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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쿠로스 Dec 04. 2024

여행 12일 차, 와인 없는 몰몬시티에서 불멍와인 호사

Salt Lake City, 유타

스피드 딱지를 받았지만 또 경고만?


10일 차 운전, 이글 -> 솔트 레이크 시티, 400마일(640km), 5시간 57분



비시즌에 방문한 이글의 호텔은 이번 여행 중 최악의 숙소였다. 소파베드에서 잠을 잔 현암은 다음날 아침 허리통증을 호소했다. 소파베드에 매트리스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었다. 샤워타월 및 침구 등의 관리상태도 엉망이었다. 손님이 몇 개월 없는 그대로 방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냄새도 나고 세탁도 엉망이었다. 위생과 청결상태에 둔감한 50대 K아저씨들이 이렇게 느낄 정도면 선을 넘은 것이다.


아저씨 여행객들이 유일하게 가치를 두는 조식도 문제였다. <모닝응가>를 위해 중요한 식자재인 요구르트는 유통기한 임박인 상태였고 중요 단백질 공급원인 스크램블 에그는 우리가 내려갔을 때 바닥이 나 있었다. 프런트 겸 주방, 서빙 등 혼자 멀티를 담당하는 인도직원에게 스크램블 에그를 채워달라고 요청했다. 돌아온 그의 대답은 멋 적은 웃음과 함께 계란이 없다는 것이었다. 손님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혼자 벌크업 하려고 계란흰자를 많이 먹었는지 모르겠으나 다른 이유도 아니고 <계란 없다>라는 대응불가 하면서도 쿨내 나는 답변을 들으니 아이러니하게 오히려 수긍이 되었다.


콜로라도를 지나 유타주로 들어왔다. 유타에선 또다시 긴 평원이 이어졌다. 옥수수와 밀밭이 펼쳐진 캔사스와 달리 유타는 사막에 가까울 정도로 흙으로 뒤덮인 광활한 공간이었다.


솔트 레이크 시티로만 정하고 호텔은 미정인 상태로 달려가던 중 Dr. 구에게 메시지가 왔다. 내가 운전을 하고 있었고 내 폰으로 왓츠앱 연락이 왔다. 


석헌이 괴짜인 이유 중 하나는 아직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예전 피처폰 시절부터 핸드폰을 소유한 적이 없다. 심지어 한국에 있을 때 삐삐도 없었다. 본인말로는 타인에게 속박당하는 것이 싫어서 그렇다는 것인데 그 심정은 일부 이해가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은 그와 연락하기가 무척 불편하다는 것이다. 하여튼 희한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내 폰으로 온 Dr. 구의 메시지는 운전자 옆자리에 앉은 석헌이 열었고 거기 링크된 호텔주소를 눌렀다. 그 순간 네비의 경로가 바뀌었는데 마침 그때가 갈림길에서 차선을 변경할 때였다. 네비 경로가 바뀔 때 갈림길에 들어서다 보니 나는 결국 잘못된 경로로 가게 되었다. 순간 남은 거리와 경로가 바뀌었고 그런 네비로 시선을 잠깐 돌린 순간, 아뿔싸 뒤에서 경찰차가 은신처에서 내 뒤를 따라 출발하고 있는 것이 백미러로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속도가 초과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죄를 지었으면 경찰 앞에선 순한 양이 되는 전략이 가장 좋다. 이미 아칸소에서 한 번 경험도 있겠다 차를 조심스레 갓길에 세웠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운전자가 미국시민이 석헌이 아니라 한국에서 온 여행객인 나라는 점이었다. 


백인경찰은 나에게 속도위반이라고 얘기했다. 나는 갈림길에서 경로를 잘 못 드는 바람에 조심하지 못했다고 자백하고 단, 속도는 90마일이 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유타는 80마일이 제한속도인데 90이 넘냐 안 넘냐가 티켓을 끊을지 말지 중요한 요소라고 석헌이 미리 코칭해 주었다.


경찰은 차 안을 보더니 뒷자리에 현암이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것도 지적했다. 미국은 각 주마다 법이 다른데 유타주는 고속도로에서 뒷자리 안전벨트는 필수사항이라는 것이다. 그런 두 가지 이유를 데고 경찰은 나와 현암의 국제면허증을 달라고 해서 자기 차로 가지고 갔다.


처벌을 기다리는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예측했다. 첫째는 아무래도 나와 현암이 국제면허증이니만큼 미국 현지에서 처리가 곤란하여 저번처럼 <경고>로 그칠 확률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유타주 경찰국에서 한국국적자들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납부받을 방법이 좀 어려울 거 같기도 했다. 


두 번째는 그럼에도 <속도>와 <안전벨트>라는 두 가지 위반사항이 있다 보니 벌금을 부과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면 봐주겠지만 두 가지다 보니 경찰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심정적으로도 이해가 되었다.

10여분 후 돌아온 경찰은 우리에게 서류 한 장을 건넸다. 결과는 “와우!” 이번에도 <경고>에 그쳤다. 경찰은 경고에 그친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고 대신 구두로 주의를 주었다. 


<미국에서 유타주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가장 많이 나며 특히 중상에 이르는 큰 사고가 많은 곳이다. 그러니 앞으로 규정속도를 반드시 지켜 운전하라>


그러고 보니 유타주는 직선도로가 대부분이고 스피드 본능을 자극하는 풍광이 많기로는 지금까지 온 곳 중 Top급에 드는 것 같다. 네비경로가 바뀌는 바람에 우연히 경찰에 적발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미리 이렇게 주의를 받은 게 나중에 안전운전을 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벌금부과도 받지 않았으니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단 생각까지 들었다. 이 자리를 빌러 핸섬하고 친절했던 유타주 경찰관 Adam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경고만 받은 교통티켓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해 DR. 구가 알려준 호텔로 갔으나 호텔입구를 찾지 못해 근처 두 바퀴를 헤맸다. 그렇게 발견한 곳이 호텔 EVO. 


일단 호텔 자체 주차장이 없었다. 그냥 상가처럼 보이는 건물 한 동만 덩그러니 있었다. 근처에 주차를 하고 짐을 끙끙 끌고 왔다. 체크인을 하며 호텔 안쪽을 살펴봤다. 오호! 이 EVO는 저번 멤피스의 <Crosstown Concourse>와 유사하게 폐공장이나 철거직전 건물을 골조만 남기도 재건축 한 건물이었다. 


솔트레이크시티는 한국인들에 김동성이 안톤오노의 할리우드 액션 때문에 금메달을 뺏긴 2002 동계올림픽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선 눈과 스키로 유명한 도시다. EVO라는 건물은 그런 솔트레이크시티의 장점을 활용하여 스키나 등산 같은 아웃도어 스포츠 관련시설은 물론 실내 암벽 등반 같은 실내스포츠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1층엔 아웃도어 매장도 있고 스타트업들의 공용공간도 있어 디지털노매드로 일을 하거나 팀워크나 세미나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세련되게 꾸며 놓았다. 그런 공간에 호텔객실을 일부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색은 예술작품을 군데군데 녹였다는 것이다. 모든 객실의 디자인이 한 명 한 명의 디자이너 작품으로 꾸며져 있고 공용공간도 젊은 창작자들의 작품과 재능이 군데군데 녹아져 있었다. 우리 방은 Luuren Lee의 디자인 방이었다.


<Form Over Function>, 즉 <형식이 본질을 좌우한다>


10여 년 전 업무공간을 이렇게 창의적인 형태로 꾸미는 것을 처음 접하고 놀랐던 적이 있다. 그리고 차츰 그런 문화에 적응해 갔고 이제 미국은 물론 한국도 업무공간의 디자인화가 대세가 된 지 제법 되었다. 바뀐 형식이(디자인) 일의 본질(콘텐츠)을 좌우하고 있는 모습을 미국에서 다시 보게 된 것은 감회가 새로운 일이었다. 


저녁식사는 좀 전에 호텔을 찾아 헤매다 눈여겨봐 둔 팬시한 레스토랑 겸 바로 향했다. 주위에선 독보적인 곳인지 젊은이들부터 중년 부부까지 사람이 가득했다. 


EVO의 호텔방은 세련되긴 했으나 좁아서 와인을 마실 테이블도 없었기에 우리는 넓고 디자인이 훌륭한 공용공간을 오늘의 2차 장소로 생각했다. 마치 게스트하우스의 공용공간에서 투숙객들이 같이 모여 맥주 한잔 하며 얘기하는 모습을 상상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1차로 저녁을 먹으며 술은 많이 하지 않았다. 맥주 한두 잔과 피자로 저녁을 마치고 근처 편의점으로 와인을 사러 갔다. 그런데 어랍쇼! 이 편의점에는 맥주만 있고 와인이 없는 것이다. 구글맵을 검색해서 다른 곳으로 갔다. 그런데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걸어서 갈 수 있는 마지막 편의점을 갔는데, 결국 그 집도 와인을 팔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는 이곳이 <몰몬교>의 본산지 솔트레이크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좀 전에 저녁을 먹으러 갔던 곳은 수십 종의 수제맥주와 다양한 와인을 팔고 있었다. 그리고 <낮에는 스키, 밤엔 위스키>란 말이 있듯 스키장과 위스키, 즉 스키장과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곳이 술에 엄격한 <몰몬교>의 도시라는 것을 잠시 망각했었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호텔 안에 바가 하나 있는 것을 봤는데 거기선 당연히 와인과 위스키를 팔 것이었다. 오늘 와인은 거기서 마시는 것으로 결론짓고 호텔로 향했다.


바는 작았지만 킬포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테라스가 붙어 있어 야외에서 뷰를 바라보며 한잔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테라스엔 4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소파가 두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엔 심지어 불멍 할 수 있는 화덕도 있었다. 장작은 아니었으나 가스불로 장작효과를 내는 신박한 아이템이었다. 밤엔 기온이 거의 영하로 내려가는지라 불멍이 없는 또 다른 소파엔 추워서 앉을 수도 없었다.  


와인을 주문하는데 마침 불멍 앞에 있던 남녀 한쌍이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고 우리는 잽싸게 불 앞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후 여러 팀들이 밖의 자리를 눈독을 들였으나 추위 때문에 불이 없는 소파엔 앉지를 않았다. 그래서 우린 그 자리를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차지하고 불멍과 와인을 즐길 수 있었다. 편의점에서 와인을 못 산 것이 오히려 더 잘 된 것이며 교통위반 경고에 이어 오늘의 두 번째 전화위복이 되었다.


아무도 우리 주위에 오지 않자 우린 <악화가 양화를 구축했다>라는 자조적인 농담도 했지만, 뭐 10시간 넘게 비행기 타고 온 50대 외국인 관광객이 란걸 알면 현지 로컬인들도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바는 11시에 마감인데 라스트오더가 10시 40분이었다. 와인 두 병을 비워가는 시점에 우린 바텐더에게 와인을 사서 공용공간에서 마실 수 있는지 문의했다. 답은 No였다. 편의점에 와인을 사서 공용공간에서 마시려는 우리 계획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다. 


결국 바에서 와인을 한 병 사서 방으로 돌아왔다. 마땅한 테이블은 없지만 작은 협탁을 바닥에 놓고 철푸덕 바닥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인생이란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달려있음>을 주제로 얘기를 나눴다. 교통경찰에 걸렸기에 운전을 더 조심할 수 있었고 와인을 편의점에서 못 샀기에 기대도 없었던 테라스에서 불멍을 만끽할 수 있었던 오늘 하루에 감사했다. 


역시 사람의 인생이란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 충실하는 게 최선이란 걸 느끼게 되는 솔트레이크 시티의 깨달음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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