가로막는 벽처럼 느껴져서 잠시 멈춰 섰다.


그때였다. 시야 끝에 갑자기 작은 꼬마가 보였다.

분주히 발을 구르며 무언가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다.

꼬마는 당찬 표정에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 꼬마는 앞뒤를 번갈아 보다가 순간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잠시 뒤 한 손을 뒤로 뻗었고, ‘탁.’하고 손바닥 위로 파란 바통을 받아 들고 바람처럼 내달렸다.

결승점을 통과한 꼬마는 친구들과 끌어안았다.

환호성이 들리는 듯했다.

그 꼬마는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시간 참 빠르다.’ 달리기 좋아하던 그 아이,

400미터 계주의 마지막 주자였던

초등학교 4학년 그 아이는 어느새 자라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나는 마치 아빠가 아들에게 말하는 듯

다정하게 인사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구나.”

그러자 아이는 한발 다가와 ‘똘망똘망한’ 눈으로 말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한참을 기다렸잖아.”


순간 무엇인지 모를 내 안의 것들이 뒤섞였다가 두 눈으로 솟구쳤다. 뜨거운 것이 한없이 두 볼을 타고 내렸다.


초등학교 때 나는 친구들과 학교 뒷동산에서 말뚝박기와 술래잡기하며 땀 범벅이 될 때까지 뛰어놀기를 좋아했다.

해 넘어갈 즈음 엄마가 ‘이놈아 저녁 먹어야지.’하며 쫓아와 소리치면 그제야 친구들과 아쉬움에 헤어지던 내 모습이 어제처럼 선명하게 보였고 가슴이 아렸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운동을 좋아했고 대학교 때는 자전거로 전국 국토 순례를 할 만큼 활동적이었다.

하지만 대학 졸업 즈음 집안 형편이 극히 어려워졌고

갑자기 내가 가족 모두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삶의 여유가 사라졌고 점점 더 활동 반경이 줄었다.

매일 지쳐서 움직이려는 마음도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생계를 위해서이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니 속상해 말라고 나를 다독였다.


다 잊고 힘내자며 나를 위로해주려고 술을 벗 삼았다. 술이라는 친구와는 아주 편하고 쉽게 친해져서 일주일에 서너 번은 만났다. 주말에는 한 주 고생한 나를 위한다며 야식과 반주로 파티를 열었다.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면 세상 부러운 것이 없었다.

건강을 위해 운동해야 하는 것은 잘 알지만,

머릿속 나는 늘 핑계를 댔다.

‘종일 힘들게 일했는데 뭘 움직여 그냥 누워서 쉬자.’

거실 소파에 누우면 세상 편했다. 아이들이 다가와서 함께 놀자고 해도 다음으로 미뤘다.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누워있으면 만사가 귀찮았다.

배 둘레가 커질수록 술 마시는 양도, 횟수도 늘었다.

폭음이 잦았다. 역류성 식도염도 생겼다.

과식으로 자다가 토한 적도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여지없이 속이 거북했고 잠이 부족해서 머리도 무거웠다. 늘 후회했다가도 저녁 무렵이면 두 손에 먹을 것을 잔뜩 사 들고 들어와 TV 보며 히죽대고

취하고를 반복했다.


장남으로서 두 아이의 아빠로서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그 일상의 실체는 게으름과 나태함이었기에 창피했다.

하루하루 힘겨운 날들을 버텨가며

내 꿈마저 접고 살았는데 난 왜 이 모양인가 후회스러웠다.


눈물이 쉽게 멈추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린 나를 만난 그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속 시원히 울고 나자 강바람이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쩌면 오늘 이후 나는 조금씩 나의 본 모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어깨가 가벼워진 듯했다.

‘이런 상쾌함을 느껴본 것이 도대체 언제였지?’


묵직하게 짓누르던 어깨의 짐을 잠시 내려놓은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다가 용기를 내서 뛰어보았다. 마음은 가벼운데, 허리둘레 36인치를 넘어선 묵직한 몸뚱이로 갑자기 달리기에는 버거웠다.

균형을 잃은 두 발은 서로 엉키며 중심을 잡지 못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결국 금방 멈출 수밖에 없었다.

뱃가죽이 빨개지고 간질거렸다.

뛰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거친 숨이 잦아들며,

이마 위로 흐르는 땀만큼은 싫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날의 땀방울과 벅찬 숨결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그렇게 변화는 시작됐다. 이른 아침 강변을 향해 나서는 날이 늘어갔다.

나태했던 나의 과거를 양파껍질 벗기듯

(눈물은 나겠지만) 하나하나 벗겨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생겼다. 제대로 달리고 싶어졌다.

가끔 초등학교 4학년 계주 마지막 주자였던 어린 나의 모습이 생각나면 강변을 달린다. 이제는 눈물 대신 환한 미소로 인사를 보낸다.


‘내 안에 잠든 어린 나를 깨워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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