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gle, 콜로라도
9일 차 운전, 헤이스 -> 이글, 464마일(742km), 7시간 6분
헤이스를 떠나 이글로 출발할 때 약간의 설렘이 있었다. 로드트립은 운전하며 경치를 보는 그 자체의 매력이 충만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경로는 미국 중남부 평원지대만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진 광활한 미국대지를 보는 것에 우리 여행객들은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인간의 마음이 간사하기 짝이 없는 것이 처음에는 그 엄청난 대자연을 조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동했으나 지금은 마치 이미 영주권을 받은 사람들 인양 그 풍경에도 감흥이 없어져 있었다.
그에 반해 콜로라도는 로키산맥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미국자연의 모습이다. 산과 협곡 그리고 강이 있는 곳. 그곳을 관통해 드라이브한다는 것은 이번 로드트립의 새로운 챕터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다. 콜로라도에 진입하며 거대한 산과 그 사이 협곡을 통과하는 경치는 무척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만큼 운전이 까다로워졌다. 미국 하이웨이 운전은 크루즈를 설정하고 한동안 달려도 좋을 만큼 직선도로가 많다. 그에 반해 콜로라도는 오르막 내리막의 높낮이는 물론 협곡을 꼬불꼬불 통과하는 구간까지, 아름다운 풍광에 반비례해 운전의 난이도가 높았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며 우리는 점심메뉴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 하이웨이에서의 메뉴는 프랜차이즈 햄버거가 기본값인데 여행이 2주 차에 들어가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미국 프랜차이즈 햄버거 도장 깨기를 하나씩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먹는 맛과 미국 본토의 맛이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한국에서 철수해서 이젠 먹어볼 수 없는 추억의 맛을 다시 맛보는 경험이 어떨지 하는 것은 미국 로드트립의 또 다른 매력이었다.
먼저 미국 프랜차이즈 햄버거의 근본이자 대장주인 <맥도널드>. 역시 M자 아치형 로고는 미국 하이웨이에서 단연 눈에 띌 정도로 컸고 가장 많았다. 미국시민인 석헌은 무조건 맥도널드를 선호했다. 워런버핏이나 트럼프도 아니면서 점심은 가능하면 맥도널드를 먹자고 주장했고 결국 가장 자주 먹은 메뉴가 되기도 했다.
석헌이 선호하는 메뉴는 <맥도널드 오리지널 단품>이었다. 지금은 빅맥이 대세지만 원래 맥도널드의 원형은 패티 한 장에 피클 두 개, 그리고 케쳡, 머스터드만 들어간 구성이다. 간단하지만 의외로 맛이 좋다. 여기에 감자튀김과 음료를 더하면 점심 한 끼로 딱 적당하다. 특히 아침을 호텔에서 먹고 나오고 운동 없이 차에만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 소화력이 떨어진 50대 여행객들에게 양적으로 부담스러운 빅맥 보다는 <오리지널 단품>이 안성맞춤이었다.
나의 원픽은 <웬디스>였다. 툴사에서 멤피스로 가는 길의 점심에 먹었다. 지금은 철수했지만 <웬디스>는 한국에서도 예전에 제법 인기 있는 브랜드였다. 특히 신촌 연세대점과 압구정점은 80년대 말에서 90년 중반까지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날라리들의 만남의 장소로도 큰 인기를 끌었던 곳이다.
웬디스 햄버거는 30년 전 어학연수 후 일본친구들과 한 달간의 미국여행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메뉴였다. 다른 햄버거에 비해 <양파>의 양이 좀 많아서 그런가 아시안들의 입맛에 잘 맞았던 것 같다. 나도 30년 만에 맛보는 웬디스였는데 양파 가득 한 입 베어 무는 추억의 맛이 좋았다. 우리 모두 먹은 지 오래되어 웬디스 패티가 사각형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아직도 사각형을 유지하고 있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디스>는 세인트루이스에서 헤이스 가는 길에 먹었다. 찾아서 간 것은 아니라 앞선 글처럼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캔사스에서 휘발유를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렀다 우연히 근처 식당을 간 것이다. 한국에서 철수한 지 20년이 된 하디스를 맛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훌륭해서 놀랐다. 석헌도 하디스는 먹어본 적이 별로 없어 주문에 좀 고민했으나 가장 인기가 많다는 <빅 치즈버거>를 시켰다. 아무래도 <빅>이라 내용물이 충실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의외로 꽤 훌륭한 맛을 선사했다.
여행은 후반전으로 돌입했는데 우리의 <햄버거 to do list>엔 아직 <버거킹> <서브웨이> <인 앤 아웃>이 남아있었다. 콜로라도 이 글을 가는 길에도 점심에 맥도널드를 먹었기에 이제 우리에겐 <세 번의 점심기회>와 <세 곳의 to do list>가 아직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마치 남은 세 번의 타석에 매번 안타를 쳐야 그 해 3할을 달성하는 타자와 같은 심정이었다.
미리 얘기하자면 우리는 미션완수를 했다. 그것도 두 가지 악조건을 뚫고서.
첫 번째 악조건은 <인앤아웃>은 마지막 금요일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유타> <네바다> 등에 인앤아웃이 있는걸 석헌이 처음 알고 놀란 것처럼 원래 <인앤아웃>은 <캘리포니아>에만 있는 브랜드였다. 그러다 보니 샌프란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금요일만이 유일하게 <인앤아웃>을 경험할 기회였다. 변수가 세 개에서 그중 하나가 상수로 바뀌어 버리니 그만큼 달성확률이 줄어들었다.
남은 수요일과 목요일 이틀간 <버거킹>과 <서브웨이>를 가야 하는데 그 역시 우리 의지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미국 하이웨이에서 점심시간에 맞춰 <주유소>나 <식당>이 나와줄지도 모르는 일이고 특히 맥도널드도 아닌 두 브랜드가 적정 시점에 나와줄지는 더더욱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다행히 수요일 점심에 <서브웨이>를 발견했고 목요일 점심에 <버거킹>을 발견해서 마침내 to do list 완성을 할 수 있었다.
먼저 <서브웨이>. 30년 전 일본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웬디스> 다음으로 인기 있었던 메뉴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양파나 피클 등 <아시안 입맛>의 재료를 추가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선 튀긴 음식이 빠진 <건강식>으로도 인기가 올라가고 있으며 같은 이유로 한국에서도 점점 눈에 띄는 곳이 많아지는 듯하다. 유일한 단점인 귀찮은 주문 때문에 주문을 담당하는 석헌이 짜증을 좀 냈지만 <참치 샌드위치>로 맛있게 한 끼를 때웠다.
<버거킹>은 맥도널드 오리지널 단품과 같은 사이즈인 <버거킹 주니어>가 있어 더 좋았다. 50대 아저씨들이 <와퍼>가 아니라 <주니어> 메뉴를 시키는 것은 ‘가오’ 떨어지는 일이 분명했으나 실사구시 위주의 여행에서 그딴 남의 시선은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집 근처에 <버거킹>이 있어 프랜차이즈 햄버거 중 가장 많이 먹어봐서 그런지 미국에서의 버거킹맛은 프랜차이즈 레시피 그대로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이 맛이 좋았다.
<인앤아웃>은 워낙 많이 듣기도 했고 SNS에서도 자주 봤기에 나에겐 이번 여행에서 꼭 해야 할 숙제 같은 것이었다. 출장으로 샌프란시스코를 여러 번 왔지만 주재원들과 인앤아웃을 갈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기간도 길고 메뉴선택권도 많은 이번 여행이 <인앤아웃>을 경험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냉동이 아니라 냉장식품을 쓰기에 <신선함과 건강함>을 갖추고 있고 심지어 가격마저 퀄리티를 고려하면 저렴한 편이다. 패티에 육즙도 많은 편이고 라면에 김치 조합처럼 사이드로 나오는 <할라피뇨>가 햄버거와 찰떡궁합을 선보였다. 생감자를 튀겼기에 감자튀김의 맛도 훌륭했다.
맛도 맛이지만 매장 바닥을 계속 빗자루로 쓸고 있는 알바생이 눈에 띄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듯한 그녀는 밝은 미소를 띠며 바닥에 흘린 감자튀김이며 양상추며 하는 것들을 계속 쓸고 담고 있었다. 인건비 따먹기 싸움일 수도 있는 프랜차이즈 업계에서 청소 전담인원을 두고 있을 정도의 기업윤리를 가지고 있는 <인앤아웃>이 다시 보였다. ESG 열풍 때문에 번드르르하게 남에게 보이는 일들만 하려고 하는 한국기업들이 벤치마킹 할 만한 기업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콜로라도 이글에 도착하니 드디어 우리 여행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스키로 유명한 곳이며 고지대다 보니 아침기온은 영하 직전인 1,2도까지 떨어졌다.
너무 오래 차에 앉아있었던 것 같아 운동이 좀 필요했다. 그래서 저녁장소까지 30분 이상 걸리는 거리였지만 일부러 걸어서 갔다. 가면서 콜로라도의 가을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미국의 이상기온으로 인해 어제까지 여름이었는데 드디어 10월 중순의 가을날씨가 찾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야생사슴들이 도로를 어슬렁거리는 콜로라도의 조그만 도시 이글 한 식당 야외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요즘이 비수기라 문 연 곳이 많지 않아 그나마 영업 중인 멕시칸 식당을 찾았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의 마지막 멕시칸 음식을 즐겼다.
한국에선 멕시칸 음식을 찾아 먹은 적이 한 번도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이번 여행에서의 그 경험이 더 유니크했다. <타코> <케사디야> <부리토> 같이 들어본 음식은 물론 이름도 생소하고 기억도 나지 않은 음식들도 많이 먹었다. 특히 멕시코 맥주인 파시피코(Pacifico)와 곁들인 궁합이 좋았다. 멕시코 대표 <저렴이 맥주>인 파시피코는 맵고 신 음식들이 많은 멕시코 음식들과 잘 어울려 기억에 남는다.
가을정취를 만끽하며 또 30분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와인 봉다리를 안고 걷고 있는 현암과 석헌의 뒷모습을 보는데 이상하게 웃고 있는 그들의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