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ke Tahoe, 캘리포니아
12일 차 운전, 솔트 레이크 시티 -> 레이크 타호, 552마일(883km), 8시간
원래 오늘 목적지는 네바다주 <리노>였다. 거리도 적당했고 네바다의 카지노 분위기도 느껴볼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어제 Dr. 구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리노가 아니라 1시간 정도 더 달려야 하는 Lake Tahoe를 추천했다.
Dr. 구의 제안에는 역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밤은 샌프란 입성 전 마지막 날로서 실질적인 로드트립의 종지부를 찍는 대장정의 저녁식사를 해야 하는 날이다. 지난 툴사에서 스테이크를 먹긴 했으나 버번위스키 대신 와인을 마셨다. 그러다 보니 로드트립의 마지막 저녁은 반드시 <버번과 스테이크> 조합이어야 했다.
50대 아저씨들의 철없는 버킷리스트를 기억한 Dr. 구는 훌륭한 스테이크집 위주로 검색을 했고 비록 1시간을 더 가야 하지만 <Old Range Steakhouse>가 있는 Lake Tahoe를 추천한 것이다. 물론 숙소 바로 옆 거대한 호수의 풍광은 덤이었다.
오늘의 새로운 목적지와 기대되는 스테이크 저녁이 모두 확정된 관계로 가벼운 마음으로 솔트 레이크 시티를 출발했다. 30년 전 어학연수 후 로트트립에서도 솔트 레이크 시티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운전을 하며 봤었을 터인데 이번에 다시 보는 거대한 소금호수(솔트 레이크)는 또 다른 장관이었다. 소금호수라는 것이 한국인들에겐 당연히 생소한 자연경관인데 차로 20분 정도 달리는 동안 계속 나타나는 큰 규모는 낯선 데다 거대하기까지 해서 무념무상으로 지켜보기만 해도 감동이었다.
어제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먹었기에 오늘 반드시 버거킹을 먹어야 to do list 달성인데 주유를 하기 위해 들른 곳에 다행히 버거킹이 나타나 이 또한 행운이었다. 무사히 여행을 마감하고 있다는 안도감과 햄버거 to do list의 완성, 그리고 대망의 저녁식사까지 기다리고 있는 완벽한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현진건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가 곧 다가올 불행을 예측할 수 없었듯 그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Lake Tahoe는 캘리포니아 초입에 위치해 있다. 2주 가까운 여행 끝에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는 것은 충분히 기뻐해도 될 성취감이었다. Lake Tahoe가 가까워지며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콜로라도에서도 진눈깨비가 내렸으나 오늘은 눈송이가 보일 정도의 예쁜 눈이 내렸다. 목적지 도착을 10여 분 남겨둔 우리의 기분은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가던 길에 큰 마트가 보였다. Lake Tahoe도 스키리조트인 관계로 주변에 편의점을 찾기 어려울 거 같고 특히 어제 솔트 레이크 시티에서 와인을 사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니 마트에서 미리 와인을 사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마트 주차장에 차를 파킹했다. 눈과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불어 마트까지 빨리 뛰어갔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와인을 골랐다. 혹시 콜키지가 되면 마시려고 버번위스키도 한 병 샀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꺼내는데 <oh my god!> 바지주머니에 있던 지갑이 없었다.
난 이번 여행 중 얇은 명함지갑에 신용카드 한 장과 트래블월렛 한 장, 이렇게 두 장만 넣고 다녔다. 현금은 거의 쓸 일이 없어 트렁크에 보관하고 얇은 지갑 하나만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앞쪽 바지주머니는 소매치기당할 우려도 없고 바지 안에서 약간의 존재감도 느껴지기에 겉옷이나 쌕을 들지 않는 여름에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실제도 그랬고.
그런데 마트에 파킹 직전까지 내가 운전을 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을 피하기 위해 빨리 뛰었던 걸 기억해 보면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이 흘러내려 차 안 운전석 근처나 아니면 마트입구에 떨어진 것 같았다. 혼비백산하여 뛰어 나가 차 안과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십여 분을 수색해도 없으면 없는 것이다.
일단 석헌의 신용카드로 계산을 완료하고 차에 탔다. 어쩌면 점심 먹은 버거킹에서 테이블에 두거나 흘렸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면 도저히 찾을 방법이 없다. 일단 두 카드를 바로 정지시켰다. 트래블 월렛은 앱으로 연동되어 있기에 바로 <카드 비활성화>를 시켰고 신용카드는 ARS를 통해 분실신고를 했다. 다행히 그동안 카드 결제 문자통보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좀 전까지 텐션이 엄청 높아 있던 50대 여행객들의 도요타 안은 갑작스럽게 어두운 정적이 찾아왔다.
10분 정도 운전으로 금방 숙소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프런트에 갔는데 문이 닫혀 있고 아무도 없었다. 문 앞에 붙어 있는 번호로 전화를 했는데 역시 아무도 받지 않았다. 문제는 오후 6시 정도인 당시 눈보라는 계속 치고 있었고 기온은 영하로 내려 가 있었다는 것이다. 몸에 열이 많은 석헌은 이번 여행에 긴 팔 옷을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다. 콜로라도 이글에서 내가 여벌의 겉옷을 잠시 빌려주긴 했는데 그날을 제외하곤 계속 반팔 차림이었다. 강추위에 반팔차림이다 보니 그 열 많은 석헌도 몸을 떨기 시작했다.
추위로 인해 차로 다시 돌아가 Dr. 구에게 전화를 했다. 어렵게 연결된 Dr. 구는 난감한 현재 우리 상황에 대한 공감은 없이 사무적인 말투로 <그래서 내가 보내 준 호텔링크를 자세히 읽어 보라고 했잖아>라고 말했다.
응? 자세히 읽어보라고? 그래서 자세히 읽어 보았다.
그랬더니 뭔가 입력하는 <양식>이 있고 그걸 호텔에 제출하라고 되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호텔은 스키 비시즌엔 무인으로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콜로라도 이글은 비록 계란을 다 먹어 버리긴 했으나 직원이 한 명이라도 있었는데 여기는 아예 <무인운영>이었다. 그래서 그 양식을 써서 보내면 거기서 방 번호와 출입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시스템인데, 산골이라 인터넷망이 엉망인지 양식을 보내도 계속 반송되었다.
추위와 당혹감에 30분 여를 차에서 벌벌 떨며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였고 중간중간 직접 예약한 Dr. 구에게 대신 연락도 부탁했다. 결국 직원과 연락이 닿은 Dr. 구가 방번호와 비번을 받아 전해주었고 그렇게 우리는 가까스로 <무인호텔 방>에 입실할 수 있었다.
시간은 이미 저녁 7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더 늦으면 스테이크 만찬을 즐길 시간도 없을 거 같아 짐만 두고 식당으로 향했다. 다행히 스테이크집은 호텔 바로 옆 건물이라 후다닥 자리를 옮겼다.
툴사에서 Ribeye steak를 먹었기에 이번엔 New York Strip Steak을 먹기로 이미 모두 마음의 결정을 하고 있던 터였다. 50대 아저씨 소화력으로는 다 먹기 힘든 16 Oz짜리 스테이크를 각자 하나씩 시켰다. 가져간 버번위스키는 콜키지가 안된다고 하여 마시지 못하고 더블 잔으로 한잔씩 시켰다.
주문을 마치고 드디어 휴식시간이 찾아온 우리는 한동안 말을 잊었다. 멘탈이 모두 나갔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갑을 잊어버린 일로 시작해 1차 멘탈이 나갔고, 무인호텔에 입실을 못해 고생하며 2차 멘탈이 나갔으며 마지막으로 눈보라와 영하의 추위에 마지막 남은 3차 멘탈까지 탈탈 털렸다. 우리 중 에너지 레벨이 가장 높은 석헌조차 추위에 오한까지 느껴서였던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쇠락해져 있었다.
위스키를 몇 모금 마셨을 때 스테이크가 나왔다. 뉴욕 스테이크의 사이즈는 압도적이었다. 어른 손바닥 보다 조금 더 큰데 거기다 두껍기까지 했다.
멘탈이 나간 상태였지만 첫 두 점 정도는 맛있게 먹은 것 같다. 하지만 세 점 네 점 들어갈수록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정확히 얘기하면 배가 고프지 않았고 더 정확히 얘기하면 모든 소화기관이 일을 멈추고 있는 것 같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석헌과 현암도 마찬가지였다. 고기를 좋아하는 아저씨들이지만 모두 소녀소녀하게 깨작깨작 먹고 있었다.
나는 카드분실의 기억을 잊기 위해 위스키를 빨리 마시고 더블 한 잔을 더 주문했다. 하지만 석헌과 현암은 위스키 한 잔도 억지로 마셨으며 심지어 현암은 반만 마시고 나를 주었다.
늦게 입장했기에 한 시간 정도 지나니 손님이 우리만 남았다. 스테이크는 이미 식었고 모두들 반도 먹지 못했다. 차라리 방에 가서 와인을 마시기로 하고 스테이크 포장을 요청했다. 솔직히 식은 스테이크를 방에서 먹지는 않겠지만 반 이상 남기고 가는 것은 레스토랑과 셰프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석헌의 말에 포장을 했다.
허겁지겁 나오느라 방을 제대로 못 봤는데 크지는 않았지만 시설은 깨끗했다. 확실히 까탈스럽고 부유한 손님들이 많은 캘리포니아라서 그런지 콜로라도 이글에 비하면 같은 비시즌의 스키장 숙소였지만 관리정도는 훨씬 수준이 높았다.
그리고 뒤늦게 눈에 들어온 방 한쪽의 모형 벽난로.
어젯밤 테라스의 진짜 불멍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늑한 느낌을 주어 우리의 집 나간 멘탈을 되살리는데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트래블월렛 앱을 봤더니 분실한 지 얼마 뒤 누군가가 근처 SHELL 주유소에서 1달러씩 두 번 결제를 시도했고 실패한 기록이 나왔다. 이로서 카드분실의 위치가 마트 근처라는 것도 확인되었다.
벽난로 옆자리의 석헌도 와인을 마신 후 이제 정신이 좀 드는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방 입장도 안되고 강추위까지 몰아치니 혼백이 잠시 나갔던 것 같다고 했다. 호텔에 양식을 기입해 보냈는데 계속 반송되고 Dr. 구에 전화해도 연락이 안 될 때는 진짜 <Lake Tahoe 안으로 혼자 터덜터덜 걸어가고 싶었다>라는 농담까지 했다.
내가 대화 중 Lake Tahoe로 뚜벅뚜벅 안 걸어가길 잘했다고 얘기했더니 석헌은 <뚜벅뚜벅>이 아니라 <터덜터덜>이라고 바로 잡았다. <뚜벅뚜벅>은 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걸어가는 것이고 <터덜터덜>은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무의식적으로 걸어가는 것이란 자신만의 해석도 곁들였다.
<운수 좋은 날> 김첨지와 같은 하루를 보낸 우리는 와인을 마시며 안 좋은 기억을 떠나보냈다. 김첨지는 아내의 죽음이라는 불행을 돌이킬 수 없었다. 우리 역시 오늘의 불행을 돌이킬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빨리 잊고 새 출발 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은 있었다. 지갑을 잃어버렸지만 그로 인한 금전적 손해는 한 푼도 없었으며 방 번호를 몰라 고생을 했지만 결국 입실을 했으며 추위로 개고생은 했지만 아무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애꿎은 16 Oz 짜리 뉴욕 스테이크를 반도 못 먹고 포장해 온 것은 아까웠지만 그 정도야 또 로드트립의 추억 하나로 치환해도 될 정도의 아쉬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