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현진 Sep 23. 2024

나는 강사다

 내가 강의를 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기관에 출강할 때 제일 많이 놀란 사람은 남편과 시댁 그리고 친정 부모님이었다.

 일단 남편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강사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는 나를 응원해줬다. 또한 한번의 큰 사고로 인해 생긴 운전 공포증 때문에 항상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를 자신이 시간이 날 때면 교육장에 데려다 주거나 데리러 오기도 했다.


 강의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나를 데리러 온 날은 같이 저녁을 먹기 위해 패밀리 레스토랑을 갔고 좋은 영화가 개봉할 때면 영화를 보고 들어갔다.

 신혼 부부 때 서로의 변한 모습으로 인해 참 치열하게도 싸웠던 우리는 마치 친구처럼 편한 사이가 된 서로의 동반자였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딸이 끼가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딸이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강의를 한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하셨다.

 그러면서 내가 강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더 성장해서 큰 무대에 서게 되면 그 때 모시겠다고 말씀드렸다.

 물론 시댁도 좋아하시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만 보면 집에서 하루 종일 뭐하냐고 물어보던 아버님은 이번 주에 강의 있냐고 물어 보시고는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사실 너가 이미지 컨설턴트가 되고 싶다며 학원을 다닐 때 들어도 잘 모르는 생소한 직업이고 잘 안 될 줄 알았는데 강사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 놀랐다고 하셨다.

 난 그렇게 앞으로 전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 혼자 힘으로 가는 것 보다 아무래도 나보다 경력이 많은 분과 함께 하고 싶었고 그 분의 강의 스킬 등 외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조직의 일원으로 들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쪽 일을 안하고 계시지만 ‘명품이미지연구소’ 에 입사지원원서로 나의 강의 프로필을 제출했다.

 그 때 당시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지 않고 공공기관 및 행정기관과 중. 고등학교 및 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꿈꾸는 건 다양한 기업체에서 내 강의 전문 분야를 많이 강의 해 보는 것이 내 목표였다.


 설마 될까 싶었던 내 서류는 염려와는 달리 통과 했고 대표님께서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

 면접을 보러 나가는 자리이기 때문에 준비를 단단히 하고 대표님을 만났고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대표님이 제 지원 서류를 보시고 깜짝 놀란 것이 대표님도 인천 지역에서 강의 수요가 꽤 있어 강의를 나가고는 하는데 인천의 주요 기관과 센터의 대부분 교육에 출강 하고 있는 비결을 물으셨다.


 난 명함 하나에 강의 구성안 및 제안서 등을 듣고 직접 교육 담당자님들과 미팅을 했고 무료 강의이든 시간당 몇 만원 강의이든 가리지 않고 열심히 준비해서 내게 온 기회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강의를 했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생각보다 좋은 결과가 나와서 기존 강사에서 나로 변경되고 전임 강사가 된 곳도 많아졌다. 또한 교육 담당자들께서 다른 기관과 센터에서 모실만한 강사가 없냐는 문의가 들어 올 때 마다 고맙게도 나를 추천해 주셨다고 했다.


 대표님은 나의 이런 면모를 좋게 봐 주셨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강사를 추천해 주었다면 교육 후 강사 평가가 좋게 나왔다는 증명이라면서 함께 일해 보자고 하셨다.

 나는 컨설팅 회사에 파트너 강사가 되었다는 기쁨에 대표님께 실망시켜 드리지 않는 강의를 통해 보답하기로 했다.

 난 스스로 내 커리어를 만들어서 보통 강사로 시작할 때 받는 시간 당 3만원 강사가 아닌 시간당 10만원으로 계약을 맺었다.


 어떤 분들은 시급이 얼마인데 시간 당 3만원 강의를 무시 하냐고 할 수 있다. 또한 시간당 10만원도 큰 금액이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 있다.

 그러나 이쪽 일은 매달 일정한 금액을 받는 월급쟁이가 아니기 때문에 수입이 달랐다. 어떤 달은 강의가 많아 강의료가 어느 정도 들어왔는데 또 어떤 달은 강의가 적어 몇 십 만원의 수입만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 직업의 가장 무서운 점은 마치 연예인처럼 선택 받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강사들끼리 경쟁이 치열하다.


 또한 강사 평가가 교육 담당자의 목표에 다다르지 않으면 그 곳에서는 두 번 다시 그 강사를 부르지 않는 영구 제명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강사 평가가 좋게 나왔다고 해서 계속 강의가 있을 때 마다 그 강사를 다시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육 담당자님의 섭외 스타일에 따라 다르지만 여러 강사 분을 모셔서 색 다른 강의를 받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사 평가가 잘 나왔다며 통계치를 보여 주면서 다음에 꼭 다시 모시겠다는 말씀을 해 주시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물론 정말 그 약속을 지키는 분들도 꽤 계시다.


 저번에는 전 직원을 대상으로 친절 교육을 해 주셨는데 이번에는 우리 회사 영업사원을 대상으로 비즈니스 매너 교육을 부탁드린다며 매우 감사하게도 다시 불러주신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교육 담당자님 마다 스타일이 다르다.

 또한 강사가 강의를 맡게 되면 그 강의 준비를 위해 몇일을 준비하고는 한다. 물론 매번 똑같은 강의안으로 강의하는 강사도 있지만 맞춤형 강의가 현장 분위기도 좋고 결과도 좋기 때문에 그 기업에 맞는 강의안을 처음부터 새로 만든다는 생각으로 준비를 한다.


 빔 프로젝트로 슬라이드에 띄운 파워포인트로 작성된 강의안은 시청각 교육에서 시각의 효과가 크기 때문에 그냥 자료 없이 강의로만 이루어지는 교육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물론 강사들마다 각자 스타일이 달라서 시청각 자료나 교재 등 자료 없이 구두 강의로만 교육을 이끌고 가는 분들도 계신다. 어쩌면 이런 분들이 더 베테랑일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이 교육을 진행해 나간다는 것은 그만큼의 노하우를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시청각 교육을 아직도 지향하고 있다.


 명품이미지메이킹 연구소의 파트너 강사가 된 나는 기업체 출강이 보다 더 많아졌다. 

 기업체 출강은 행정 및 공공 기관과 센터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일단 직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가장 분위기가 좋은 대상은 연수원에서 사전직무교육을 받고 있는 신입사원들이다.

 이들 대상으로 직장 예절 및 비즈니스 매너을 교육한다고 하면 또릿또릿한 눈빛으로 열심히 메모까지 하면서 경청해 주신다.


 또한 비즈니스 매너는 몸에 체득되어야 할 스킬이기 때문에 명함 매너나 악수 매너를 교육할 때 실습을 진행하는데 처음 사회로 나와 자신이 몰랐던 비즈니스 매너를 교육을 진행하면 의욕적인 자세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신다.

 내가 처음으로 기업체 출강을 한 곳의 교육 대상이 한 중소기업의 영업사원 분들이었다.


 강사 소개를 받고 단상 위에 올라가서 그 분들의 눈빛을 봤는데 

 ‘내가 영업을 몇 십 년을 한 사람인데 여자 강사가 무엇을 알겠어. 그냥 또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뭐 그런 교육이겠지’ 라는 눈빛이었다.

 일단 가장 어려운 직업 중의 하나가 사람을 만나는 직업으로 그 중에서도 딜을 해서 계약을 성공시키는 영업 사원 분들이야말로 회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분들이라고 치켜세워 드렸다.


 저보다 실전 경험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비즈니스 매너 분야는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이라며 추가로 칭찬 멘트를 해서 교육 분위기를 조금 띄어 놓는다. 

 그리고 그분들이 예상 하지 못한 카드를 꺼내들었다.

 바로 ‘나의 비즈니스 매너 점수는?’ 이라는 아주 간단한 사전 테스트를 먼저 진행했다. 20문항에 O,X로 된 간단한 테스트였다.

 이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가 나오신 분에게는 영화 상품권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라며 승부욕을 자극시켰다.


 그 분들은 ‘아..이런 건 뭐 껌이지’ 하며 평가지를 보는데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채점을 한 결과 충격적인 점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40점이 최하위 점수였고 60점 점수에 대부분 포진되어 있었다. 그 중 1위 는 딱 80점을 받으신 분으로 그 분에게 영화 상품권이 돌아갔다.

 너무 낮은 점수를 받아 면목이 없으셨는지 나를 보는 눈빛이 조금은 달라진 분위기였다.

 내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육을 하는 강사인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이 분들을 이끌어가며 신입 사원처럼 똑같이 실습을 하면서 2시간의 강의를 끝냈다.

 2부 강의는 이미지 메이킹 교육으로 영업사원 분들은 보여 지는 이미지가 중요한 분들이기 때문에 비즈니스 매너만큼 중요한 교육으로 2시간의 강의가 또 진행되었다.

 무려 4시간의 강의를 비교적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기업체 강의는 기관 및 센터 강의와는 다른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기업체 출강의 기회를 잡겠다며 기관과 센터처럼 막연하게 찾아가도 출입이 금지되고 쉽게 만날 수 없으며 그렇다고 교육 담당자에게 전화를 한다면 담당자에게 아마 잡상인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알아보니까 인터넷 사이트에서 기업체가 강사 구인 의뢰를 게시판에 올리면 강사 구인 의뢰를 한 회사의 강의 공고를 볼 수 있다. 그러면 강사는 회사에 강의 제안서를 보내고 1:1로 매칭이 되는 시스템의 사이트들이 몇 군데 있었다.


 그러나 강사들은 많은데 올라오는 강의 의뢰는 한정되어 있다.

 강의 의뢰 글을 게시하면 교육 담당자에게 수십 혹은 몇 백개의 강의 제안서가 쌓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강의 전문 분야도 아닌데 출강의 목적만을 가지고 강의 제안서를 이곳 저곳에 보내지 않았다. 


 구인 의뢰 회사의 교육 주제, 교육 대상자, 교육 시간, 교육 목적에 맞게 일일이 강의 제안서를 작성하여 내 강의 전문 분야 교육을 필요로 하는 회사에 보내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특히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마치 낚시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밑에는 고기들이 많은데 시간을 들여 낚시를 해도 계속 입질이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소식이 없어도 계속해서 강의 제안서를 보냈고 드디어 나를 선택해 준 회사들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웨딩업체의 친절교육, 키즈카페의 서비스 마인드, 청주의 중소기업 직원 대상의 직장예절, 부산의 신규병원 직원교육 등등 출강의 기회가 주워졌다.

 특히, 청주는 내가 처음으로 지방에 내려가 강의한 곳이다.

 남편은 고속버스를 타는 등 해서 혼자 청주로 내려가겠다는 나를 말렸다. 지방으로 내려가야 할 때 마다 운전을 못 하는 나 자신을 그렇게 원망했다.


 지금도 멋지게 운전하고 내리는 모든 여성들이 나의 우상으로 보인다.

 나를 말리는 남편에게 세상에 어떤 강사가 지방이라고 출강을 꺼리겠냐며 이제는 나도 서울, 경기권을 벗어나서 전국구 강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 청주를 내려감으로써 마치 우물 안 개구리였던 개구리가 우물 안에서 나온 느낌이라고 했다.

 교육 담당자님께서 내가 가는 중소기업이 많이 외진 곳에 있다며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내리면 픽업을 하러 오시겠다고 했다.


 그런데 교육이 퇴근 후에 이루어져 교육이 끝나면 밤이 된다.

 그래서 남편은 늦은 시간에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과정을 걱정해서 월차를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나를 위해 월차를 내고 자동차로 함께 청주로 내려갔다.

 마치 여행 온 기분 같았다.

 그리고 각 지방마다 특성이 있는데 청주는 충북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1년 반의 시간을 충남에서 살았기 때문에 교육생 분들이 친근하며 가깝게 느껴졌다.

 주로 교육은 근무시간에 이루어지지만 가끔 퇴근 후 교육이 진행되기도 하는데 하루 동안의 피곤함이 쌓인 상태이고 불만 섞인 분들이 많이 계신다. 내가 직장인이라 할지라도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퇴근 후 교육을 진행하게 되면 교육 전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등 직원 분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초반부터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고 들어가야 한다.


 아이스 브레이킹이란 말 그대로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것인데 내가 선택한 방법은 웃음과 유머였다. 어설프게 웃기려고 하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살얼음판 같은 이 분위기를 깰 수 있도록 지금은 유튜브가 있지만 예전에는 재미있는 사진과 웃긴 동영상을 10분 정도 보여 드리고 시작하니까 조금은 서로 편해진 분위기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강적을 만나면 이것도 소용없다.

 근데 청주 교육생 분들은 교육장에 들어오시는데 한숨과 함께 짜증 섞인 표정이 아니라 동료들과 이야기 하며 웃으시면서 들어오셨다.

 속으로 다행이라 생각해서 처음으로 마이크 잡고 말씀드린 말이

 ‘퇴근 후 교육이라 여러분이 많이 지쳐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웃는 표정으로 절 맞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청주까지 온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라고 말씀 드렸더니


 ‘우리 청주 사람들은 착해요’ 사투리 억양으로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데 정감이 갔다.

 그리고 강의를 하다 교육생 여러분들에게 질문 할 때가 있는데 그날도 청중에게 다가가 질문을 하며 마이크를 드렸더니 그분이

 ‘행님아~ 니가 해라~’ 라고 하셔서

 그 대답에 다 함께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내 첫 지방 강연이었던 청주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많이 갔던 곳은 부산이었는데 ktx를 타고 내려가면 다른 지방을 찾아 다니는 것 보다 더 쉽게 갈 수 있다. 그리고 리조트와 호텔이 있는 강원도도 많이 다녀본 것 같다.

 누군가가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강의가 뭐냐고 물어보신다면 생각할 겨를 없이 답할 수 있다. 

 한번은 ‘룸싸롱’ 에서 강의 의뢰를 올려서 강의 제안서를 보냈는데 최종 컨택이 되었다.

 그 교육을 담당하시는 분이 바로 만나서 얘기할 수 있겠냐고 해서 미팅 날짜와 시간을 잡았다.

 사실 룸싸롱에서 근무하시는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강의가 들어올 거라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나의 편견이었다.


 룸싸롱과 함께 트렌스젠더와 바 등이 있는 규모가 매우 큰 업소였고 아직 영업시간 전이어서 실내는 어두컴컴 했다.

 어느 한 분이 나오셨고 그 분이 강의 의뢰 글을 올린 실장이라고 하시면서 어떤 룸으로 들어가셔서 불을 키시더니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신기해서 이리 저리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테이블 위해 기본적으로 세팅되어 있는 생수와 기타 등등 음료수들이 있었고 테이블

 및 쇼파, 샹들리에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였다.

 잠시 어색했지만 용기를 내서 진짜 내가 알고 싶었던 것에 대해 질문을 했다.

 ‘교육 목적 란에 여직원들에게 꿈을 심어달라고 쓰셨는데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는지요? 그리고 왜 강의를 기획하게 되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다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술 마신 사람들 상대로 장사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죠.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애들이 이렇게 어렵게 번 돈을 너무 펑펑 써요. 그렇다고 해서 천년만년 여기서 일할 수도 없죠. 나이가 들면 여기서 일하고 싶어도 일을 못 합니다. 그래서 뭐였든지 간에 애들한테 뭐 하나라도 꿈을 심어 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비록 이렇게 먹고 살지만 봉사활동도 꾸준히 합니다. 겨울철에는 연탄 봉사도 하고 한번은 태안 반도 기름 유출이 되었을 때 전부 다 내려가서 기름 닦고 왔습니다’ 


 난 순간 충격을 받았다.

 근데 그 충격은 나에 대한 충격이었다. 

 강사라는 사람이 직업에 따라 편견을 갖은 내가 너무 오만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봉사 활동을 하겠다는 마음만 있었지 한번도 해 보지 못한, 아니 안 한 내가 부끄러웠다.

 누구든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와 기회가 있는데 내가 뭐라고 그 권리와 기회 뒤에 감춰진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며 의심한 나는 강사로서 아직도 멀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유기견 보호소에서 자원 봉사를 하고 싶다는 말만 했지 단 한번이라도 가서 그 아이들을 쓰다듬어 주거나 아이들 주변을 청소해 주는 등 무엇 하나라도 하지 않은 내가 참 게으르게 느껴졌다.

 그곳에 가서 버려진 아이들을 보는 것이 두려웠고 집에 올 때 나를 향해 매달릴 아이들을 뒤로 하고 떠나는 것이 자신 없다는 심정은 못난 핑계였다.

 그렇게 미팅을 하고 나와서 내내 생각했다.


 어떻게 접근하여 즉, 어떤 방향으로 어떤 내용으로 강연을 할 것인가? 

 꿈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은 ‘셀프 리더십’ 강연 주제로 접근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분들은 현직에서 직접 뛰며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는 분들로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을까 싶었다.

 강연 날짜는 정해졌는데 방향을 계속 못 잡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 와중에 실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가 따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아...네. 보통 빔 프로젝트에 슬라이드가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 장치들이 있는지요?‘

 ‘아니요’

 ‘그래서 일일 대여를 해 주는 곳이 있습니다.

그 업체를 통해서 준비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나는 교육 바로 전날에야 강연 방향을 잡았고 간단한 ppt강의안을 만들었다.

 도착하고 나서 빔 프로젝트와 슬라이드 대여비를 들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니까 실장님이 말씀하시기를 

 ‘대여는 무슨 대여를 합니까? 샀습니다.

 꾸준히 정기적으로 강연을 들을 생각이기 때문에 필요해서 산 것이니 부담느끼실 필요 없습니다.’

 ‘네’

 ‘그리고 이거 강사료니까 받으십시오’

 ‘강의 끝나고 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줄 것 인데 기분 좋게 미리 받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교육장은 이 업소에서 가장 큰 룸이 교육장이었다. 여기서 일하는 여성들의 직원 수가 100명이 넘는다는 것은 미리 들었다. 실장님이 되도록 모든 여직원들이 참여할 수 있게 푸쉬를 했는데 아마 60명 정도 올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무리 가장 큰 룸이라고 했지만 60명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근데 강의 시간이 다 되어도 여직원 분들이 15명 정도 밖에 안계셨다.


 화가 난 실장님은 이럴 줄 알았으면 6시 시작이라고 하지 않고 5시 시작이라고 할 걸 그랬다면서 화가 좀 많이 나셨다.

 나는 실장님이 괜찮으시다면 이 이후의 스케줄은 없으니까 20분 정도 더 기다려 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여쭤보니 가게 오픈 시간 준비도 해야 하니까 그럼 한 시간 안에 끝내 줄 수 있겠냐고 물으셔서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기다렸다.

 한 30여 명이 모였고 강의를 시작했다.


 나는 31살이었던 그 때 까지 내가 알콜 중독이었던 아빠 밑에서 학대를 받으며 자라 온 이야기를 남편 외에 그 어떤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었다.

 근데 나는 이분 들 앞에서 내 진짜 이야기를 하기로 결심했다.

 나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 부터 대중 강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얘기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얘기들로 분위기를 잡으려고 했는데 이분들의 눈빛은 같은 여성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매서웠고 내 이야기는 뒷전이고 핸드폰을 계속 보시는 분들도 계셨다.


 물론 노트와 필기도구를 앞에 두고 나를 바라봐주고 계신 분들도 계셨다.

 내 이야기를 서서히 담담하게 얘기하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나를 봐 주시는 분들이 서서히 생기기 시작했다.

 남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던 나는 중간 중간 강사로서의 감정을 컨트롤 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얄궂은 운명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첫 번째는 엄마였고 두 번째는 공부였다고 말했다.

 그 때 나는 학생이었으니까 할 수 있는 것이 공부 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물론 ‘공부’ 였다는 것이 뻔하게 들릴 수는 있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선택이였다고 말씀드렸다.

 아니면 자신이 되고 싶은 직업으로 예를 들면 메이크업 아티스트, 디자이너, 헤어디자이너, 네일 아트, 피부 관리사 등등도 목표가 될 수 있다. 

 꿈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만약 내게 일말의 촛불이라도 없었다면 생각이 꼬리를 물도록 계속 생각하고 힘들어하고 아파했을 것이라 말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나는 어쩌면 극단적인 선택을 해서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라고 담담히 이어갔다.

 이렇게 내 이야기를 모두 들려 드렸다.

 그리고 딱 한 장의 ppt만 만들어 갔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 드렸다.

 어느 한 사람의 무덤인데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라는 명언으로도 유명한 문학인 조지 버나드 쇼의 무덤이었다.


 근데 난 그의 무덤 앞에 있는 묘비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묘비명의 원문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해석하면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자 행동인데 우리는 삶 앞에서 우물쭈물 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인생을 개차반으로 살았던 사람이 묘비명을 ‘우물쭈물 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라고 썼다면 그 사람은 죽어서도 욕을 먹을 것이다. 


 지금부터 미리 묘비명을 정해 놓고 실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라는 말과 함께 강의를 마쳤다.

 강의가 끝나자 박수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내가 듣고 싶은 건 마음의 소리였다.

 근데 어떤 한 분이 나가시면서 실장님께

 ‘실장님은 꿈이 뭐에요?’

 저를 보고 실장님이 웃으시면서 대답하시기를

 ‘난 성격상 어물쩍거리지 못해. 이미 난 실행중이야’ 라고 유쾌하게 받아 주셨다.

 그리고 내 귀에 맴돌았던 말은 어떤 분이 나가시면서 혼잣말로 


 ‘난 2층에 공주 컨셉으로 미용실 차리고 싶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그 혼잣말이 그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

 그분은 이미 목표를 세우신 것이다.

 비록 다른 여타 강의들처럼 청중 중의 몇 분이 오셔서 질문을 하시거나 아니면 교육장에서 빠져나갈 때 ‘오늘 강의 좋았습니다’ 와 같은 리액션은 없으셨지만 나가시는 뒷모습을 보면서 이 날 내 부족한 강의를 듣고 몇 분이라도 마음이 움직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곳에서 나오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나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이 이 분들의 삶에 기억에 남을 만한 하루였을지 궁금했다. 

 나 역시 돌아오는 길에 내 인생이라는 바다 위에 부표를 다시 띄울 때가 되지 않았나 싶었다.

 꿈이라는 것은 나의 삶을 걸고 끝까지 가 보지 않고는 얻어질 수 없는 절대 쉬운 과정이 아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꿈을 그린 자는 그 꿈과 닮아있을 것이다.     


이전 15화 잃어 버리지 않았던 나의 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