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2024 파리 올림픽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 작년 말 29년간의 월급쟁이 생활을 마감했기에 7시간 시차에 벌어지는 새벽 경기도 출근부담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데 이것이야 말로 백수생활 최고의 복리후생이 아닌가 생각된다. 초반에 생각보다 금메달 행진들이 이어져서 볼 맛이 난다. 특히 여자양궁 단체의 금메달 10연패가 인상 깊었다. 88 서울올림픽 때부터 시작된 금메달 행진이 36년간 이어져 10연속에 이른 것이다. 한 번 따기도 힘든 메달을 10회 그것도 연속으로, 정말 경이적인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대기록의 감동에도 이상하게 내가 눈길이 가는 것은 88 서울 올림픽 때 부터라는 그 ‘시점’이었다.
난 1988년도에 대학교를 입학 한 88학번이다. 88학번은 대부분 1969년생인데 나는 한 해 빨리 국민학교에 입학한 1970년생이다. 1988년 대학입시가 좀 특이했던 점은 역대 처음으로 대학교와 학과까지 선지원 하고 학력고사를 본 세대란 것이다. 점수를 미리 받고 점수에 맞춰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의고사를 통해 어느정도 점수범위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지원하는 형태였다. 모두들 재수를 하기 싫어하지만 난 그야말로 재수를 하면 안되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
당시 고3때 내가 가는 독서실에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학생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물론 그녀는 1970년생인 나랑 같은 동갑이었고 그럼에도 한 학년 빠른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런 내가 만약 재수를 해서 그녀랑 같은 89학번이 된다면, 안 그래도 그녀랑 나이가 같은 것이 콤플렉스였는데 학번까지 같다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 못할 짓이란 것이 당시 18세 순진한 소년의 생각이었다. 김승진을 오빠라고 부르던 스잔이 승진 오빠가 재수해서 같은 학번이 되었다고 바로 ‘승진아’라고 말을 까버리는 참사는 내게 절대 일어나면 안되는 일이었다. 따라서 나는 최대한 합격이 가능한 안전한 범위내에서 학교와 학과를 선지원 하게 되었고 다행히 88학번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를 88학번으로 만든 것은 당시 독서실에서 만난 그 여학생이었다. (나중에 그녀가 대학교에 입학한 후인 1989년, 그녀와 얼마간 사귀었다. 당시 난 순진한 고등학생 티를 이미 1년 이상 벗어났기에 오히려 1학년이어서 순수했던 그녀가 막상 사귀고 보니 시큰둥 해졌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후회되는 멍청한 결정이었다.)
88학번들에겐 별명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1981년 서울 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이래 88꿈나무라고 불리웠던 청소년기를 보낸 세대다. 물론 88 꿈나무가 88년 올림픽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길 기대하는 체육 청소년들을 주로 일컫는 용어였지만 88이라는 시점이 주는 선명함 때문에 88년도에 대학교를 입학한 88학번들을 선배들이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학번까지 88인 진정한 체육인 88꿈나무로는 라면 먹고 금메달 땄다는 유명세를 얻었던 임춘애와 영화 넘버3에서 송강호가 라면 먹고 금메달 땄다고 오해했고 그걸 지적질 한 불사파 쫄따구들을 개박살 나게 만들었던 현정화가 있다. 가끔씩 티비나 미디어에 나오는 그녀들을 보면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과 물리적으로 같은 시간을 보낸 나도 물론 그렇다. 대학교 신입생에서 군인이 되었다가 신입사원이 되었고, 그 후 결혼하고 아빠도 되고 어느덧 직장에서 은퇴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1998년도 IMF 시절, 당시 나는 엔지니어링 회사를 다니는 월급쟁이였는데 그해 여름 딸이 태어났다. IMF라는 국가적으로도 절망적인 상황에 아빠라는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보는 신분상태를 실감하다 보니 그 중압감도 슬슬 느끼기 시작했던 때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턱도 없는 생각이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벌써 이만큼 늙어 버렸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종종 맬랑꼴리 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엔 서른이 된다는 것은 사회통념상 젊음을 잃어버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시기기도 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와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같은 90년대 중반에 인기를 끈 노래와 시들이 서른의 무게를 알려주는 대표작들이기도 하다. 입사,결혼,출산의 시기가 90년대와는 10년 이상 늦어진 지금의 잣대로 보면 2024년 현재 마흔을 앞둔 정도의 심경과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10년 전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인 1988년의 기억이, 그 추억이 너무 그리워졌다. 회사원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기아빠가 되었다는 현실과 비교하면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있었던 1988년, 그리고 고3까지의 힘든 입시를 마친 직후의 엄청난 자유가 있었던 그 대학교 신입생 시절이 너무 그리워졌다. 그래서 1998년 어느 주말 밤 피씨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그 해 가을 즈음부터 내가 활동하던 유니텔 식도락 게시판에 ‘1988년 그 때를 아십니까’라는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988년도에 국한된 내용들을 주로 다루었지만 88학번들의 중고등학교 시절의 내용도 포함시켰다. 88학번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들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빼놓고 얘기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이 연재는 두 달 정도 이어졌고 게시판 내에서 제법 인기를 끌었다. 식도락 동호회가 원래 먹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보니 정치얘기가 배제된, 오직 그 당시 대학생들의 ‘생활문화’만 회상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라 그것이 인기의 원인이었던 듯 하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지만 정치과잉의 사회에서 정치색이 없는 스토리텔링도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측면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87 민주화 운동이 지나고 6공화국이 새롭게 시작된 때 대학 신입생이 되어서 그런지 당시 나는 신입생이면 의례히 받아야 하는 듯한 의식화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배들의 몇 번의 권유나 강요도 무관심으로 대하다 보니 덕분에 난 당시 기준으로 ‘날라리 대학생’으로 분류되었고 선배들도 더 이상 나를 포섭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글이 그 이 후 싸이월드와 페이스북 초창기였던 2000년대 중 후반에 몇 번 더 내 친구들에 의해 퍼져 나갔고 동시대를 살았던 당시엔 30대 중후반이 된 이들에게 다시 호응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지나간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추억과 공감은 더 커지는 것 같다.
개정판이라고 하긴 뭣 하고 초고인 ‘1988 그 때를 아십니까’를 기초로 해서 50대 중반이 되어 느끼는 당시의 추억들을 다시 한 번 얘기해보려 한다. (내가 88학번이라 88학번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지만 보통 X세대 가장 선배라 할 수 있는 88학번에서 92학번까지 조금 넓은 스펙트럼의 이야기라고 봐주심이 좋을 듯 하다.) 88 꿈나무로도 불렸고 X세대라고도 불렸던 그들이 당시에 어떤 삶을 살았고 그 이후엔 어떤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현재의 그들은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는지를. 욕심을 좀 더 낸다면 세대갈등이 많은 요즘, 어쩌면 지금의 MZ세대와 그 당시 X세대와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애기도 해보고 싶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란 채플린의 말은 MZ와 X와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지금 리더계층인 X세대와 실무계층인 MZ사이에 갈등이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줌아웃 해서 볼 수 있다면 어쩌면 그 두세대가 최고의 궁합이 될 수 도 있다는 생각을 직장생활 동안 하곤 했다. 29년 월급쟁이 생활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그런 세대간 화해의 고리도 찾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