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현진 Sep 23. 2024

늦깍이 대학원생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이후에 대학원 등록금을 마련했지만 매년 대학원 얘기만 나오면 아빠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화를 냈다. 

 그래서 이루어지지 않았던 나의 또 다른 꿈이었던 대학원 입학을 결심 했다.

 끼가 있고 활동적이고 남들 앞에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나는 원래 언론정보학을 전공해서 버라이어티 PD를 하고 싶었다.


 근데 앞에서 말했듯이 수능을 실패한 나는 될 때로 되라는 마음과 함께 전혀 적성에 맞지 않은 과를 가서 흥미를 느끼지 못 했고 내 대학 시절은 너무 재미가 없었다.

 내가 결혼한 후에 친구들에게 언론정보대학원을 가겠다고 했을 때 한 친구가

 ‘그 대학원 들어가기 어렵던데..내 친구 3년 내내 못 갔어’ 라고 했고


 또 다른 친구는

 ‘너가 강사니까 교육 쪽이나 상담 심리 대학원 어때? 그리고 너 직업이 언론매체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데 과연 합격이 될까?’ 라며

 날 위한 조언과 걱정을 해 주었다.

 그래서 더욱 더 만만의 준비를 했다.

 언론매체에 소개될 만큼 가능성 있는 강사라는 인상을 심어 주어야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천종합일자리지원센터의 FLY취업성공길잡이 교육 강사 박현진의 셀프 리더십 특강을 소개한 “대한민국 정책 포털 사이트” 기사와 서울시 송파구 주체 고3 예비 사회인 특강 강사 박현진을 소개한 “아시아경제” 기사, “송파 N뉴스 방송” 과 마지막으로 수능을 마친 학생들을 위한 강연회 초빙 강사로 방송 인터뷰를 담은 “송파 케이블 영상” 자료, 안산 의사회 초청 강사 기사 등등을 준비했다.

 또한 내가 속한 명품이미지연구소 대표님의 추천서와 강사 프로필도 준비했다.


 나는 세 곳에 원서를 냈고 면접을 보았는데 지상파, 케이블, 신문사 등에서 활동하시는 직급이 높은 임원 분들이 많으셨다.

 다양한 분들이 모인 것을 보고 왜 친구들이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갔다.

 순간 나는 떨어졌구나 싶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성균관 언론정보대학원에 당당히 합격했다.

 입학할 당시 나이가 32살이었다.


 면접 일에 너무 쟁쟁한 분들이 오셔서 이미 떨어졌다고 생각하며 재수할 생각에 기가 많이 꺾여 있는 상태였는데 합격 전화를 받고 남편과 방방 뛰면서 좋아했던 순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시댁과 친정에서도 너무 좋아해주셨다.

 합격 통보를 받고 개강일만 기다린 것 같다.

 신입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었는데 선배님들과 동기들 대부분이 언론매체의 PD, 작가, 기자, 앵커로 활동하시거나 기업의 광고 및 홍보를 담당하는 분 등등 다양한 분야에 계신 분들을 보니까 신기하면서도 내가 그 일원이 되었다는 기쁨에 자랑스러웠다.


 32살에 신입생이 되었지만 오히려 이때가 20살로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패기가 있었고 대학원에서 공부할 것에 대한 설레임이 있었다.

 그리고 비싼 등록금도 아깝지 않게 여겨졌다.

 20살 때의 내 모습은 학문에 대한 열정도 없었고 막연하게 미래의 불투명함을 느끼며 쓴 소주를 넘기는 패배자의 모습과 같았다.

 그리고 나의 20대는 엄마와 같이 장사를 하면서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했고 그래서 하루도 쉬지 않고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던 약 10년의 세월이었다.


 그 결과 20대 끝자락에 번 아웃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빨리 30대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20살 때부터 했었다.

 왜냐하면 서른 살이 되면 지금보다 안정감이 생길 것 같았고 삶의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30대의 나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노래 가사처럼 서른을 앞두고 지나가버린 20대의 청춘을 떠나보내며 노래하는 것에 사실 공감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30대 초반에 내가 하고 싶었던 강사 일을 하고 있고 꼭 공부하고 싶었던 언론학을 전공할 수 있어서 기쁜 나날들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40대가 되었을 때 ‘서른 즈음에’ 라는 노래에 깊은 공감을 느끼며 그 노래는 내 마음 속으로 스며 들어왔다.

 사실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음에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앞으로 평생 동안 숫자로 정해진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살기로 했다. 예를 들어 내 나이가 서른이 넘었다며 스스로 한정 짓고 한계를 설정해 놓고 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대학원에 입학을 한 나는 주부로서 강사로서 그리고 학생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때로는 피곤하긴 했지만 내가 모두 선택한 길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소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낮에는 강의 하고 살림을 했고 밤에는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과제를 했으며 강의 준비까지 해야 했다.

 노래 제목처럼 24시간이 모자랐다. 

 남편이 가사 일을 도와주면 좋겠지만 신혼 때부터 이 문제로 그렇게 다투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사분담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집안일을 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끝이 없다.

 남편은 내가 시키는 일만 그것도 억지로 했다.

 성균관 대학원은 석사 논문이 통과 되었다고 졸업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 전에 외국어 시험과 종합 시험에 합격을 해야 졸업의 자격이 주어졌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1학기 때 외국어 시험을 봐서 합격을 해 놓으면 부담감이 줄어들 거 같아 시험에 응시했고 열심히 공부한 끝에 합격을 했다.

 근데 일과 학업을 병행하다보니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고 신경 써야 될 문제도 많아서 무리를 해서 그런지 자주 체했다.


 밥 먹고 나면 소화가 되지 않아 속이 늘 답답했다.

 때로는 구토를 할 때도 있었다.

 매일 손을 따고 위장약을 먹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위 내시경을 했는데 위궤양이 심했고 역류성 식도염도 있었다.

 다행히 처방된 약을 먹으니 점점 좋아졌다.     

 남편은 외국계 제약 회사에 입사하고 싶어서 채용 공고가 날 때 마다 응시하고는 했지만 아쉽게도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모 대기업 제약 회사에 합격하였고 첫 직장처럼 다시 승부욕이 생겼는지 열심히 일하며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전의 회사보다는 모든 조건이 좋았다.

 특히 실적에 따라 지급하는 인센티브 조건이 좋았다.

 그 당시에 남편의 연봉은 1억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으로 20대 때 A기업에 입사했을 때의 연봉이 2400만원이었으니까 약 4년 만에 연봉을 4배 수준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

 양가 부모님들은 남편과 내가 승승장구 하자 매우 기뻐하셨다.


 우리 집은 사위가 차곡 차곡 경력을 쌓아서 대기업에 입사해 높은 연봉을 받게 되자 실력을 인정해 주고 칭찬을 많이 해 주었으며 또 그만큼 대우를 해줬다.

 그리고 시댁에서는 평범한 직장인이 아닌 강사 활동을 하는 나의 커리어를 존중해 주셨고 대학원에 합격했을 때는 남편 말대로 나를 쉽게 보지 않는 것 같다며 신혼 초에 비하면 조금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물론 약간의 시댁과의 갈등은 있었지만 신혼 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남편과 나는 각자 세운 목표를 이루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강사를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들던 시점이었다. 

 나보다 훨씬 더 커리어를 쌓은 강사 분들도 많았고 이 분들도 대학원 석사와 박사 과정을 밟는 등 자기 개발을 위해 돈과 시간을 들여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 또한 이제는 더 이상 신입 강사가 아니었다.

 프로 강사가 되기 위한 중간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커리어 관리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지 컨설턴트로 시작한 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업에서 선호하는 교육을 소화할 수 있는 강사가 될 수 있게 강의 전문 분야를 넓히기로 했다.


 강사로서 인적자원개발 HRD(Human Resources Development)분야로 더욱 더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다. 

 관련 책을 사서 공부하고 전문 강사들의 강연도 듣고 교육 받았다. 또 데이터로 입증된 이론을 알기 위해 논문까지 찾아 보았다. 

 HRD분야는 넓고 방대했다.

 이 와중에 가장 힘든 것은 일과 가사를 병행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남편이 조금이라도 스스로 도와줬으면 훨씬 수월했을텐데 장남이어서 그랬는지 부모님으로부터 너무 곱게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때 힘들어서 38kg이였는데 이 때 몸무게가 또 38kg이었고 44사이즈를 입어야 했다.

 대학원은 대학처럼 교수님이 강의하시는 것 보다 주로 학생들의 발표 수업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교수님의 코멘트와 자유로운 토론이 오고 가는 실무 중심의 교육으로 진행되었다.

 원래 내 직업은 강사였기 때문에 파워포인트로 발표하는 것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선배님들과 동기들이 내 직업이 기업 교육 강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발표를 제대로 못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나이인 만큼 남의 이목에 크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대학교 1학년 때 신입 OT와 연합 MT에 참여한 거 외에 그 어떤 다양한 행사 등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는 매 학기 1박 2일 일정의 신입생 OT 및 연합 수련회와 가장 이벤트가 많고 큰 행사인 ‘언정인의 밤’ 행사에 매번 빠지지 않고 참여했었다.

 또한 대학원 생활을 더욱 더 열심히 하고 싶었기 때문에 26대 홍보 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일이자 가장 슬픈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 16화 나는 강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