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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진 Sep 30. 2024

다시 그리고 다시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충격 급성 스트레스 장애와 말로만 듣던 공황장애 그리고 섬유근육통이 찾아왔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다거나 아니면 누가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았고 때로는 송곳 등 날카로운 것으로 누가 내 심장을 찌르는 듯 한 느낌이 들면서 과호흡 증상도 찾아왔다. 그리고 자다가 갑자기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무서운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런 증상들이 점점 뜸해지고 있었고 점차 좋아지고 있었다.

 아주 가끔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찾아 올 때도 있었지만 서서히 공황장애라는 무서운 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낯선 병명이기도 한 섬유근육통으로 인해 약 1년 반 동안 내가 사랑하는 일인 강사 일을 쉴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가 의료사고로 인해 새끼손가락을 한마디를 절단하기도 했다.

 

 섬유근육통이 매우 심해져서 일상생활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통증이 매우 컸다.

 이 때의 나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가둬놓은 잠겨진 시간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신체적 고통이 내 정신을 갉아 먹는 시간 속에서 절망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지금껏 어떻게든 견뎌내며 다시 일어선 것처럼 해 보고 싶은 열정과 해 낼 수 있다는 의지로 잠긴 시간의 문을 열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마저 쉽지 않았던 것은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가끔 근처 슈퍼를 가거나 은행을 가기 위해 밖으로 나오면 공기가 낯설게 느껴지고는 했었다.

 그래서 이러다가 대인기피증이 생길 것 같아서 무슨 일을 해서라도 세상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 세계 펜데믹 코로나가 우리내의 일상을 습격하고 잠식하고 있었다.

 다행이도 엄마와 남동생이 운영하는 가게는 그런대로 잘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코로나 확진자 수가 급증하면서 손님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고 정부의 영업제한으로 생계를 넘어서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일반음식점과 호프집 등은 밤 9시 혹은 10시 까지 영업이고 그 이후는 포장 및 배달만 할 수 있었는데 음식점은 보통 점심 장사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호프집은 1차로 오지 않고 2차로 오기 때문에 보통 저녁 8~9시 이후에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는데 밤 9~10시 까지 영업 제한을 받으면 영업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가게 창업 이후 최초로 아예 한 테이블도 받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거기에다 내가 몸이 아파 일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여서 내가 벌어들이는 수입은 없었다.

 영업제한을 연타로 맞게 되니까 경제적 타격이 커서 대출을 받아야 했다.

 어찌 나에게 이런 일들은 기가 막히게 겹치게 오는지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받아 들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한다.


 원래 아르바이트생이 있었지만 한푼이라도 아껴야 했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로 아쉽게 이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금,토,일은 손님이 꽤 몰리기 때문에 남동생 혼자 홀을 관리할 수 없어서 용기를 내고자 내가 서빙을 하기로 했고 오래 간만에 화장을 하고 악세서리도 하며 트레이닝 복이 아닌 나름 코디한 옷을 입고 출근했다.

 처음에는 화장하는 것도 어색할 정도였고 사람들 틈에 껴 있는 것도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섬유근육통의 통증이 갑자기 찾아 오거나 통증이 더 악화될까 봐 두려움도 있었다.

 역시 서빙을 하고 바쁘게 움직이니 집에 가만히 있는 것 보다 잡생각이 없어지니까 가끔 통증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들 틈에 껴 있는 느낌이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과 어울리는 기분이 들면서 왠지 생기가 돌고 알 수 없는 성취감도 들었다.

 최대한 친절하고 정중하게 손님에게 주문을 받고 안주를 갔다 드리며 술을 추가로 갔다 드릴 때 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씀드리며 갖다 드렸다.


 처음에는 단골손님들이 나를 좀 낯설어 하셨는데 몇 번 내 얼굴을 보게 되면서 좀 더 친근감 있고 편안해 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40대니까 20대들은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친구들도 있었고 가끔 그들과 농담도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20대 친구들을 보면서 이 친구들의 젊음이 부러워지고는 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였는데 이들의 자유에서 느껴지는 거리낌 없는 모습은 내게 신선함을 주기도 했다.

 단골손님이 오실 때면 반가운 마음에

 ‘어서 오세요’ 가 아닌

 ‘안녕하세요!’ 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그러면 손님들은 자신들을 알아봐 준다며 기분이 좋아지셔서 


 ‘오래 간만에 왔죠? 죄송해요’ 라고 말씀하시고는 했다. 

 가끔 무리를 하면 섬유근육통으로 인해 몇 일 가게를 못 나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럴 때 마다 손님들이 나를 찾는다는 말을 들을 때면 왠지 기쁜 마음이 들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결제는 내가 담당 했는데 결제할 때 항상 꼭 허리를 숙이고 인사드리면서 영수증과 카드를 두 손으로 정중하게 드렸다.

 왜냐하면 이 분들 덕분에 우리 가족이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에게도 단골집이 있었듯이 이분들의 아지트가 되고 싶었고 세월이 흘러 그분들의 인생을 돌아봤을 때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집을 꾸준히 찾아오시는 단골손님들에게는 반가운 마음으로 더 친근감 있게 다가갔던 것 같다.

 20대에서 40대를 겨냥한 호프집이었는데 신기하게 50대 분들도 꽤 있었다.

 어느 날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세 분이 가게 문을 열고 


 ‘우리 나이도 손님으로 받아줘요?’

 라고 여쭤 보시길래 

 ‘당연하죠. 어서 들어오세요. 이 자리가 편안 하실 거에요’ 하며 자리를 안내해 드렸다. 

 그 분들은 주문을 하시고 가게를 두리번거리시며 내가 서빙 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보셨다. 

 처음에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왜 술만 드시고 세 분이서 대화가 없는지 궁금했는데 그쪽 테이블만 신경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바쁠 때에는 이리 저리 뛰면서 다녔는데 손님들이 천천히 갔다 줘도 된다며 힘들게 뛰어다니지 말라고 말씀해 주셔서 오히려 손님들로부터 에너지를 받았다.

 손님이 몰리는 피크 타임이 있는데 마침 그 시간이라 바쁘게 서빙하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

 50대로 보이는 세 분이 결제를 하신다고 해서 얼른 가서 결제를 도와 드렸다.

 근데 한 분이 갑자기  


 ‘내 딸 보는 거 같아서 주는 돈이니까 갈 때 택시 타고 가요’ 하면서 만원을 주시는데 그 순간 눈물이 맺혔다.

 그분들의 배려 깊은 마음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끔 현금으로 계산하시고 잔돈을 받지 않고 가시는 분들도 계셨다.

 그리고 나와 친하게 지내는 젊은 친구들은 내가 테이블을 정리하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일어나기 전에 자신들 테이블을 일부 정리하고 가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매너가 좋은 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라는 명언처럼 분위기를 즐기고 이야기가 오고 가며 술잔을 기울이는 평범한 손님들이 더 많았다. 

 재미를 붙이고 일을 하다 보니까 예전의 내 모습처럼 파이팅 하는 의지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인으로 지내는 강사분들과는 코로나로 인해 강의가 완전히 사라졌는데 이게 언제까지 갈지 모르니 더 답답하다며 서로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대인기피증이 생길 것 같고 통증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몇 번 망설이다가 많은 용기를 내고 나온 가게였지만 사람들과 마주하고 부딪히고 일상을 바쁘게 보냄으로써 이렇게라도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수백명 사람들 앞에서 강의할 때도 떨지 않았는데 처음 출근해서 주문 받으러 갈 때 긴장 하고 떨리기 까지 했다.

 이렇게 시작은 어려울 수 있지만 막상 스타트 라인을 끊고 나가면 앞으로 전진하게 된다.


 그래서 뭐든지 처음이 어렵지 막상 뭐라도 하면 성취감으로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통증이 일상화 된 삶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통증을 내 친구로 여기기로 했다.

 그러자 조금 편안해 졌고 내가 얻고 있는 성취감으로 생동감이 들면서 스트레스가 줄었는지 통증이 가라앉는 날들이 있었다.


 재활치료가 중요했는데 이런 저런 방법을 겪어보니 한의원 물리치료가 내게 맞았다. 매일 물리 치료를 받지 않으면 몸 컨디션이 나아지지 않았다.

 마치 하루살이 같은 삶을 사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럴수록 본업을 위한 개발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로 인해 잠시 쉬어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이 시간들을 역이용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먼저 통증으로 인해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책과 너무 멀어져 있었는데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과 내 일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튜버 강사 분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반성도 하게 됐다. 

 역시 배움은 스타트 라인은 있을지라도 피니쉬 라인은 없다는 생각을 뼈저리게 느꼈다.

 예전부터 관심 있었던 상담심리학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 자격증을 준비했고 또한 내 강의전문분야에 관련된 다른 자격증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오래 간만에 펜을 들고 밑줄을 치며 연필로 메모하고 암기하는 그 순간만으로도 뿌듯하면서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러나 앉아 있으면 섬유근육통으로 인한 통증이 2~3배 되는 날이 많은데 공부를 하려면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해서 너무 힘든 날은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버텨내며 결국 몇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31살 때 아카데미 수료 후 길을 찾고자 직접 발로 뛰었던 때를 떠올리면서 46살에서 45살로 넘어가는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자기 개발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이 시간은 강사로서 자격을 판단할 수 있는 중간 점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스트레스라고 해서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나를 발전시키는 노력 스트레스와 나를 해롭게 하는 압박 스트레스로 나뉜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며 이불 속으로 꽁꽁 숨었던 나는 일단 이 이불부터 치워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시간은 아빠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인해 모든 것이 정지되었지만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옴으로써 힘들 때도 있지만 몸도 마음도 깨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가까운 곳에서 찾으면 된다.

 성취감이 생기면 자존감이 생기고 자존감이 생기면 자신감도 강해진다.

 처음부터 자신감을 가지려 한다면 실패할 확률이 크다.

 사실 이 책을 쓰기 전에 많은 고민을 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말해야 했고 그로 인한 후폭풍은 없을까 걱정도 했었다.


 또한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배은망덕한 짓이 아닐까 싶어 몇 번을 망설였다.

 그리고 떠올리기 힘든 한 순간 한 순간을 기록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다시 겪어야 해서 너무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완성시키겠다는 결심 한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제 그만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비워내고 싶었다.

 내 삶의 1부를 정리해 보면서 나를 객관화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수많은 트라우마에서 나를 건져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인생의 힘든 순간과 역경과 시련에 놓인 사람들에게 나 같은 사람도 살아왔고 살아내고 있다며 용기를 불러 일으켜주고 싶었다.  

 물론, 난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내 이야기가 그들에게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갖고도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나처럼 그리고 나 같은 사람도 살아가는데 이 책을 읽는 힘든 시간에 놓인 그대도 충분히 살아나갈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상처의 모양일지라도 매번 넘어져야 했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위로 받고 싶었다.

 난 내 안에 생채기가 생겨 피를 흘리고 있을 때도 흐르는 피는 커녕 눈물도 흘릴 수 없었다.

 엄마에게는 마치 잔다르크처럼 의지할 수 있는 장녀의 모습이어야 했고 여섯 살 어린 남동생에게는 든든하고 멋진 누나의 모습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난 누구를 위로해 줄 수 있었으나 위로 받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나도 위로 받고 싶다.

 손님으로 오신 점잖은 신사분이 내 딸이 생각난다며 일 끝나고 퇴근할 때 택시 타고 가라며 만원을 주셨을 때 눈물이 맺혔던 이유가 마치 위로 받는 듯 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은 지금부터다.

 끝까지 희망과 기대로 내가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내 인생에도 맑은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는 제발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

 내 일생의 반이나 되는 40년 동안 몸과 마음이 아팠었다. 그래서 이제는 부탁하건데 이제부터라도 그냥 평범하게 그리고 잔잔하게 살아가고 싶다.

 내 삶의 목표는 엄마라고 앞전에 얘기했었다. 만약 엄마가 계시지 않았다면 난 내 인생을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엄마가 항상 옆에 계셔 주셨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내가 살아있게 해 준 존재.

 내가 살아가게 해 준 존재.

 내가 너무 사랑하는 존재.

 나를 눈물짓게 하는 존재.

 그러나 나를 살려 주는 존재.


 나는 이제 내 삶에 좋은 일만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 인생은 지금까지 버거운 큰 신발을 신은 것처럼 항상 위태롭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나는 그 버거운 큰 신발 탓에 결국에는 여러 번 쓰러질 수 밖에 없었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 왔던 것 같다.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내 인생이 절정에서 곤두박질 칠 때 마다 일어났듯이 말이다.

 ‘언제나...’ 그렇게 그렇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 용기를 내 보려 한다.

 그리고 나의 인생 2막은 다시 한번 빛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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