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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쿠로스 Dec 15. 2024

에필로그: 로드트립, 가길 잘했다.

에필로그

이제는 인생이란 로드트립을 다시 떠날 때


30년 전 미국 어학연수를 마치고 일본인 친구 4명과 <포드 토러스> 한 대를 빌려 한 달간 로드트립을 떠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매형과 누나가 유학 중인 텍사스 오스틴에서 어학연수를 했는데 1993년 겨울, 부모님께서 나도 볼 겸 누나네 식구도 볼 겸 겸사겸사 오스틴에 오셨다. 


그 겸사겸사 중 또 하나 중요한 목적은 내 여행경비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내 여행계획을 서울에서 미리 들으신 아버지는 여행경비를 직접 들고 오셨다. 요즘은 사라진 것 같은데 <트래블러스 첵: Travler’s Check>이라고 부르는 여행용 유가증권 같은 것으로 아마 1,500$ 정도를 주신 것 같다. 30일 여행 기준 하루 50$로 예산을 짰기 때문이다.


여행 떠나 기 전날 저녁식사에서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온더로드라는(On the Road) 미국소설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인데 로드트립을 다룬 이야기다. 너도 나중에 이번 여행경험을 언젠가 책으로 쓸 수도 있으니 여행 중 기록을 틈틈이 하도록 해>


군대를 막 제대하고 4학년 복학을 앞둔 20대 초반의 철없는 청년이 나중에 책을 낼 것을 염두에 두고 기록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난 그 30일의 여행이 내 평생 엄청난 추억거리가 될 것임이 막연하게나마 예상되었는지 여행 중 매일매일 일기를 썼다. 


모텔 방 하나에 아시안 총각 다섯 명이 자는, 이번 여행과 비하면 엄청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아무리 피곤하고 아무리 취했어도 매일 한 장 이상 일기를 썼다. 어느 도시를 갔고 무엇을 먹었으며 얼마를 소비했는지 등등 미국여행 하루의 경험을 훗날 내가 다시 일기장을 볼 때 떠올릴 수 있도록 최대한 자세히 썼다.  


세월이 흘러 난 그 일기장을 10년에 한 번 정도 다시 본 것 같다. 보려고 본 것이 아니라 이사를 하며 짐을 정리할 때 눈에 띄면 한 번씩 보는 정도였다. 그리고 30년 만의 이번 미국 로드트립을 떠나며 그 일기장을 다시 봤다. 30년의 시차를 둔 일기장 속의 나는 같은 이름과 같은 주민번호를 쓰는 현재의 나와 동일인이었으나 20대와 50대라는 간극처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아직 세상을 모르고 미래에 대한 기대와 걱정이 공존하는, 지금의 20대들이 느끼는 것과 유사한 즐거움과 불안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30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그 후 난 30년 동안 월급쟁이 생활을 했고 지난해 드디어 직장생활을 마감했다. 지금 나이 50대 중반이니 앞으로 30년 이상은 살 확률이 많을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은 학생으로서 1막, 월급쟁이로 2막을 마치고, 진정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갈 3막이 시작되었다. 그 인생 3막의 시점에서 이번 로드트립을 떠난 것이다.


30년 전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온더로드> 책을 보진 못했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인 21세기다 보니 다행히 넷플릭스에 <온더로드>영화가 있었다. <잭 캐루악>의 소설 <온더로드>는 20세기 영문 소설 중 100위 안에 들 정도의 명성이 있는 작품이다. 소설의 유명세에 비해 영화화는 늦어져 2012년에야 영화화되었는데 흥행엔 실패한 것 같다. 왜 실패했는지는 아마 직접 보면 아실 거라 생각된다. 


나는 로드트립을 하는 젊은이들의 우정, 방황을 기대했는데 방황이 지나쳐 마약과 섹스가 난무하는 골 때리는 내용이었다. 특이한 점은 남자주인공들이 무명임에 비해 여성 출연진들은 <크리스틴 스튜어트>, <커스틴 던스트>, <에이미 아담스> 같은 Top 여배우들이란 것이다. 분석기사를 보니 소설의 명성이 워낙 뛰어났기에 Top 여배우들이 조연이나마 출연을 한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30년 전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온더로드>를 미국 로드트립을 마치고 돌아와 집에서 감상했다. 내용은 기대 이하였으나 그래도 간간히 미국도로를 횡단하는 모습들이 내 눈을 즐겁게 했다. 이번 여행 중 운전하며 바라봤던 미국의 거대한 자연은 1950년대나 2024년이나 큰 변화가 없었다. 영화 <온더로드>를 보는 내내 이 번 여행을 다시금 회상할 수 있던 것이 그 영화의 최대 장점이었다.


30년 전엔 매일 일기를 썼지만 이번엔 사진과 영상을 많이 남겼다. 당연히 스마트폰 덕분인데 일기보다 기억을 떠올리는데 영상매체는 더 큰 도움이 되었다. 동행했던 현암이 영상들을 음악과 함께 편집하여 몇 개의 유튜브 클립으로 만들었다. 지금도 가끔 그 유튜브를 보는데 볼 때마다 당시의 대화, 풍경, 음식, 와인들이 떠오른다.


서울로 돌아온 후 내가 한 일은 이 로드트립을 브런치에 연재하는 것이었다. 영상에서 담을 수 없는 감정과 묘사들은 오직 텍스트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브런치의 자체 편집기능이 편하게 되어있어 텍스트 중간중간 사진도 넣을 수 있어 더 좋았다. 확실히 시대가 바뀐지라 텍스트에 사진이 더 해지니 당시의 현장감이 더욱 올라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브런치를 연재하며 좋았던 점은 여행 당시의 하루하루를 기록하다 보니 글을 쓰는 동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 당일로 돌아간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리면 그 당시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를 머릿속에서 떠올리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기록하는 작업은 시공간을 넘어서 글 쓰는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게 만든다. 인천공항출발에서부터, 샌프란의 바 투어, 렌터카 도요타 군과의 만남, 여러 여행지들의 맛있는 음식들, 호텔 조식, 그리고 하루의 마무리 와인 각 1병까지, 글 쓰는 내내 나는 당시의 상황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울로 돌아왔지만 브런치에 연재를 하는 2개월 내내 아직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 에필로그를 작성하는 순간이 진정한 여행의 마무리라는 느낌이 든다.


작년 말 월급쟁이 생활을 마감한 이후 유튜브를 보다 보면 의도치 않게 여행 유튜브 영상들이 많이 보였다. 회사를 나와 백수가 된 사실을 기가 막히게 아는 구글 알고리즘의 결과였다. 나 홀로 여행, 퇴직자의 여행, 부부 여행 유튜버 등 종류도 다양했다. 그중 한 부부 유튜버의 인터뷰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40대고 전세금을 빼서 세계여행 중인 부부였다. 


왜 전세금을 빼서 여행을 하냐? 40대인데 미래가 불안하지 않냐는 구독자들의 질문에 남편이 답을 했다.


<보통 은퇴 후 60대에 세계여행을 가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60대 이후 경제적으로나 건강적인 이유로 세계여행을 갈 수 있는 확률이 몇 퍼센트일까 생각해 봤다. 아마 그때가 돼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이엔 내가 마음만 먹으면 100% 갈 수 있다. 물론 돌아온 이후 미래가 걱정되기도 했으나 아직은 그 미래를 감당할 젊음과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마음먹으면 100% 확률로 갈 수 있는 지금을 택한 것이다.>


나라면 40대에 그런 모험을 택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의 말에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도 그러했다. 연재 1편에 밝혔듯 이 번 여행은 계획을 하고 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친구와의 전화 통화 중 갑작스레 결정된 것이다. 갑자기라고 말은 했지만 아마 나의 마음속엔 <지금이 가장 빠른 것이다. 더 늦으면 하기 어려울지도 몰라>라는 심정이 내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로드트립을 가기로 한 그 결정을 2024년 최고의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2024년부터 약 30년간 내게는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 같다. 학생이고 직장인이고 하는 인생은 누구나 그 나이 때 비슷비슷하게 사는 인생이라 어느 정도는 예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부터의 인생은 정말 어떻게 펼쳐질지 예상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청구서>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반대로 지금까지의 <인생의 복리효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 되든 잘 살아보려 한다.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인생에 닥쳐오는 현상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무엇보다 그 결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인생이라는 로드트립>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특히 인생 후반전을 살아가야 할 50대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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