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역에 미친놈은 나야
계절이 바뀌는 것을 아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지금이 딱 이 시기이다. 계절이 겹쳐지는 짧은 시간 속. 올해도 여는 해처럼 매일 같이 저녁시간 기상캐스터의 가느다랗고 농익어 간드러진 목소리에서 전하는 단풍 시기를 알아채는 것처럼
원서방. 모두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 남편을 그렇게 부른다. 한 때는 어깨에 태극마크를 붙이고 싶어 했으며 타고 난 운동신경으로 세계를 주름잡고 최경주 선수만큼 국위선양의 선봉에 서서 이름 석 자 휘날리고 돈도 많이 벌고 싶어 했다. 원서방은 가늘고 번쩍거리는 작대기로 하얀 곰보공을 쳐 올려 한 번에 작은 구멍에 넣으면 홀인원 된다는 돈깨나 있어야 즐길 스포츠를 프로선수로 마감했던 멋진 남자였고 프로시절 더 큰 꿈을 가지고서 ‘조금만 기다려 네가 갖고 싶은 흰색 그랜저에 기사 붙여 줄게’하던 내겐 둘도 없는 키 크고 날씬한 게다가 잘 생긴 남자이다. 공부머리는 아니었지만 남들이 운동에 재능이 있다고 하니 그 재능이 언젠가 빛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연습하던 순수한 그 모습이 멋있어 내 사랑을 맡기기로 했다. ‘자기야 라면 먹고 갈래?’ 그렇게 나의 사랑은 라면 한 그릇에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하자는 부부가 되었다.
순수하기만 하면 이 험준한 세상에서 어찌 웃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남들에게는 없는 돌끼가 있어야 무시당하지 않고, 수시로 웃프거나 웃참인 사건사고를 만들어야 심심하지 않지.
그날은 금요일 저녁이었지만 몸이 찌뿌둥하던 차에 약속도 없어 조금 일찍 들어온 나는 소주 한 병과 단백질(멸치), 탄수화물(새우깡)을 앞에 두고 요즘 핫한 NETFLIX 끝사랑을 막 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잔이 보랏빛 입술을 지나 정확히 3분의 2 지점에서 입 안으로 떨어졌고, 조금 전 인도양을 지나서인지 인도 특유의 향을 지닌 카레 맛 멸치 서너 마리를 막 씹으려는데 원서방이 들어왔다. 놀리 듯 저녁 약속이 있다며 늦겠다던 그가 약속시간 직전에 다음에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으니... 퇴짜 맞은 죽상으로 맥없이 들어섰으나, 혼술 하는 나를 보더니 이내 환한 낯빛이 되었고 꽤나 큰 목소리를 질렀다. "자기야 뭐 해?" 나를 반기는 것인지 아니면 19도 녹색물결 속에서 헤엄치는 멸치를 보고 말하는 건지 순간 헷갈렸다.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나 또한 외로웠던 차에 술친구가 왔으니 기쁘지 아니할 것인가.
주거니 받거니 부어라 마셔라. 어느새 멸치는 대가리까지 다 먹었고, 비릿한 맛을 주던 새우깡은 흔적도 없어졌다. 그래도 우리에겐 전투식량인 라면이 있지 않겠나? 오늘은 얼큰한 국물안주가 필요하니 얼마 전 새로 생긴 마트에서 할인행사 때 사 둔 맵탕을 끓였다. 역시 이름 값하는 맛이다. 초딩들이 하는 표현 그대도 ‘헐~ 개맵다.’ 한 손에 소주잔을 들고 끝사랑 메기남 상남자의 굵은 팔뚝을 보며 히죽거리는데, "자기야 뭔 냄새나지 않아? 고무 타는 내가 나는 거 같은데?" 원서방이 작지 않은 코를 실룩거리며 킁킁대고 있다. 연애시절 원서방의 큰 코는 내 친구들의 부러움이었고 나의 기쁨이었다. 그 멋진 코가 무언가 타는 냄새를 맡았다고 하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게 이 사단의 시작이 될 줄이야. 나는 얼마 전 며칠간 감기기운이 느껴져 편의점에서 판콜에이를 사 먹었으나 잘 낫지 않아 병원에 가니 의사선생이 "코로나가 지나간 것 같아요 허허허" 했던 터인지라 아직까지 냄새를 제대로 맡을 수가 없었다.
처음 먹어보는 라면이라 냄새가 비슷한가?
"신경 쓰지 마." "아니야, 뭔가 타는 것 같아 우리 집이 아니고 어딘가에서 냄새가 올라오는데? 이거 다른 집에서 불난 것 아닐까?"
원서방의 작은 눈이 짐짓 커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창 메기남의 굵은 팔뚝과 보조개에 온통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때 원서방의 걱정 소리는 한 여름 중국매미의 그것처럼 저 멀리 사라져 가는 사이렌 같은 것이었고 귀찮은 울림이었다.
"자기야 불나면 112야 119야? 일부러 불내는 방화 같은 거면 112가 맞지? 그치?"
"맞지" 나의 영혼 없는 대답이 원서방의 신고정신에 확신을 넣어줬던 것이다.
화면 속 상남자가 여러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해하고 있을 때쯤, 현관문 밖에서 서너 명의 급한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 화면 속에는 경찰모자를 쓴 남자가 인터폰화면 속에서 튀어나올 듯 심각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까이 대며 "경찰입니다. 문 열어 보세요."한다. 경찰모자를 쓴 남자는 경찰이었다. 혼자가 아닌 세 명과 함께.
원서방과 나는 평소에 ‘차카게 살자’며 착하게 살아왔는데 이게 뭔 일인가 싶어 떨리는 손으로 문을 빼꼼히 열었고 그 틈을 노린 듯 그들은 있는 힘껏 문을 잡아당기고 서로의 어깨를 밀치며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원서방과 나는 언젠가 봤던 럭비의 스크럼에서 밀리 듯 뒷걸음으로 물밀듯 밀려났고, 벽에 붙어선 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원서방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시죠? 무슨 일이시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 중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아니 계급이 높아 보이는 경찰이 급하게 말을 자르며 물었다.
"신고하셨죠? 어디입니까? 불 난 곳이" 원서방은 머뭇거렸으나 말을 또박또박하려 노력했다.
"네? 불 난 게 아니고요.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고 신고했어요." "그러니까 거기가 어딥니까?"
원서방과 같이 산 세월이 벌써 십여 년, 순간 뇌리를 스쳐가는 잠시 전 상황이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이 빠른 속도로 리와인드되었고,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그 찰나 현관문 밖에서 또 다른 여러 명의 거친 호흡과 발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그들은 가끔 영화 속에서 보던 방화복과 산소마스크를 하고, 그중 한 명은 양손에 유압자키를 들고서 무엇이든 맘에 들지 않으면 모두 벌려버리겠다며 이를 으르렁댔다. 또 누군가는 굵고 긴 소방호스를 잡고서 지금 당장 한 방에 불길을 잡을 듯 호스 머리를 겨냥하고서 주위를 빠르게 두리번거렸다.
내 남편 원서방은 이랬던 것이다. 내가 상남자의 팔뚝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며 112냐 아니면 119냐라고 물었는데 내가 112라고 하니 충실히 112에 전화를 걸어 '고무 타는 냄새가 나는데 혹시 방화이면 여기 112에 전화하는 게 맞죠?' 라고 한 것이 전부라고 한다. 신고 전화를 받은 112 종합상황실은 뭔가 긴박한 방화사건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며 집 근처 파출소에 출동명령을 내렸고, 동시에 소방서에 협조요청을 하였으며 경찰의 연락을 받은 소방서는 긴급화재사건으로 보아 두어 대의 소방차와 앰뷸런스까지 출동하게 된 것이다.
이래저래 사건 진위를 알아들은 경찰관과 소방관의 눈은 늑대눈으로 찢어졌고, 입가 주름은 풍랑을 맞은 조각배처럼 실룩대었으나 신음소리만 새어 나올 뿐 험한 말은 하지 못했다.
최초 신고자인 원서방은 죄송하다며 꾸벅꾸벅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며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고, 소방관은 바쁜데 이런 전화를 하면 어떻게 하냐며 애꿎은 소방호스를 발로 걷어차며 험상궂은 얼굴을 했고, 경찰관은 허리춤에 찬 수갑과 권총에 손을 올린 채 만지작거리며 원서방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내 그들은 뒤돌아 보지도 않고서 바쁜 걸음으로 되돌아갔고 나가는 손님을 배웅해야 함에도 그런 예의는 이미 달나라에 보낸 지 오래라 급히 현관문을 닫고 걸쇠까지 채웠다.
잠시나마 급박하고 숨 가빴던 탓에 뜨거워진 얼굴과 식은땀이 흘러내린 등줄기를 식히려 우린 현관 옆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맞은편 전신거울에 비친 두 남녀를 풀린 눈으로 힘겹게 응시했다. 거울 속 남녀는 서로가 숨 쉬는 것을 보고서야 살아있음을 확인했고 한쪽 입 꼬리가 소리 없이 올라가는 것을 느꼈으며 서로를 의지하려는 듯 한쪽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폭풍이 지난 간 듯 나와 원서방은 조금 전처럼 TV앞에 쭈그리고 앉았지만 좀체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어 아무 말 없이 소주를 두어 병 더 마시고 그대로 쓰러졌다.
지난밤 토네이도급 폭풍을 맞아서인지 한 낮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난 후 전화기를 열어보니 엊저녁 일로 아파트 맘 카페 톡방에는 무려 300개가 넘는 글이 올라있었고, 글의 대부분은 도대체 이게 뭔 일이냐? 누가 불을 질렀다더라. 아니 그게 아니고 술 취한 사람이 장난 전화 했다더라 등등 나는 아무런 댓글을 쓸 수가 없었다. 해명이랍시고 자칫 토시하나 잘 못 쓴 글이 된다면 이 아파트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서방은 내가 뭐 잘 못했냐며 꽤나 억울해하는 얼굴인데 나도 원서방이 이렇게나 크게 잘 못 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부부일심동체, 측은지심 뭐 그런 거? 근데 일이 왜 이렇게 됐지?
거실 한편 구석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사가 들려온다. 신혼 때 장만한 그 라디오에서...
♪♬~ 이 구역에 미친놈은 나야 - 딥플로우
사진 빌려 온 곳: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