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결혼하고 나서 몇 개월 뒤 남동생은 현역 제대를 했다.
제대하고 집에 왔지만 집 안의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누나에게 의지하며 지내 왔는데 누나는 결혼을 하였고 9년 동안 키웠던 재롱이 마저 없는 집안에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제대 하고 나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6살 나이 차이가 나고 그동안 우리 남매끼리 의지하며 살아왔던 삶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내 동생은 항상 애틋한 존재였다.
그리고 부모님은 맞벌이 하시고 누나는 학교에 갔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늘 혼자 커왔던 남동생이어서 동생만 보면 아직까지도 짠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제대하고 나서 사회에 적응할 시간 없이 바로 아르바이트 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고는 했다.
그런데 내가 결혼하고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다시 시련이 오고 말았다.
그 때는 시댁 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웠고 남편은 결혼하고 나서 여러모로 다른 모습으로 날 실망시켰을 때였다.
물론 남편 또한 나에게 실망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각자의 삶을 살다가 부부라는 이름으로 합쳐지면서 하나가 되기 위한 시간을 갖으려 했지만 부부는 하나가 아니다. 물론 나아가는 방향은 같을지 모를지라도 부부는 엄연히 말하면 둘이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기존 관념이 결국 갈등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공통된 취미는 같이 하되 각자의 시간은 인정해 주기로 했고 힘들 때면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되 평소에는 각자 자신의 생각대로 삶을 대하는 태도를 인정해 주기로 했다.
이렇게 여타 다른 신혼부부처럼 치열하게 싸우다가 제자리를 잡는 듯 하였다.
근데 아빠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빠가 결혼 전부터 현진이가 결혼을 하면 조금씩 술을 마실 것이라고 말을 가끔씩 할 때 마다 아빠에게 그 때는 내가 죽고 말지 두 번 다시 그런 고통 속에 갇혀 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진짜 내가 결혼하고 6개월 정도 지나자 다시 술을 마신 것이다.
약 7년 만의 음주였는데 신기하게도 술버릇은 똑같았다.
신체적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술주정을 하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엄마와 남동생을 괴롭혔다.
그리고 분가한 나에게 술에 취해 밤에 전화해서 꼬인 혀로 말하는데 미칠 지경이었다.
예전처럼 도시가스 선을 칼로 자른 뒤에 라이터를 들고 가스가 온 집안에 퍼질 때 라이터를 키겠다는 주사를 부리기도 했는데 다시 술을 마신 후 예전과 똑같은 협박을 해서 남동생이 제압을 했고 엄마는 도시 가스 밸브를 찾아 잠가 놓았다고 한다.
엄마가 시집 간 딸에게 정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사태가 점점 심각해져 다시 아빠가 술을 마신다고 나에게 털어 놓은 것이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예전에는 두려움에 떨었었는데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어떻게 또 술을 마실 수 있을까? 라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알콜 중독 전문 치료 정신 병원을 알아봤는데 직계가족 2명이 싸인 하면 강제 입원이 된다는 사실도 알아났다.
물론 2017년 5월부터 강제입원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난 당장 아빠를 입원시킬 만한 병원을 알아보았고 이제는 더 이상 당하지 않을 것이라며 엄마와 내가 싸인을 해서 아빠를 강제 입원시키자는 결론을 내렸다.
아빠가 술에 취해 전화를 할 때 마다 나는 냉정하고 차갑게 받았다.
옛날 같았으면 두려움에 떨어서 말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끌려 다니고 싶지 않았다.
남동생은 제대하고 나서는 아빠가 술을 끊었으니까 의욕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 했는데 아빠가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예전처럼 폭력적 성향을 보이는 아빠를 제지할 때 마다 삶의 의지가 꺾였다고 한다.
동생은 군대 가기 전부터 약간의 불면증이 있었는데 군대에서 불면증이 더 심해져서 안 되겠다 싶어서 수면 효과가 있는 약 처방 받아서 먹고 있었던 때 였다.
불면증이 심해서 원래는 보통 25mg부터 시작하는데 100mg을 복용하고 있었다.
동생은 그 전날 쎄로켈 한 달 치를 처방 받아서 가져 왔는데 한 알에 100mg인 약을 한 달 치 30알을 모두 털어 놓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니까 한번에 100mg의 30배인 3000mg을 먹은 것이다.
아침에 급하게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동생이 약을 먹었다는 것이다.
언제 먹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위세척을 할 수 있는 상황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일단 빨리 119를 부르라고 했고 남동생은 병원에 실려 갔다.
약을 먹은지 꽤 된 것 같다며 위세척은 할 수 없고 바로 중환자실로 올라갔다고 한다.
나는 울면서 남편을 깨웠고 병원에 가려고 준비하는데 너무 놀라서 어질어질 하면서 앞이
빙빙 도는 것이다.
마음을 안정시켜야 하는데 전혀 안정이 되지 않고 있었다.
빨리 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 때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동생과 관련된 소식 일까 봐 어지러우서도 전화를 받았다.
근데 놀랍게도 119로 동생이 이송된 이후에 집안에 숨겨 놓은 술을 마신 상태로 전화가
왔다.
이미 술에 취해 혀가 돌아갔고 무슨 말을 하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식이 죽음의 문턱에 있는데도 술을 마시는 사람이 아빠라고 할 수 있는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난 술 마신 아빠에게 처음으로 화를 내며 이 상황에도 술이 생각나냐며 분노로 가득 찬
상태로 막 소리를 질렀다.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기 때문에 하루에 한번 면회가 허락되니 오늘은 일단 가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는 그러라고 했다. 그러면서 의사가 말하기를 깨어날 수 있을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고 만일 깨어난다고 해도 평생 장애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며 간과 콩팥이 많이 망가진 상태이면 위험한 상태로 뭐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고 말해 주셨다.
그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내가 그 시간들을 어떻게 지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다행이 남동생은 3일 만에 깨어났고 검사를 진행했는데 간수치가 너무 높은 것 빼고는 이상이 없다며 그나마 젊은 남자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해독 기능이 강해서 이만한 게 다행이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계속 병원에 입원해서 간수치를 봐야 한다고 했는데 동생은 병원이 너무 답답하다며 퇴원하고 싶다고 했다.
가족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불안했다. 또 다른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할까봐 그게 겁이 났다.
주치의는 그럼 1주일 동안 그 어떤 약도 먹지 말고 술은 당연히 안 된다고 하시면서 1주일 뒤에 병원으로 오라고 하셨다.
대신 퇴원 각서를 쓰고 말이다.
친정에 가 있으려고 하는데 엄마가 혹시 또 아빠가 술을 마실 수도 있는데 왜 여기를 오냐며 엄마가 잘 지켜본다며 오지 말라고 했다.
동생은 1주일 동안 했던 약속을 모두 지켰고 간수치는 정상이 됐다.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이 때 동생이 잘못 되었다면 나와 엄마는 삶을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나는 아빠한테 전화해서 막 쏘아댔다. 그렇게 술을 힘들게 끊어 놓고 왜 다시 술을 마셔서 아들이 죽음을 결심하도록 했냐며 언제는 내가 결혼할 때 눈물이 나올까봐 혀를 깨물었다고 하는데 다시 한 번 술 마시면 그 때는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강력하게 얘기했다.
아빠는 옛날처럼 똑같이 주사를 부릴 줄 몰랐다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이후로 술을 완전히 끊으셨다.
엄마와 동생의 자살시도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릴
뻔했다.
한 사람의 악한 영향력이 다른 가족에 미치는 트라우마는 심각하다.
평생 그 상처와 후유증으로 행복하지 않은 삻을 살다가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정폭력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엄격하게 처벌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