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ys, 캔사스
8일 차 운전, 세인트루이스-> 헤이스, 513마일(820km), 7시간 23분
세인트 루이스 이후의 목적지를 정한 것은 석헌이었다. 구글지도를 보고 샌프란까지의 적정 운전시간을 계산 후 헤이스(캔사스) -> 이글(콜로라도) -> 솔트레이크시티(유타) -> 리노(네바다) -> 샌프란의 코스를 정했다.
HQ의 Dr. 구에게 컨펌요청을 보냈다. 이를 본 Dr. 구는 <무난하다>라는 평과 함께 그런데 첫날인 헤이스가 좀 우려된다는 답을 했다. 이유인즉슨 우리가 도착하는 날인 10/14 월요일이 <콜럼버스데이>인데 이날이 휴일이라 너무 작은 도시인 헤이스에서 저녁을 먹을 곳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모한 50대 여행객들은 설마 문 연 식당 하나 없겠냐며 강행을 주장했고 꼰대아저씨들의 성향을 이제 완벽히 파악한 Dr. 구는 <맘대로 해라, 옛다>라는 뉘앙스로 헤이스의 호텔 하나를 예약해 주었다.
미주리를 지나 캔사스주로 들어왔다. 미국의 곡창지대답게 광활한 옥수수밭과 밀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미국 로드트립을 하다 보면 드넓은 미국땅이 얼마나 자연 그대로 보존 또는 ‘방치’ 되어있는지 느끼곤 한다. 미국땅 면적은 한국 면적에 비해 98배인데 인구는 7배 정도이니(3.5억 명 vs. 0.5억 명) 우리가 체감하는 면적 대비 인구밀도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 것인가? 그런 면으로 보자면 캔사스의 땅은 자연 그대로 있지 않고 농작물이 경작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흔적이 어느 정도는 묻어 있는 곳이다.
문제는 인간의 흔적이 있기는 있는데 너무 살짝만 묻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옥수수와 밀밭을 한 시간 가까이 지나는 동안 주유소나 식당을 찾기가 몹시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휘발유가 점점 떨어져 가는데 가도 가도 인가가 보이지 않을 때의 쫄깃함은 미국 로드트립의 또 다른 특징이자 좋게 보면 매력이기도 하다.
쫄깃함이 과해 걱정으로 넘어갈 즈음 운전하던 석헌이 갑자기 퀴즈를 하나 냈다.
<캔사스에서 세계인들에게 알려진 가장 유명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그 문제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답은 <오즈의 마법사>였다. <캔사스 외딴 시골집에..>로 시작하는 오즈의 마법사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딸이 어렸을 때 들었던 것이 기억 나서 일까? 그렇게 어렵지 않게 맞출 수 있었다.
그런데 첫 번째 문제는 진정한 두 번째 퀴즈를 위한 석헌의 빌드업이었다. 석헌은 이어서 두 번째 문제를 바로 냈다.
<캔사스에서 오즈의 마법사 다음으로 세계인들에게 유명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 여기서 나와 현암은 허를 찔렸다. 캔사스는 한국에 그리 유명한 주가 아닌데 오즈의 마법사 말고 또 유명한 것이 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스무고개 형식의 힌트를 받기로 했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스포츠였다. <운동선수입니까?> <아닙니다>
다음 생각나는 것은 정치인이었다. <정치인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추려 나간 정답에 대한 힌트는 다음과 같다.
1) 사람이 아니고 캐릭터다
2) 영화 캐릭터다
3) 8,90년대 나온 영화이며 시리즈로도 나왔다
4) 배경은 미국이지만 전 세계를 대상으로도 한다
5) 나쁜 놈들과 싸우지만 직업이 경찰은 아니다
이미 스무 개의 질문을 넘었는데 <예, 아니오>라고만 답을 하는 질문을 하다 보니 좀체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주관식 힌트를 요구했다.
<주인공 직업이 무엇입니까?>
1초 정도 고민하던 석헌은 답했다.
< 언론인입니다 >
언론인? 영화주인공? 시리즈?
이 <언론인>이라는 석헌의 답은 힌트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면 완전한 함정이었다. 언론인이 주인공인 영화는 언뜻 떠오른 게 <스포트라이트>, <더포스트>, <업클로즈 앤 퍼스널> 정도였는데 앞에서 오픈된 힌트에 대비하니 부합되지 않는 게 많았다.
석헌의 함정이자 미궁에 빠진 나와 현암은 오십 고개를 넘어서 계속 질문을 했다. 그 사이 주유소를 찾아 기름을 넣고 운전을 나로 바꾸기도 했는데, 머릿속에 <퀴즈 정답>만 떠올라 주유계기판 알람 불이 들어오기 직전의 긴장이라던지 가까스로 주유소를 찾은 안도감 같은 것들은 기억나지도 않았다.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여 결국 답을 찾았다.
정답은 <슈퍼맨>이었다.
DC코믹스 원작에 슈퍼맨이 크립톤 행성에서 지구에 도착 후 <캔사스주>의 스몰빌(Smallville)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되어있다. 영화 슈퍼맨 1을 봐도 광활한 옥수수밭이 나오고 아기임에도 차를 번쩍 들어 올리는 어린 시절의 슈퍼맨이 나왔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최고의 함정이었던 언론인.
슈퍼맨으로 변신하기 전 그는 클라크(Clark)라는 데일리 플래닛의 신문기자다. 신문기자라고 힌트를 줬으면 좀 쉬웠을 텐데 영악한 석헌은 <언론인>이라고 두루뭉술 얘기하는 바람에 우리는 뭔가 정치적 음모를 파헤치는 언론인만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석헌이 준 힌트는 모두 <슈퍼맨>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우리는 그 함정에 허우적 댄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차 안에서의 퀴즈전쟁>은 샌프란 오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끝까지 답을 못 찾았던 문제부터 또 한 번 힌트의 함정에 빠져 헤맨 퀴즈까지. 지면 관계로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여행의 후반전에 시작된 <퀴즈전쟁>은 차 안에서 또 다른 즐거움을 주며 우리 로드트립을 풍성하게 했다.
어떨 땐 퀴즈에 너무 빠지다 보니 모든 의문문이 퀴즈화 되기도 했다. 가령 식당에서 메뉴주문 후 어떤 소스를 뿌릴지 몰라 미국시민인 석헌에게 <이 소스 뿌리는 게 맞아?>라고 질문하면 자동적으로 <아닙니다>라는 답변이 나왔다. 그러면 우리도 모르게 퀴즈 형식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뒤늦게 뭔가 대화가 비효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평범한 대화마저 퀴즈를 하고 있단 걸 발견하고 허탈함에 웃었던 적도 몇 번 있었다.
콜럼버스데이라는 Dr. 구의 우려와는 달이 헤이스 숙소 근처의 식당은 거의 문을 열었다. 심지어 호텔 바로 옆에 <일본식당>이 있었다. 지난번 <투쿰캐리>의 중국식당과 마찬가지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소도시에 아시아 식당을 발견한 것은 큰 행운이었다.
당연히 우리는 일본식당으로 향했다. 꼬치구이, 튀김, 그리고 야키우동을 시켰다. 미국여행 중 먹는 아시안 누들 중 당연 <한국라면>이 최고지만 중간중간 만나는 <중국식 볶음면>과 <일본 야키우동>도 여행의 활력을 증진시키는 별미였다. 미국 시골마을이라 <나마비루>는 없어 <삿뽀로 병맥주>를 마시고 <도쿠리>도 한 병 마셨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 <엘로 테일> 1.5리터를 마셨다. 앞으로 남은 평생 다시 못 올 가망성이 매우 큰 캔사스주 헤이스란 도시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추억을 남겼다. 옐로 테일과 함께 오즈의 마법사 OST인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듣고 또 들으며 헤이스에서의 멋진 하룻밤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